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63
제162화
긴 수염을 휘날리는 고대의 장수가 앞발을 높이 치켜든 말을 타고서 거대한 칼을 휘두르는 형상의 동상 밑에 한 덩어리인 양 다닥다닥 붙어있던 여인들 중 누군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하수린에 의해 목이 달아난 마인의 하초에 걸려 있던 천 조각으로 몸을 가리고 세평회 인사들이 선 곳으로 다가왔다.
출렁이는 가슴에 손을 댄 여인이 허리를 접었다.
“악마들로부터 저희를 구해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스물 한두 살쯤 되었을까. 가녀린 몸매였지만 강단이 있어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녀의 감사인사에 답례하려던 하수린은 여인이 고량에게 시선을 두자 그에게 응답을 미루었다.
“응당 해야 할 일이었소. 고생이 많았소.”
여인이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 하수린이 그녀에게로 가서 야윈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러나 여인은 하수린에게 주의를 돌리지 않고 고량만을 응시했다.
고량은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나를 아오?”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량은 당혹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듯한데 어디서 보았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모를 때는 물어보는 게 최선이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소?”
고량은 여인에게서 엉뚱한 대답이 튀어나올 것을 염려하지 않았다. 여자 문제에 관한 한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이었다. 목전의 여인이 홍루 같은 곳에서의 하룻밤 인연이었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고량의 질문에 여인이 반문했다.
“저를 모르시나요? 오실 적마다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셨잖아요.”
답변을 못하고 당황하는 고량에게 하수린이 곱지 않은 눈길을 쏘았다.
여인이 고량을 곤경에서 구해주었다.
“오래전 몇 차례 이곳을 방문하신 적이 있지 않나요? 고 대협께서 제 할아버지와 담소를 나누실 때…….”
고량의 탄성이 여인의 말을 잘랐다.
“아!”
이제야 알아차렸다. 여인은 문찬표국의 주인이었던 조영방의 손녀딸일 터였다. 조영방은 방탕한 생활로 병을 얻어 그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불효자식이 남긴 외동딸을 금이야 옥이야 아꼈다. 십사오 년 전 고량이 그를 찾을 때마다 그의 무릎에는 예쁘장한 소녀가 앉아있었다. 용모만이 아니라 행동도 사뭇 귀여워 고량은 무뚝뚝함의 가면을 벗고 소녀를 살갑게 대했었다.
“너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말끝을 흐리는 고량을 보며 소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녀의 조부처럼 오른쪽 눈이 실그러지며 짝눈이 되었다.
“조혜연(趙惠蓮)이에요.”
“그래, 혜연이. 오랜만이구나. 이제 보니 조 국주님과 판박이처럼 빼닮은…….”
실수를 깨달은 고량은 말을 잇지 못했다. 웃음기가 가신 조혜연의 얼굴에 비감이 서렸다.
“할아버지는 얼마 전 운명을 달리하셨어요. 고 대협을 뵈셨으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 고 대협 얘기를 자주 하셨어요. 장차 무림을 울리는 일대영웅이 될 거라며. 오륙 년 전부터 고 대협께서 금강권이라는 별호를 얻고 승승장구하자 당신의 일처럼 기뻐하셨어요. 정맹의 용호에 드는 건 따 놓은 당상이라시며 그 전에 한 번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하셨는데. 사월에 구인결 소식을 들은 이후로는 몇 번이나 고 대협을 찾아가 볼까 고민하셨어요. 실제로 표국 일로 여름에 주안에 가신 김에 용기를 내어 삼보장에 들렀는데 고 대협이 안 계셔서 그냥 돌아오셨다고 했어요. 얼마나 아쉬워하셨는지 몰라요.”
고량은 죄책감을 느꼈다. 문천표국주 조영방은 그의 선친과도 친분이 있을뿐더러 그가 무명소졸이었을 때부터 그를 아꼈었다. 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한 번도 그를 찾지 않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무심한 처사였다.
“미안하다. 조 국주님을 뵐 면목이 없구나.”
고량의 사과에 조혜연이 도리질을 했다.
“아니에요. 악마들을 처단하고 저희들을 구해주셨잖아요. 할아버지께서도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며 고마워하고 계실 거예요.”
고량은 자기도 모르게 천공으로 시선을 올렸다.
고량을 지그시 바라보던 조혜연이 하수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희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고맙긴요. 고 대협 말마따나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에요.”
“염치없지만 은인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뭔데요?”
잠시 망설이던 조혜연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요. 전날 오양에서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 주안으로 피신한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저희도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송파의 마인들을 치려는 계획을 포기해야 했기에 속이 상했지만 하수린은 흔쾌히 조혜연의 청을 수락했다.
“물론이에요. 주안이 아니라 세평이지만, 어쨌든 그곳까지 데려다 줄게요.”
조혜연이 고개를 저었다.
“은인들께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다른 곳의 악마들도 처단하러 가신다면서요. 동방대로가 시작되는 곳까지만 악마들의 잔당들로부터 저희를 지켜주시면 돼요. 제가 길을 잘 아니 거기서부터는 저희끼리 찾아갈 수 있어요.”
하수린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좋아요. 그럼 바로 시작하죠.”
조혜연이 동료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이것저것 바쁘게 지시했다. 그녀의 요령 있는 지휘 아래 일사천리로 준비가 이루어졌다. 반 시진에 걸친 분주한 움직임 끝에 마인들의 노리개 노릇을 하던 삼백여 여인들을 태운 마흔일곱 대의 마차가 정문을 빠져나갔다.
이조(二組)로 나뉜 세평회의 사인은 마차들의 전후에서 호위를 담당했다. 그러나 기실 불필요한 수고였다. 동방대로에 이를 때까지 마졸들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 있을지도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여 팽하연 등은 동방대로에 접어든 마차들이 중립지대에 이를 때까지 뒤를 따라갔다. 피난 행렬이 사주강 상류의 대교를 지난 이후에야 세평회의 사인은 마차들과 작별을 고하고 발을 돌렸다. 그들의 새로운 사냥터는 문천에서 이백이십 리가량 떨어진 송파였다.
야공을 채운 새벽어둠이 더욱 짙어졌다.
일출이 머지않았다는 징조였다. 쉴 새 없이 달려온 일행은 소도(小都)가 내려다보이는 야산에서 숨을 골랐다. 흥분으로 인해 자신들의 상태를 자각하지 못했던 고량과 하수린은 휴식을 취하고서야 몸이 천근만근임을 깨달았다. 지친 몸으로는 전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에 두 사람은 한시라도 빨리 송파의 마인들을 말살하고픈 조바심을 다스려야 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두 사람과는 달리 한 치의 호흡도 흐트러지지 않은 팽하연이 아래를 굽어보았다. 그러더니 고량의 숨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물었다.
“송파가 어느 정도 규모의 시진인가요, 금강권?”
“자성이나 문천보다는 작습니다, 검선. 아마 인구가 이만을 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나름 상행의 요충지라 제법 번화한 곳입니다.”
고량의 답변에 팽하연이 하수린에게 눈길을 주었다.
“여기서는 나와 가린이 앞장을 서겠어요.”
하수린은 즉시 이의를 제기했다.
“저와 금강권이 타진을 맡기로 했잖아요, 검선. 두 번 다 제대로 해냈으니 굳이 바꿀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팽하연이 반박했다.
“그건 타진이 아니라 선공이었어요. 슬쩍 건드리고 빠져야 하는데 무작정 공격하지 않았던가요? 문천에서처럼 저곳에 강적들이 있으면 위험할 수 있어요.”
하수린의 눈썹이 갈매기를 그렸다.
“외람되지만 제가 보기엔 기우일 것 같아요, 검선. 방금 고 대협이 말했듯 송파는 문천보다 작은 도시예요. 궁마나 독안거 같은 마두가 똬리를 틀고 있을 리 없어요.”
“…….”
“진 공자는 문천에 장마류의 마인들이 있을 거라고 했어요. 하지만 자성과 마찬가지로 잡마류의 쭉정이들만 있었어요. 송파도 비슷하리라고 봐요. 마련은 경계 지역에는 강자들을 배치하지 않았을 거예요. 정맹이나 사벌과 전쟁을 치르는 건 아니니 굳이 접경선에 본진을 주둔시킬 까닭이 없어서겠죠. 십대마군을 비롯한 그들의 알맹이는 진 공자가 치러 간 송화나 평산 등에 몰려있음에 분명해요.”
하수린의 역설에도 팽하연은 양보하지 않았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요. 돌다리도 두르려보고 건너라고 회주가 당부하지 않았던가요. 나는 우리의 안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던 그의 뜻을 따를 참이에요.”
하수린이 반발하기 전에 고량이 중재에 나섰다.
“이번엔 다 같이 들어가는 게 어떻습니까, 검선. 마인들은 동이 틀 때까지 난장을 벌인다고 들었습니다. 송파의 마인들도 필히 한 곳에 모여 추악한 짓거리들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넷이 동시에 쳐들어가서 일망타진하면 될 듯싶습니다.”
하수린이 고량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면 되겠네요. 어때, 가린?”
느닷없는 질문에 가린이 야수 같은 눈을 소처럼 끔벅거렸다.
“가린은, 괜찮다.”
가린까지 동원한 하수린의 압박에 팽하연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소하다면 사소한 사안을 두고 어린 후배와 자존심 싸움을 벌이기는 민망한 노릇이기에 한 발 물러났다.
“좋아요. 다만 개전의 시작은 내가 알리겠어요.”
그마저도 딴죽을 걸 수는 없었기에 하수린은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그러세요, 검선. 섣불리 달려들지 않고 검선의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릴게요.”
비로소 팽하연의 안색이 누그러졌다.
네 개의 그림자가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담장으로 붙었다. 어둠에 잠긴 거리를 가로질러 송파의 지배방파였던 홍예무관(虹蜺武館)으로 다가간 세평회 인사들이었다.
일 장 높이의 담벼락을 뛰어넘자 줄 지어 선 오색 창연한 전각들이 보였다. 거목 뒤로 몸을 감춘 팽하연이 기감을 끌어올려 주위를 살폈다. 그녀가 엄한 곳에서 시간을 끌자 답답했으나 하수린은 꾹 눌러 참았다. 등에 꽂히는 하수린의 따가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중하게 주변을 탐색한 팽하연이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보이고는 왼쪽의 전각으로 몸을 날렸다. 삼인은 지체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인들이 질탕한 황음(荒淫)을 벌이고 있을 장소로 이동하며 팽하연은 도처의 마졸들을 일일이 제압했다. 무사 급을 겨우 면한 수준이었기에 삼인일조의 마졸들은 그녀가 원거리에서 날린 지풍(指風)을 피하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졌다. 하수린은 그녀의 감각을 기준으로 할 때 한 없이 더딘 진행으로 인해 짜증이 났다. 하지만 대놓고 팽하연을 재촉할 수는 없었기에 잠자코 있어야했다.
하수린의 불만 속에서도 네 사람은 발소리를 죽여 가며 차근차근 소음의 발생지에 이르렀다. 담이 가로막고 있어 안쪽이 보이지 않았으나 밖으로 새어나오는 괴성과 방사를 치르는 듯한 거친 숨소리로 보아 수십의 마인이 들어있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마인들의 수를 헤아릴 요량인지 팽하연은 한참 동안 뜸을 들였다. 인내심이 바닥난 하수린이 전음을 보내려는 찰나 팽하연이 검지와 중지를 차례로 치켜들었다. 그녀의 동작을 본 일행의 낯빛이 변했다.
첫 번째 손가락은 벽 너머에 상당한 기운을 지닌 강자가 있다는 뜻이었고 두 번째 손가락은 일단 물러가자는 의미였다. 팽하연이 불문곡직 퇴각할 기색이자 하수린이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팽하연이 아미를 찌푸렸다. 그녀의 냉엄한 눈을 직시하며 하수린이 눈빛으로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떠날 수는 없어요.’
팽하연이 하수린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일행을 돌아보며 가운데 손가락을 다시 들어보였다. 하수린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지시에 따르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두 여인이 벌이는 실랑이가 언짢은지 가린이 잇몸을 드러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순간 나머지 세 사람 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위화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