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7
제16화
중년인이 노덕의 코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는 이죽거렸다.
“말해 보쇼. 사천 리를 멀다 않고 찾아간 옥잠(玉簪) 장사치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박대하던 중원의 거상(巨商)께서 이 궁벽한 곳까지 뭐 먹을 게 있다고 기어든 거요? 설마 이제라도 나하고 동업을 하고 싶어서 온 건 아닐 테지?”
노덕은 중년인을 피해 천장으로 시선을 올렸다.
중년인은 집요했다.
“뭐야, 이 꼴이 되고도 나를 무시하는 거요? 아니면 못 본 새 벙어리라도 된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좀 전에 보니 저 아이에게 무어라 열심히 주절거리고 있던데.”
중년인이 진천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잘난 척하는 습성은 여전하군. 아랫것들하고도 격의 없이 지내는 소탈한 성품임을 자랑하던 시절은 이미 끝나지 않았소? 종놈하고 겸상한들 이제 누가 알아준다고? 아니, 자기가 저들과 같은 신분으로 전락했음을 인정하는 건가? 그런 거라면 뭐, 나름 기특한 처신이군. 하지만 여기는 종들이 들어올 수 없는 곳임을…….”
중년인이 진천을 들먹이며 ‘종’ 운운하자 노덕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는 내 종이 아닐세. 그리고 그만하고 가 줬으면 좋겠군.”
중년인은 노덕의 요구를 비웃음으로 묵살했다.
“흐흐, 처지가 바뀌었음을 잊었군, 늙은이. 오고 가고는 내 맘이야. 그리고 나는 늙은이를 쫓아낼 수도 있지. 그러니 알량한 작설탕이라도 처먹으려면 알아서 수그리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
중년인의 말투가 거칠어지자 진천이 나섰다.
“대인의 말씀 못 들었소? 그쯤하고 가는 게 어떻소?”
중년인이 발끈했다.
“이런 거지발싸개 같은 놈이 어디서 감히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
중년인은 험악한 언사를 마저 내뱉지 못했다. 진천의 감춰진 무력을 간파해서가 아니라 계단에 모습을 드러낸 대머리 무사가 던진 질문 때문이었다.
“조금 전 누가 떠들었나?”
의자에서 바늘이 돋은 듯 중년인이 발딱 일어섰다.
“저, 접니다.”
대머리 무사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자 중년인이 어깨를 움츠렸다.
“따라와라.”
중년인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대머리 무사가 등을 돌려서는 계단을 올라갔다. 의기양양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어진 중년인이 부리나케 계단으로 달려갔다. 대머리 무사의 출현에 똥 마려운 강아지인 양 쩔쩔매던 중년인의 동료들이 허둥지둥 그를 따랐다.
한순간에 중년인 일행이 사라지자 노덕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참으로 부끄럽구먼.”
봉변을 당한 노덕을 위로하고 싶었으나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진천은 난감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몇 년 전 주안 일대 기루의 여인들에게 비녀를 독점으로 공급하고 싶다며 삼보장을 찾은 자인 것 같네. 그 시장을 선점한 상인들의 견제를 무마하고 유통망을 주선해 주는 대가로 나에겐 상당한 보상을 약속했지만 상품의 가치에 비해 지나친 폭리를 취하려 들었기에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던 듯싶네. 흔하다면 흔한 일이었지만 저리도 앙심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네. 다 내 부덕의 소치일세.”
“대인이 그를 멀리하셨다면 그만한 까닭이 있었겠지요. 언행으로 보건대 방금 그 사람은 어울려서 득 될 게 없는 부류인 듯합니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착잡한 기색이 풀리지 않는 노덕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진천이 짐짓 밝게 웃었다.
“다시 오늘의 특별한 식사를 즐기지요. 어서 드십시오. 그리고 팔정파에서 나왔다는 신룡에 대해서 마저 들려주시지요.”
고소를 지은 노덕이 진천의 청에 응하기 위해 건조한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 겨를도 없이 계단에서 일군의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왔다. 조금 전 올라갔던 중년인 패거리와 대머리 무사였다.
“저자입니다.”
중년인이 검지를 들어 노덕을 가리켰다.
노덕을 쏘아보며 대머리 무사가 물었다.
“네가 주안 삼보장의 주인인가?”
“그렇소만.”
눈살을 찌푸린 대머리 무사가 아까 중년인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따라와라.”
엉거주춤 일어선 노덕이 벌써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고 있는 대머리 무사에게 말했다.
“당신은 누구며 왜 나를 오라는 건지 알 수 있겠소?”
대머리 무사가 발걸음을 멈췄다. 중년인은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노발대발했다.
“어느 안전이라고 저 늙은이가 토를 달아. 당장 따르지 않고 뭘 꾸물…….”
“비켜라.”
“헛, 네.”
대머리 무사가 중년인을 밀치고 노덕에게 다가갔다. 진천이 일어섰지만 대머리 무사는 그에게 일별도 주지 않았다.
“너를 보자는 분이 계시다. 네 발로 따라올 텐가 아니면 끌려갈 텐가.”
노덕이 답을 줄 새도 없이 대머리 무사가 불문곡직 팔을 뻗었다. 그러나 그는 애초의 의도대로 노덕의 목을 움켜잡지 못했다. 진천이 그의 손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이유도 밝히지 않고 강압적으로 데려가려 하다니, 너무 무례하지 않소?”
대머리 무사는 답변을 하는 대신 신음성과 식은땀을 흘렸다. 손을 잡혔을 뿐인데 전신을 밧줄로 묶인 듯 옴짝달싹할 수 없자 그제야 목전의 청년이 범상치 않은 고수임을 알아차린 대머리 무사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러나 든든한 뒷배를 떠올리고는 기가 살아났다.
“나는 팔정파 소주(小主)의 친위대다.”
그 말 한마디면 충분할 터였다. 하지만 대머리 무사의 예상과 달리 청년은 주눅이 든 기색이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항의성 질문을 쏟아냈다.
“당신의 소주란 자가 이런 식으로 대인을 모셔 오라고 시켰소?”
일순 객잔 안에 정적이 깔렸다. 대머리 무사도 당황스러웠는지 부엉이처럼 부리부리한 눈을 소처럼 끔벅거렸다.
그때 노덕에게 시비를 걸었던 중년인이 별안간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주안 삼보장주의 호위무사가 행패를 부리고 있소. 어서 와서 도와…….”
대머리 무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닥쳐.”
중년인은 즉각 대머리 무사의 명에 순종했지만 이미 그의 외침이 정월 초하루에 쏘아 올린 폭죽처럼 위로 솟구친 다음이었다. 잠시 후 계단에서 삼 인이 달려 내려왔다.
왼 가슴에 똑같은 문형이 수놓인 황색 무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대머리 무사의 동료임에 분명한 세 명의 무사는 상황 파악을 위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친위대에서 성질머리 사납기로 둘째가라면 길길이 날뛸 구차만(具次萬)이 새파랗게 어린놈과 손을 맞잡고 뻣뻣하게 서 있는 꼴이라니. 소꿉장난이라도 하려는 건가.
대머리 구차만의 손을 잡고 있던 청년은 새롭게 등장한 무사들이 아니라 방금 전 고함을 지른 중년인에게 시선을 박았다.
“아까는 종이라더니 이번엔 호위무사요?”
중년인은 진천의 눈길을 받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당신이 노 대인과 나에게 행한 결례에 대해 사과를 하는 게 옳을 것 같소만, 어떻소?”
진천의 요구에 중년인이 버텼다. 고개를 다시 쳐들더니 중년인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나는 팔정파를 적대시하는 자에게 굴복하지 않겠다.”
진천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날렸고 무사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오른쪽 눈썹 바로 위에 초승달 모양의 흉터를 새긴 무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머리 동료에게 물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구차만?”
보면 모르냐, 인마. 이 새끼한테 잡혀 있잖아.
욕지기가 치밀었지만 구차만은 참았다. 적은 아주 가깝고 같은 편은 조금 멀었다.
“이들에게 소주의 초청에 대해 알리던 중이다, 박추(朴秋).”
박추를 비롯한 세 친위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공유했다.
저 평소 성난 멧돼지 같은 놈이 무슨 개수작이지? 성질 급하기로 친위대 내에서 구차만과 일이 등을 다투는 목지석이 나섰다.
“소주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구차만. 지금 네가 이러고 논다는 것을 아시면…….”
목지석이 말끝을 흐렸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여운을 주는 게 더 효과적인 협박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알아, 인마. 하지만 나더러 어떡하라고. 손을 빼려 들었다간 목이 꺾일 것 같은데.
대머리 구차만의 하소연은 목구멍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명색이 팔정파는 물론이고 하남 무림 전체의 미래로 불리는 소주의 친위대인데 수십 쌍의 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가리의 피도 덜 마른 어린놈에게 제압당했다는 자백을 할 수는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구차만의 곤경이 느닷없이 끝났다. 진천이 손을 놓아준 것이었다. 구차만은 일순간 기습을 가할까 하다가 자신의 생존을 최우선시해야 한다는 본능에 따라 황급히 동료들 쪽으로 몸을 날렸다.
청년과 손을 잡고 있던 구차만이 갑자기 자신들에게 달려오자 박추 등은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무슨 개지랄이야, 구차만?”
성질 급한 목지석이 호통쳤다.
안전하게 동료들 곁에 도달한 구차만이 받아쳤다.
“시끄러, 인마. 입 닥치고 소주의 명을 어기려 드는 저 작자나 처단해.”
진천을 향해 검지를 뻗은 구차만이 발악하듯 고성을 내질렀다. 황당하다는 눈빛을 교환하던 박추 등은 퍼뜩 구차만의 이상 행동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목전의 청년은 강적이다!
이해와 동시에 그들의 기세가 삼엄해지고 때아닌 긴장감이 소미관 안을 조여들었다.
사 인의 친위대가 공격을 개시하기 직전, 위에서 그들의 손발을 묶는 음성 하나가 떨어졌다.
“가만히 있어들.”
음성에 이어 다섯 사람이 미끄러지듯 유려한 동작을 선보이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들의 선두에 선 이는 묘령의 여인이었다. 여인이 일 층에 내려선 순간 객잔 안의 모든 손님이 황급히 일어나 바닥에 부복했다. 대머리 구차만과 흉터 박추 등은 재빨리 여인의 뒤로 돌아가 다른 친위대와 합류했다.
진천은 멀뚱멀뚱 여인을 바라보았다.
이제 스물이나 되었을까. 전형적인 남방 미인이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까무잡잡한 피부. 동그란 얼굴. 아담한 체구. 고양이처럼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와 매처럼 날카로운 눈빛이 유순함과는 거리가 먼 성격임을 알려 주었다.
양손을 허리에 괸 여인이 진천을 쏘아보았다. 진천은 담담한 눈으로 그녀의 매서운 안광을 받아 내었다.
“넌, 누구냐?”
여인이 물었다.
“나는 진천이라 하오만. 소저는 뉘시오?”
진천의 대답과 질문에 객잔 안에 소리 없는 소요가 일었다. 세상에 하남편봉(河南鞭鳳) 하수린(河秀麟)을 모르는 자가 있다니.
당사자인 하수린의 심정도 중인과 같았다.
“나를 몰라?”
진천이 반문했다.
“오늘 처음 보았는데 어찌 알겠소?”
하수린의 가늘고 긴 눈썹이 갈매기 모양을 만들었다. 그러자 희한하게도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 표정이 되었다.
진천이 몇 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들어는 본 것 같소. 혹시 소저가 근래 팔정파가 배출했다는 신성(新星)이오? 여인일 줄은 미처 몰랐소.”
“왜? 여자라서 불만이야?”
“그건 아니오. 그냥 무심코 사내일 거라 생각했을 뿐이오.”
“헛소리하지 마. 내 소문을 들었다면 별호에서부터 여자라는 게 드러날 텐데.”
“나는 소저의 별호를 모르오.”
“나랑 지금 말장난하자는 거야? 팔정파의 신성에 관해 들었다면서 그 주인공이 하남편봉으로 불린다는 걸 못 들었다고?”
조용히 있던 노덕이 끼어들었다.
“사정이 있었다오. 이 사람은 벽지에서 수련하다 막 강호에 나온 참이라 무림의 정보에 밝지 못하오. 오늘 마침 여기에 와서 식사를 하며 하 소저에 대해 알려 주려던 참이었는데 도중에 방해를 받는 바람에…….”
하수린이 노덕의 말을 끊었다.
“네가 주안의 그 추물(醜物)이야?”
그녀가 쓴 ‘추물’이라는 단어에 축 처진 진천의 눈꼬리가 휙 치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