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70
제169화
해가 졌다.
진천은 운공을 마친 친인들에게 그가 송파에 간 경위를 간략히 설명했다.
평산에 주둔한 도마류의 본진을 목표로 날아가던 진천은 강수와 무양을 지나다 발길을 돌렸다. 두 도시에 똬리를 튼 마인들의 전력과 구성원들은 북운상단의 오재승이 전해준 정보와는 상이했다.
진천은 자성도 하루 사이에 마인들의 변동이 있지 않았을지 염려스러웠다. 만약 전날 수박 겉 핥기 식으로 탐색했을 때와는 달리 초절정 급의 마두들이 들어와 있다면 세평회의 동료들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자성에서 일천리나 떨어져 있었기에 이미 상황이 끝난 다음이겠지만 그래도 가보기로 했다. 친인들에겐 밝히지 않았으나 진천은 하수린이 자성의 마인들로 성이 차지 않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녀가 자성 인근의 문천이나 오류진(五柳津) 혹은 진구(珍邱)를 치자고 나서면 팽하연이나 고량이 만류하기는 싶지 않을 터였다.
쉼 없이 달려 새벽녘에 자성에 당도한 진천은 조가장(曹家莊)에 남은 흔적을 보고 세평회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을 알았다. 마인들의 시체를 살핀 진천은 하수린만이 아니라 팽하연과 고량도 크게 흥분한 상태였음을 깨달았다. 가린이 무자비한 학살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점은 고무적이었다.
진천은 조가장에서의 임무를 완수한 세평회의 친인들이 어디로 갔을지 면밀히 조사했다. 우려했던 대로 그들의 발자취는 동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이어져있었다. 삼보장으로 귀환하지 않고 문천이나 신은(新垠)으로 갔다는 뜻이었다.
친인들의 족적을 따라간 진천은 문천에 이르렀다.
그곳의 현장은 자성의 조가장과는 사뭇 달랐다. 진천은 처처에 쌓인 마인들의 시체 가운데 두 개를 주목했다. 하나는 머리통이 박살난 시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삐쩍 마른 노인의 시신이었다.
진천이 주목한 것은 두 마인의 몸뚱이가 아니라 그들이 손에 쥔 무기였다. 전자는 길이는 짧고 폭은 넓은 정방형의 톱을 들고 있었고 후자는 아이들 장난감처럼 앙증맞은 활을 움켜잡고 있었다.
진천은 톱의 주인이 독안거 유창일 거라 추정했다. 유창은 마련의 외마 중에서는 최상위권의 강자였다. 한 눈에 봐도 그의 머리를 부순 것은 고량의 주먹이었다. 고량이 그보다 약간이라도 윗길이었을 유창을 그런 식으로 깨뜨릴 수 있었던 건 팽하연이나 가린의 도움 덕분이었을 터였다.
해골노인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잡마류 최강의 마인으로 평가받는 궁마 서장강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의 심장을 터뜨린 흉기는 하수린의 소수였을 터였다. 하수린은 팽하연과 가린의 지원 하에 초절정의 강자인 서장강을 절명시켰을 것이었다.
진천은 새삼스레 팽하연의 합류에 감사했다. 그녀는 의형인 여상구만큼이나 믿음직스러운 우군이었다.
세평회의 피해가 없는 듯하자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인 진천은 격전지 외부를 훑어보고는 특이사항을 발견했다.
사방에 가득한 여러 단서를 종합한 진천은 세평회의 친인들이 오양의 행사를 되풀이했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은 이곳에 있던 여인들을 도피시킨 것이었다. 길에 어지러이 깔린 바퀴자국들은 오양보다 구출의 규모가 훨씬 컸음을 방증했다. 진천은 적어도 삼십 대 이상의 마차들이 표국을 빠져나갔으리라고 보았다.
마차가 남긴 궤도를 따라간 진천은 완전히 안도했다. 돌바닥을 벗어나 흙길에 접어들자 가린의 것이 분명한 족적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찍혀있었다. 길이가 한 자가 넘는 거족을 가진 이가 가린 말고도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그이가 맨발로 다닐 가능성은 전무에 가까웠다.
세평회가 마차들을 호위하며 주안으로 향했으리라 여긴 진천은 느긋하게 그들의 뒤를 쫓았다. 그러다 중립지대에 들어서며 경신을 멈추었다. 이제는 정맹의 영토가 된 일영(日映)까지 이어지는 동방대로에 접어들자 가린의 발자국이 마차에서 떨어져 서북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었다.
얼마간 가린의 발자국을 되짚어가던 진천은 세평회의 다음 목적지가 송파임을 알아냈다. 불길한 예감이 든 진천은 전속력으로 경공을 전개했다. 그러고는 그로부터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문천에서 이백여 리 떨어진 송파에 당도했다.
진천의 설명이 끝나자 모두들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늘 두 번이나 죽음을 코앞에 두고 기적을 경험했어요. 하늘이 우리를 돌보신 모양이네요.”
팽하연의 감상에 중인은 너나 할 것 없이 동감을 표했다.
하수린은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저 때문에 다들 변을 당할 뻔했어요. 다시는 경솔하게 굴지 않을 게요.”
팽하연이 부드러운 말로 하수린을 달랬다.
“경솔한 처신이 아니라 과감한 결단이었어요, 편봉. 설령 우리에게 불상사가 생겼다 해도 누구도 편봉을 탓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검선. 하지만 앞으로는 검선을 비롯한 다른 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할 거예요. 혹시라도 제가 말썽을 일으킬 것 같으면 따끔하게 지적해주세요.”
팽하연의 입술에 온화한 미소가 걸렸다.
“나도 잘 부탁해요, 편봉. 결전에 임박해 내가 심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가차 없이 채찍으로 내리쳐줘요.”
하수린이 작고 도톰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검선이 그러실 리가 없잖아요. 누구보다 용감하면서.”
갑자기 가린이 맹수의 발톱처럼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검지를 팽하연의 가슴으로 뻗으며 말했다.
“가린은, 고맙다.”
육지마검의 검강에 비명횡사 당하기 직전 그를 구해준 팽하연에게 주는 감사의 인사였다. 팽하연이 답례의 언사를 꺼내놓기 전에 하수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린 뿐만이 아니에요. 나와 고 대협도 검선 덕분에 횡액을 면할 수 있었어요. 위기에 처한 동지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느라 자신의 안위도 돌보지 않고 검을 돌린 검선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장마나 진 공자가 도착하기도 전에 염왕전으로 떠났을 거예요. 검선은 우리 모두의 은인이에요.”
중인이 던지는 찬사의 눈길에 팽하연의 사랑고백을 받은 열다섯 소녀처럼 발그레해졌다.
“과분한 말이군요. 나는 오늘 극악무도한 마인들을 처단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어서 기쁘기도 하지만 세평회의 벗들과 하나가 된 듯해 뿌듯하기 이를 데 없어요. 참으로 고마운 일이에요.”
친인들 사이에 오가는 따뜻한 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진천은 흐뭇할 따름이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번 출정은 대성공이었다.
친인들을 태운 대문짝을 짊어진 진천은 파주산의 골짜기를 빠져나와 동남 방면으로 달렸다.
그새 다리가 아문 가린은 혼자 갈 수 있다고 우겼지만 달리기는 무리였기에 결국 진천의 신세를 져야만 했다. 진천은 육지마검과의 격전에서 내상을 입은 소중걸도 문짝 위에 싣고 싶었지만 그는 끝끝내 탑승을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진천은 그의 속도에 맞춰 경신을 펼쳐야 했다.
진천은 길도 없고 인적도 없는 산야를 골라 이동했다. 그가 단지 북운상단주 오재승에게서 얻은 지도를 보고서 지리를 익혔음을 알기에 마치 익숙한 동네를 지나듯 거침없이 나아가는 그의 자신감 있는 움직임에 일행 모두 혀를 내둘렀다. 쉬운 듯 보이지만 아무나 흉내 내기 어려운 재주이자 능력이었다.
소중걸의 경신속도에 맞춰야 했기에 진천 일행은 다음 날 동 틀 무렵에야 주안에 이르렀다. 진천은 저자를 관통하지 않고 주안 외곽으로 크게 우회했다. 그가 삼나무 숲을 넘어 삼보장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날이 환하게 밝아있었다.
진천이 도착을 알리기도 전에 청와옥에서 여상구와 대웅이 달려왔고 곧바로 차소영도 백와옥을 뛰쳐나왔다. 삼보장에 남았던 그들은 예정보다 늦은 친인들의 귀환에 간을 졸이고 있었을 터였다. 문짝에 올라탄 팽하연 등을 본 여상구와 차소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우님?”
진천이 의형의 질문에 답하려는 찰나 죽림에서 권왕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왔으면 냉큼 오지 않고 뭐하는 게냐?”
쓴웃음을 지은 진천이 조심스럽게 문짝을 내려놓으며 여상구에게 말했다.
“경과는 우선 검선께 들으십시오, 형님.”
진천이 죽림으로 몸을 날리려는데 지하연무장에서 명이 올라왔다. 바깥의 소란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어제 온다더니 왜 이제 왔어? 근데 왜 그 모양들이야? 너도 다쳤어?”
진천은 난감했다. 명은 어린아이처럼 참을성이 부족했다. 그녀에게 즉답을 주지 않으면 짜증을 낼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권왕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기에 진천은 양수겸장의 꾀를 냈다.
“나를 따라오오, 명. 큰 형님께 알려드려야 하니 같이 듣구려.”
다행히도 명은 떼를 쓰지 않고 진천 옆에 붙었다. 그녀와 나란히 몸을 날리는 진천의 등 뒤로 여상구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아우님을 보러 온 자가 있네. 이따가 청와옥으로 오게나.”
누군지 물어볼 겨를이 없었기에 진천은 나중에 확인하기로 했다.
권왕과 명에게 ‘보고’를 마친 진천은 죽림을 나왔다.
명을 지하연무장으로 돌려보낸 진천은 걸음을 재촉했다. 죽림에 있을 때 하수린의 것으로 짐작되는 격앙된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의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수린이 충돌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있다면 그를 찾아왔다는 외부인뿐이었다. 누구이기에 운공에 들어야 할 하수린이 분노의 일성을 내질렀던 걸까.
청와옥으로 들어선 진천은 다연실로 걸어갔다. 원형 탁자에 일녀사남이 둘러앉아 있었다. 하수린과 소중걸, 여상구와 대웅, 그리고 칠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초면의 노인이었다. 염소수염 말고는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 얼굴의 노인은 진천을 보더니 엉거주춤 일어섰다. 진천은 그의 등 뒤로 삐죽 튀어나온 새까만 창두(槍頭)를 보고는 정체를 알아차렸다.
“적송림(赤松林) 남파(南派)의 동 모가 하남신룡을 뵙소.”
짐작대로 노인은 흑창 동이승이었다.
진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벌의 고수가 일면식도 없을뿐더러 아무 연관이 없는 나를 왜 찾아왔을까. 그가 삼보장에 볼 일이 있다면 그 대상은 내가 아니라 하수린이어야 하지 않는가.
동이승은 이 년 전 하수린에게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라는 명성을 안겨준 장본인이었다.
포성 무림대회에서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이며 강호를 충격에 빠뜨렸으나 당시만 해도 변방 무림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그녀를 평가절하 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 걸출한 신성임을 인정하면서도 정파의 오대세가나 사파칠문이 키우는 최정예들에 견줄 정도는 아니라는 게 그녀를 깎아내리는 무리의 주장이었다. 하수린은 무림대회가 끝난 후 백일도 되기 전에 그들의 주장이 아무런 근거가 없는 개소리임을 입증했다.
하수린은 그녀의 무력을 시험하겠다며 팔정포까지 찾아간 동이승을 맞아 이백여 초 만에 청사편으로 그의 창을 빼앗는 기염을 토했다. 그 일전으로 그녀는 대륙 전역을 아우르는 위명을 얻었다. 아무도 더 이상 그녀를 정사 무림 명가의 후예들과 비교하며 폄하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물리친 동이승이 정맹의 용호에 비견되는 사벌의 사령(邪令)이기 때문이었다. 정사마(正邪魔)를 통틀어 나이 스물에 용호나 사령, 혹은 백마(百魔)가 된 이는 전무했다. 남북도왕(南北刀王)과 마왕조차도 세우지 못한 기록이었다.
어쩌면 은인이라 해도 무방할 동이승에게 쌍심지를 켜고서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는 하수린을 흘긋 바라본 진천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사태가 발생했음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