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71
제170화
진천이 동이승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세평회의 진천입니다. 앉으시지요.”
동이승에게 예를 차리는 진천이 못마땅한지 하수린이 갈매기 눈썹을 만들었다.
“저를 찾아왔다고 들었습니다만.”
진천이 그를 따라 착석하는 동이승에게 물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하수린이 쏘아붙였다.
“저 자는 사벌이 내 일족을 잡아가두었다는 말을 전하러 온 거예요. 당신이 그 개자식과의 비무에 응하지 않으면 다 죽인대요. 천하의 쓰레기들 같으니. 뒷골목의 흑도들이나 쓰는 비열한 수작을 부리다니.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 내 일족의 털 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사벌을 세상에서 지워버릴 테다.”
하수린의 음성에 시퍼렇게 날이 섰다. 제 목소리에 베인 듯 그녀의 복부와 옆구리가 벌겋게 물들었다. 분노의 표출로 인해 상처가 터진 것이었다.
진천은 대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다연실에 들어서며 흥분하는 하수린과 죄 지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동이승을 보았을 때부터 짐작했던 바였다.
내용은 싱거우리만치 간단했다. 사월의 패퇴를 설욕하기를 바라는 곽건이 혹시 진천이 재대결을 거절할까 봐 하남 무림을 떠나 주안으로 오고 있던 팔정파의 무인들을 인질로 삼은 것이었다. 동이승은 곽건의 사자로 삼보장을 찾았을 터였다.
“진정하오, 하 소저. 일단 얘기를 들어봅시다.”
“들어보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그 뱀눈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당신과 싸우겠다는 거예요. 객기를 부리는 건 좋은데 왜 애꿎은 내 일족을……, 누구라도 다치면 절대로 가만 두지 않을 테다, 개자식.”
진천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하수린을 다독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구려. 하 소저의 친족들은 무사할 거요. 그보다 하 소저는 들어가서 운공에 드는 게 어떻소? 이 일은 내가 잘 처리하리다.”
하수린은 진천의 권고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싫어요. 내 일족이 잡혀있는데 나더러 한가롭게 운공이나 하고 있으라고요? 끝까지 지켜볼 거예요.”
여상구가 하수린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러면 아우님에게 맡기고 얌전히 있는 게 어떤가? 자꾸 방해하면…….”
하수린이 여상구의 말을 끊었다.
“방해라뇨? 이건 내 일이에요. 태극마선이야말로 끼어들지 말고 검선에게나 가보는 게 어때요?”
여상구의 이마에 굵직한 가로주름이 생겼다.
진천은 의형이 분기를 터뜨리기 전에 상황을 수습했다.
“저분과 따로 대화를 나누고 싶으니 다들 제게 시간을 주시길 바랍니다.”
무서운 눈으로 하수린을 노려본 여상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우님의 분부에 따르겠네.”
대웅과 소중걸도 일어섰다. 하지만 하수린은 여상구의 살벌한 시선을 외면한 채 기립하지 않고 버텼다. 여상구가 호통을 치려는 찰나 하수린이 선수를 쳤다.
“입 다물고 조용히 있을 게요.”
진천은 고개를 저었다.
“부탁하오, 하 소저. 결론이 나는 대로 바로 알려주겠소.”
하수린은 마지못해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세 사람이 다연실을 나가자 동이승이 염소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진천은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여유를 가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독대의 긴장감을 완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동작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듣고 싶습니다.”
“나흘 전 벌주께서 나를 부르셨소.”
진천이 처진 눈을 치떴다. 곽건이 아니라 남천도왕이 주도한 일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훨씬 중대한 사안이었다.
진천을 흘긋 바라본 동이승이 말을 이었다.
“나더러 삼보장에 가서 귀공을 뵙고 다음의 내용을 전하라 명하셨소. 귀공은 오는 십일월 초하루 오시(午時)에 양자호의 쌍룡암(雙龍巖)으로 나와 벌주의 후계자인 몰살도(沒殺刀)와 일전을 치러야 하오. 불응 시에는 무단으로 사벌의 영토에 들어왔던 팔정파의 팔십 인 전원을 참살할 것임을 주지시키라 하셨소. 벌주께서 친히 나오실 터이니 귀공 측에서도 한 명의 참관인을 대동할 수 있다고 하셨소. 이게 전부외다.”
진천은 생각에 잠겼다. 북천도왕과 곽건의 저의가 무엇일까. 그들이 비무를 청했다는 것은 승산이 충분하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리라.
사월에 곽건과 치렀던 혈전에서 진천은 그의 무위가 자신보다 반의반 뼘이나마 우위에 있음을 알았다. 그날의 승리는 곽건의 승부수를 읽고 역이용한 변칙수법에 힘입은 바가 컸다. 승패가 뒤바뀌었다고 해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절멸참에 중상을 입고 수하에게 안겨 도주하며 곽건이 복수를 다짐했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실제로 곽건은 그로부터 반 년 후 수호보에서 엄청난 무위를 과시하며 이전의 그가 아님을 알렸다. 그날 그의 칼에 목이 날아간 묵검 장량은 초절정의 중(中)으로 평가받는 검호였고 수호칠걸 중 좌장이었던 십인장 조기 또한 초절정의 초입에 들어선 강자였다. 곽건은 그런 강호들이 포함된 수호보를 홀로 몰살시키는 무시무시한 위용을 뿜어냈다.
진천은 곽건이 수호보에서 현시한 무력이 그가 오월에 소중걸을 상대했을 때보다 강할 거라 측정했다. 아마도 구월 구일 강민과 겨루었을 때의 수준과 비슷할 터였다. 곽건은 관전자들 중에 섞여있었을 사벌의 간자에게 얻은 정보를 통해 그날의 비무를 면밀하게 검토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판단했으리라.
진천은 쓴웃음이 났다. 곽건은 강민과의 공개비무 이후 그가 두 번이나 급격한 도약을 이루었음은 꿈에서도 모를 터였다. 외조부와의 극한수련에서 얻은 무학의 상승까지 합하면 세 번이었다. 만약 곽건이 수호보에서 보인 무력에서 크게 진일보하지 않았다면 승부는 해보나마나였다. 불과 이십여 일만에 그가 그런 성취를 이루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진천이 침묵하자 동이승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본의 아니게 벌주의 명을 전하게 되었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부끄럽고 황망하기 그지없소. 하남편봉의 말마따나 팔정파의 사람들을 잡아둔 건 심히 치졸한 짓이오. 하남편봉과 팔정파에는 미안할 따름이오. 내가 그녀와 인연이 있어 벌주께서 나를 심부름꾼으로 삼으셨을 테지만 오는 내내 괴로웠소.”
진천은 동이승의 참담한 심정을 헤아렸다. 동이승은 사파 출신이나 공명정대한 인품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오재승이 건네준 강호인명록에서 진천이 호감을 느낀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하남 무림의 어린 봉황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도리어 끔찍한 소식을 물고 온 악당이 되고 말았구려.”
진천이 동이승을 위로했다.
“그녀도 마음이 가라앉으면 어르신의 입장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진천의 깍듯한 말투에 동이승이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허어, 말씀을 놓으시구려. 어르신이라니, 이 늙은이 받들기 어렵소.”
진천은 쓰게 웃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소?”
“무엇인지요?”
“방금 전에 여기 있었던 그 청년, 벌주의 장손 말고 다른 청년 말이오만, 혹시 장마가 아닌지요?”
“그렇습니다.”
“아아, 역시. 그도 세평회의 일원인 모양이구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렇게 될 듯싶습니다.”
진천은 동이승의 동공에 일렁이는 열망을 보며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알았다.
“나도 세평회에 들 수 없겠소? 문지기라도 시켜준다면 성심껏 수행하리다.”
“모두의 동의를 얻어야 하지만 어르신께서 그 동안 강호에서 쌓은 덕업을 보건대 무난히 통과하실 듯싶습니다.”
진천의 즉답에 동이승이 감읍했다. 눈물을 글썽이는 그를 보며 진천이 말을 이었다.
“원하신다면 오늘부터 이곳에 머무르셔도 좋습니다. 친족의 무사함을 확인하면 하 소저의 기분도 풀릴 것입니다.”
동이승이 고개를 저었다.
“고마운 말씀이나 나는 서둘러 가보아야 하오. 실은 좀 전에 빼먹은 내용이 있소. 내가 이틀 후 미시까지 돌아가서 보고하지 않으면 벌주는 귀측에서 나를 처치한 것으로 간주하고 팔정파 사람들을 처형하겠다고 하셨소. 그젯밤 이곳에 온 후 귀공의 부재를 듣고는 조마조마했다오. 자칫 귀공과의 만남이 늦어지면 엄한 이들이 목숨을 잃을 판이었기 때문이오. 이렇게 뵈어서 천만다행이오.”
“알겠습니다. 가셔서 제가 비무에 응하기로 했다고 전해 주십시오. 대신 팔정파 분들은 비무 하루 전인 시월 말일 정오에 인계해주어야 한다고 알려주십시오. 장소는 양자호에 면한 임계(稔溪)가 좋겠습니다. 그 조건을 수락하지 않으면 비무도 없는 걸로 한다더라고 전하십시오.”
“그러겠소. 갈 길이 머니 지금 가 보리다.”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동이승이 물었다.
“일이 끝난 후 다시 이리로 돌아와도 되겠소?”
“기다리겠습니다.”
동이승의 눈빛이 기쁨으로 반짝였다.
진천은 동이승을 삼보장 정문까지 배웅했다. 떠나기 직전 동이승이 말했다.
“귀공의 승리를 기원하겠소. 벌주의 후계자는 주군으로 모시기엔 지나치게 잔혹한 인물이오.”
하수린의 방에 들러 결과를 알려 준 진천은 자신의 거처로 갔다.
만 하루 동안 적지에서 수천 리를 오간 탓에 적잖이 피곤했다. 진천은 잠시 휴식을 취하며 목전에 닥친 곽건과의 대결에 관해 생각을 정리할 참이었다. 하지만 그가 침상에 몸을 눕히자마자 대웅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쩌기로 했냐? 건이 놈하고 싸울 거지, 천?”
침대에서 일어나 탁자로 걸어가며 진천이 반문했다.
“노 소저가 보이지 않던데 무슨 일이 있었나, 대웅?”
대웅이 해골면상을 일그러뜨렸다.
“노 소저는 어제 세평으로 갔다. 아이들을 돌보며 밥도 짓고 빨래도 하겠다며. 나는 그녀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다. 건이 놈하고 붙을 거지, 천? 어서 말해 봐.”
대웅의 재촉에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웅. 인질을 돌려받은 후 비무에 응하겠다고 했다.”
대웅은 진천을 따라 의자에 착석하지 않고 그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진천의 어깨에 양손을 얹었다.
“그 자식을 뭉갤 거지?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박살 낼 거지?”
“…….”
대웅이 진천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너를 안다, 천. 그 자식에게 져 줄 생각이지?”
진천은 뜨끔했다. 만약 곽건이 원하는 바가 단지 지난번의 패배를 설욕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양보해줄 의향이 있었다. 천하제일후기지수의 명예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련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사벌과 척을 지지 말아야 했다. 남천도왕을 자극해서 득이 될 게 없었다.
“어쩌면 대결 자체가 무산될 지도 모른다, 대웅.”
진천의 동문서답에 대웅이 범인의 두 배는 됨직한 커다란 눈을 찌푸렸다. 그의 조부나 동생의 뱀눈과는 전혀 다른 대웅의 왕방울 눈에 진천은 그가 정말로 남천도왕의 핏줄을 이어받았는지 의심스러워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대결이 왜 무산돼?”
“일단 앉아라. 올려다보며 얘기하려니 목 아프다.”
대웅이 의자를 끌어오자 진천이 송파에서의 일을 들려주었다. 대웅의 큰 눈이 더 커졌다.
“검마를 해치웠다고?”
“해치운 게 아니라 무공을 폐한 거다.”
“근데 그게 건이 놈하고 무슨 상관인데?”
“팔을 잘리고 단전이 깨졌지만 검마는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 시작부터 전력을 다했기에 나는 빠르게 그를 제압할 수 있었다. 접전이 아니었으니 그는 나와 차이가 난다는 것을…….”
대웅이 진천의 말을 가로챘다.
“그러니까 네 무력이 소문이 나면 건이 놈이 겁을 먹고 비무 청을 철회할 거라는 말이구나?”
“그래. 그가 대결의 의지를 고수한다면 두 가지 이유뿐이다.”
“그게 뭔데?”
“하나는 그가 송파의 일을 모를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실을 들었음에도 나를 이길 자신이 있을 경우다.”
“후자는 터무니없는 소리고 전자는 어느 정도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냐?”
“글쎄. 늦어도 사나흘 후면 확실해지겠지. 검마가 입을 다물지 않는 한, 그리고 사벌의 정보망이 제대로 작동하는 한 네 동생의 귀에 들어갈 공산이 크다.”
대웅이 허탈한 듯 앙상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건이 놈을 폐인으로 만들 절호의 기회라고 믿었는데. 나는 네가 그놈이 다시는 칼을 잡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손보기를 바랐다, 천. 수호보에서 삼백의 인명을 학살한 건 시작에 불과하다. 그놈은 그 백배, 천배의 만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고도 남을 악귀다. 너는 그 자식이 얼마나 잔인하고 야비한 놈인지 모른다.”
대웅의 눈동자에 공포와 원독이 동시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