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66
제165화
어느새 밝아온 아침햇살을 등지고 한 개의 인영이 날아오고 있었다.
하수린은 그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내용물이 담기지 않은 왼쪽 소매가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련 검마류의 일인자를 상징하는 징표였다. 세상에 외팔이가 아주 드문 건 아니지만 저 정도의 엄청난 경공술을 과시하는 외팔이는 드물고도 드물 터였다. 더욱이 이곳이 마련의 수중에 든 땅임을 감안하면 저 외팔이가 검마가 아닐 가능성은 만분지일도 되지 않을 터였다. 송파는 검마 같은 거물이 출현하기엔 궁벽한 시진이긴 했지만 육지마검이 들어와 있었는데 그라고 오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송파는 규모와 무관하게 상당한 요충지인 모양이었다.
하수린은 멀어져가는 소중걸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달아나요!”
검마와 정면으로 맞서려는 건 자살행위였다. 소중걸은 십초는 고사하고 삼초도 버티기 어려울 터였다. 검마가 도래한 이상 죽음은 예정된 것이나 진배없었다. 소중걸이라도 살아야 했다.
소중걸은 하수린의 바람을 묵살하고 검마에게 내달렸다. 하수린은 그의 무모함에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갸름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일전불사를 외칠 것만 같던 소중걸이 경신을 멈추더니 돌연 포권을 취하며 자세를 낮추었기 때문이었다.
“장마가 검마를 뵙소. 늦었구려. 악적들은 이미 내가 제압해 두었소.”
검마가 소중걸의 십여 보 전면에 착지했다. 고개를 숙인 소중걸을 응시하던 검마가 수십 구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장내를 둘러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다 어찌 된 일이더냐? 화염장이 말하길 네가…….”
검마는 말을 맺지 못했다. 소중걸의 좌수에서 뻗어 나온 강선에 대응해야 해서였다. 언제 뽑아들었는지 검마가 오른손에 쥔 기형검으로 소중걸이 날린 혈뢰창을 쳐냈다. 기습에 실패한 소중걸은 옥쇄를 각오했는지 제자리에 서있었다.
검마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전진하며 소중걸을 압박했다. 소중걸은 검마가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그를 취급하고 있음을 알았다. 굴욕감을 견디며 소중걸은 적이 좀 더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크게 기대하긴 어려웠지만 검마가 방심한다면 동귀어진이 가능할 지도 몰랐다. 소중걸의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마는 느릿느릿 소중걸에게 다가갔다. 식은땀을 흘리던 소중걸이 별안간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제발 나를 살려주시오, 검마. 나에게 손을 대면 장왕이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요.”
간청과 협박을 동시에 내뱉은 소중걸이 어이가 없어 입술을 일그러뜨린 검마에게 장공을 발출했다. 하지만 이번 암수도 수포로 돌아갔다. 호신강기로 만만의 대비를 하고 있던 검마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소중걸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아직 육칠 보가 떨어져있었지만 검첨에서 솟아난 강기는 순식간에 소중걸에게 이르렀다.
캉!
이해난망의 괴음과 함께 검마의 검강이 소중걸의 머리 바로 앞에서 튕겨나갔다. 하마터면 기형검을 놓칠 뻔한 검마는 황급히 애병을 고쳐 잡았다.
“누구냐?”
불필요한 질문이었다. 환영처럼 그의 전면에 나타난 청년을 보자마자 검마는 자답했다.
“하남신룡!”
별호가 혀끝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검마는 그의 최절초인 단천마풍(斷天魔風)을 펼쳤다. 예감이 좋지 않아서였다. 방금 그의 검강에 부딪친 강탄엔 그로서도 무시 못 할 경력이 실려 있었다. 게다가 하남신룡이 현시한 신법은 소름이 끼치도록 초절했다. 강호에 전해진 수준 이상이었다.
검마는 그보다 두 수는 아래로 여겼던 무림의 초신성이 만만치 않은 강적임을 직감했다. 경시하다간 경을 치르게 될 지도 몰랐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올바른 판단이되 정확한 판단은 아니었다. 검이 일으킨 회오리의 폭풍 속에 갇힌 하남신룡이 단천검기를 벗어나 육박해오자 검마는 간담이 서늘했다. 잔귀쌍마라는 피라미들이 길렀다는 애송이는 만만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윗길의 강자였다. 터무니없는 소리였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단천마풍을 거슬러 올라와 단 일합에 그의 팔을 자를 수 있었겠는가.
자신의 오른팔이 어깨에서 떨어져나가는 거짓말 같은 광경에 검마는 넋이 나갔다. 다음 순간 하복부에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단전이 파괴되었음을 깨달은 검마는 의식을 놓아버렸다. 맨 정신으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소중걸이 받은 충격은 검마에 못지않았다.
검마 나오권은 이십 년 가까이 검마류의 일인자로 군림해온 초강자였다. 도마(刀魔) 신구(申究)와 더불어 마련 십대마군 중 으뜸을 다투는 무호(武豪)이기도 했다. 그런 검마가 변변한 대항조차 못해보고 일이 초만에 무너지다니. 눈으로 보면서도 도저히 믿기 어려운 기사(奇事)였다.
소중걸은 자신이 황당한 꿈속에 들어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멍해진 그의 눈에 진천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소중걸은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밤길을 가다가 귀신을 본 자가 보일법한 반응이었다.
걱정이 담긴 진천의 음성이 소중걸의 귀에 와 닿았다.
“머리를 다쳤소?”
소중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머리가 어지럽고 욱신거렸다. 지척에 이르렀던 검마의 강기가 튕겨나가며 남긴 후유증이었다.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었다. 진천의 개입이 촌각의 촌각만 늦었더라도 그의 두개골은 박살이 났을 터였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소중걸은 조금 전 진천에게 구명지은을 입었음을 깨달았다. 감사를 표명하려던 그의 입에서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너는, 어떻게 된 거냐?”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진천은 소중걸이 무엇을 물어보는지 알아차렸다.
“그간 약간의 성취가 있었소.”
소중걸은 헛웃음이 나왔다. ‘약간’이라니! 너무 지나친 겸손이 아닌가.
다섯 달 전 삼보장에서 겨루었을 때도 평수가 아님을 절감했지만 오늘 정도는 아니었다. 진천이 검마를 상대로 현시한 무위는 오직 팔대무왕만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하남 무림이 배출한 천룡이 미래의 천하제일인이 되리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으나 누가 지금 당장 그가 팔대무왕에 견줄 초인이라는 소리를 믿겠는가. 소중걸은 다시 자신이 몽중에 들어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진천은 혼란스러워하는 소중걸에게서 시선을 돌려 장내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삼십여 구의 시체들 속에서 숨을 쉬고 있는 친인들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동떨어져 있는 가린은 꽤나 고전한 모양이었다. 그의 부상 정도는 그가 상위의 고수에게 몰리다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누굴까. 가린의 상대가 검마는 아니었음은 확실했다. 검마였다면 가린은 목이 붙어 있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마인들의 시신들 가운데 육지마검이나 요라검(妖羅劍) 같은 마두가 섞여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진천은 나신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누워 있다가 그를 보고는 양손을 올려 젖가슴을 가리는 팽하연을 통해 여러 가지 사실을 추론했다. 그녀의 의복을 벗겨 치료한 이는 소중걸임에 분명했다. 그만이 운신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소중걸은 세평회의 인사들보다 늦게 이곳에 당도했을 터였다. 그러고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그들을 구했으리라. 마인들의 시신 중 절반가량이 소중걸의 장공이 만든 결과물임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았다.
진천은 머릿속으로 순서를 정리했다.
첫째, 세평회의 친인들은 송파 홍예무관에 당도했다. 그리고 여기서 본전(本殿) 마당으로의 진입을 노리며 은신했다.
둘째, 죄다 알몸인 것으로 보아 본전 마당에서 광란의 난장을 벌이고 있던 마인들 중 누군가, 아마도 육지마검이나 요라검일 터인데, 담벼락 너머에서 아지랑이처럼 올라오는 이질적인 기운을 감지하고는 기습을 가했을 터였다. 그 미지의 인물을 따라 다른 마인들도 넘어왔을 것이었다. 전장이 본전 마당이 아니라 바깥이라는 점이 그 추론을 뒷받침했다.
셋째, 난전은 세평회의 고전으로 치달았을 공산이 컸다. 육지마검 같은 마두 외에도 절정 급의 마인들도 몇 명은 있었을 거라 보아야 했다. 중과부적에 처한 세평회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을 것이었다.
넷째, 세평회 인사들의 생명의 불꽃이 꺼지지 않은 것은 때마침 등장한 소중걸 덕분이었다. 그가 어떻게 검마류가 장악한 이곳에 나타났는지는 차후 알아보아야 하겠지만 세평회의 입장에서는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었다.
다섯째, 소중걸의 가세로 마인들을 소탕했지만 세평회 인사들은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소중걸은 우선 하수린을 돌봐 준 후 그녀를 자하검선 옆으로 옮겼을 것이었다. 그러고는 자하검선의 외상을 치료하던 중 검마의 도래를 인지하고는 그에 맞서기 위해 뛰쳐나왔을 것이었다.
소중걸이 눈 두 번 깜박이는 동안에 상황 판단을 마친 진천이 그에게 포권을 취했다.
“내 친우들을 도와줘서 고맙소. 큰 은혜를 입었소.”
소중걸은 현실로 돌아왔다.
“내가 할 소리다. 네게 빚을 졌다.”
미소를 머금은 진천이 팽하연과 하수린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소중걸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오게 된 거요?”
한 달 전 소중걸이 지하연무장을 떠난 후 진천은 상운의 정보망에 기대 백방으로 그의 행방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소중걸의 소재는 오리무중이었다. 진천은 고지식한 그가 마련으로 돌아갔다가 지하연무장에서의 일로 징벌을 받았을까봐 염려스러웠다. 화염장에게서 소중걸의 반역 행위를 전해 들었을 장왕이 그를 용서했을 리 만무했다.
소중걸이 진천의 질문에 답했다.
“어젯밤 삼보장에 갔더니 태극마선이 너희가 마련을 치러 갔다고 하더군.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행선지까지 알려주면서. 거기서 기다리려다 그냥 마음이 동해 삼보장을 나섰다. 자성으로 가던 도중 소안(小安)인근의 대로에서 소란을 감지하고는 무슨 사달인지 확인하러 잠시 가보았다. 수십 대의 마차에 수백 명의 여인들이 타고 있었는데 그들을 검문하던 고암 설가의 무인들에게 이상한 소리를 하더군. 자기들은 문천의 백성들인데 세평회의 귀인들이 악마들로부터 구해주었다고. 그리고 주안 인근에 건설 중인 도시로 가도록 권고했다고. 이야기 말미에 세평회가 송파로 향했다는 말이 나오더군. 그래서 방향을 틀어 이곳으로 오게 된 거다.”
설명이 끝나자 진천이 소중걸의 우람한 팔뚝을 잡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소중걸은 진천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우리와 함께 하기로 결정했구려. 고맙소, 소 형.”
진천은 진심으로 기뻤다. 소중걸의 참여는 가장 간절히 바라던 일 중 하나였다. 그는 천군만마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절대고수로 성장할 가능성이 농후한 데다 마중협(魔中俠)의 기상을 지닌 소중걸은 그가 떠난 후의 세상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터였다.
소중걸이 진천의 손을 떼어놓았다.
“네 멋대로 단정 짓지 마라. 아직 결정한 건 아니다.”
진천은 실망하지 않았다. 싫든 좋든 오늘의 일로 소중걸은 한 배를 탄 셈이었다. 그가 몸담을 곳은 이제 세평회밖에 없었다.
“미안하오. 반가운 나머지 성급한 발언을 했구려.”
진천의 사과에 소중걸이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더라도 당분간 삼보장에 머물렀으면 하는데.”
진천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소 형이라면 언제든 대환영이오. 같이 수련도 하고 얘기도 나눕시다.”
소중걸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걸렸다. 그의 다부진 어깨를 친근하게 두드린 진천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