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75
제174화
진천은 왼쪽 어깨에 아릿한 통증을 느꼈다.
철저히 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남천도왕에게 일격을 허용한 것이었다. 틀림없이 격격쇄였을 터였다.
진천은 간담이 서늘했다. 남천도왕과 그의 거리는 십여 장에 달했다. 남천도왕은 그 거리에서 그의 심장을 겨냥해 무형지기를 날린 것이었다. 미리 예상하고 피한 덕분에 심장이 터지는 참사는 모면했지만 실로 무시무시한 절기가 아닐 수 없었다. 격격쇄가 검문(劍門)에서 꿈의 경지로 일컬어지는 심검(心劍)과 동일한 무학이라는 일각의 평가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진천은 기실 처음부터 곽건보다는 남천도왕에게 더 큰 신경을 할애했었다.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곽건의 공격은 대처할 자신이 있었지만 남천도왕은 경우가 달랐다. 그가 작심하고 암해를 시도하면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렇더라도 곽건이 준비해 온 패들은 놀라운 바가 있었다.
진천은 설마 그가 벽력도문의 삼대무학을 한꺼번에 쏟아낼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셋 모두 공력의 소모가 극심했기에 곽건의 입장에서 실패로 돌아가는 순간 일시적으로 방어불능의 상태에 처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곽건은 진천이 날린 절멸비들을 피해내지 못하고 두 개를 얻어맞았다. 진천은 곽건의 오른팔을 뚫고 나간 절멸비는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음을 인지했다. 뼈를 끊어내지 못했기에 그의 팔은 붙어있을 것이었다. 반면 복부에 꽂힌 절멸비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음을 직감했다. 곽건의 단전은 십중팔구 파괴되었을 터였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무인으로서의 생명은 끝난 것으로 보아야 했다.
진천은 자신이 과잉 대응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곽건과의 일전은 무공의 우열을 가리는 비무가 아니라 생과 사를 가르는 결투였다. 곽건이 구사한 수들마다 확연한 살의가 담겨있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전력을 다한 절멸비는 정당한 응수였다.
그러나 진천이 곽건을 폐인으로 만든 것은 그가 먼저 살수를 뿌려서가 아니었다. 대웅에게서 곽건과 얽힌 소년시절의 비사를 들었을 때 진천은 이미 결심을 굳혔었다. 곽건은 그의 악행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중립지대에서 정파를 지향하며 선정을 베푼 수호보주 장량과 그의 수하들을 학살한 죄과도 치러야했다.
진천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고는 땅바닥에 엎어진 곽건을 내버려두고 남천도왕에게 쇄도했다.
남천도왕의 격격쇄를 흘려내다 어깨에 부상을 입었지만 절멸도를 부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진천은 권왕을 도와 남천도왕을 처치할 참이었다. 남천도왕은 그와 권왕의 합공을 감당치 못할 것이었다. 그는 오늘 손자와 더불어 무인으로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터였다.
그러나 하늘은 남천도왕의 무림에서의 이른 퇴장을 반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짓쳐들던 진천은 도중에 방향을 틀어야 했다. 후방에 두고 온 곽건이 몸을 추스르고 그를 쫓아와서가 아니었다. 호수에 면한 절벽 위에서 검은 그림자가 지상의 병아리를 낚아채는 매처럼 엄청난 속도로 날아 내렸기 때문이었다. 흑영(黑影)을 본 순간 진천은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진천은 흑영의 정체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는 만마의 제왕이자 팔대무왕의 일인인 마왕 권상명임에 틀림없었다. 절대지경의 초입에 들어선 진천을 압박하는 존재감을 발하는 이는 천하를 통틀어도 여덟에 불과했다. 진천은 그 중 다섯 명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나머지 셋 중 둘은 여인인데 흑영은 사내이니 그는 마왕일 수밖에 없었다.
진천은 온 힘을 다해 마왕이 하강해오는 반대편으로 질주했다. 그러면서 마왕이 그의 도주를 방치하고 남천도왕에게 합세하지 않기를 빌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야 할 터인데 이대이의 난전은 바람직한 전개가 아니었다. 다행히도, 그리고 예상한 대로 마왕은 권왕과 남천도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를 추격했다. 진천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이제 겨우 하나의 고비를 넘겼을 뿐이었다.
전력으로 경신을 전개한 진천은 순식간에 양지호반을 벗어나 숲으로 접어들었다.
진천은 남천도왕과 경천동지의 대결을 벌이는 권왕의 안위가 염려스러웠다. 십 년 전이었다면 권왕이 극미한 차이나마 우위를 점했을 테지만 현재의 시점에서는 남천도왕을 상대로 밀릴 공산이 다분했다. 권왕은 전성기에서 내려오고 있는 반면 남천도왕은 절정기에 접어들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천은 권왕이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무사하리라 보았다. 무력과 별개로 주변의 조건이 남천도왕에게 유리하지 않아서였다. 남천도왕은 권왕을 잡으려고 전부를 걸기엔 잃을 것이 너무 많은 인물이었다. 거기에 그에겐 중상을 입고 쓰러진 곽건을 챙겨야 하는 부담도 있었다.
진천은 이런 상황이 펼쳐졌을 때 끝장 승부를 고집하지 말고 적당한 선에서 물러서도록 수차례 신신당부했던 그의 뜻을 권왕이 헤아려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온존했기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쌍룡암으로 다시 돌아가 권왕이 그의 당부를 따르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실 권왕을 돌볼 여유 따윈 한줌도 없었다. 권왕보다 그가 훨씬 위급한 처지이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만 했다.
갈수록 거리가 좁혀들었다.
그의 등 뒤로 무섭게 따라붙는 마왕의 존재를 느끼며 진천은 사력을 다해 내달렸다. 마왕과의 정면대결은 자살행위였다. 도주만이 살 길이었다.
수림을 빠져나오며 진천은 그의 안배가 무용지물이 되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외조부는 오지 않을 것이었다.
닷새 전 곽건으로부터 때 아닌 비무 청을 받았을 때 진천은 그 배경을 두고 여러 모로 따져보았다. 곽건이 순수하게 전날의 패퇴를 설욕하기 위해 판을 벌렸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가 비무를 빌미로 뭔가 덫을 놓으려 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웠다. 진천은 특히 남천도왕의 개입이 마음에 걸렸다. 급격히 상승한 손자의 무위를 믿었더라도 그가 승리를 낙관했을 성싶지는 않았다. 검마의 일을 몰랐더라도 남천도왕의 정보망과 분석력이라면 진천이 그간 공개적으로 현시한 무력이 곽건에 뒤지지 않음을 알고 있었을 터였다.
진천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남천도왕이 마왕과 손을 잡는 그림을 떠올렸다. 사파와 마도는 서로를 원수로 여기는 형제 같은 사이지만 실현 불가능한 협잡은 아니었다. 남천도왕과 마왕 둘 다 수지타산이 맞는 장사이기 때문이었다. 진천의 죽음은 그들 모두에게 크나큰 이득이었다. 마왕은 눈엣가시를 뽑아서 좋고 남천도왕은 손자의 앞길에 놓인 최대의 장애물을 치우게 되는 셈이니 연수를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권왕까지 없앨 수 있다면 그들로서는 금상첨화일 터였다.
일 푼의 가능성이 있는 것만으로도 곽건의 비무 청을 거절해야 할 터이지만 진천은 그럴 수 없었다. 팔정파 사람들의 목숨이 걸려있는 데다 어차피 남천도왕과 마왕이 연수하기로 합의했다면 결국은 그들을 상대해야하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사마(邪魔)의 우두머리들이 작당했을 경우를 역이용하기로 했다. 비무 청을 받은 날 고량을 외조부에게 보낸 것은 그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였다. 진천은 곽건과의 비무에 앞서 외조부가 양자호 쌍룡암 주위에 은신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면 마왕이 출현하더라도 얼마든지 맞설 수 있을 터였다. 그가 단시간에 곽건을 제압하고 거들면 아군의 전력이 우세했다. 어쩌면 대어를 낚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외조부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양자호에 오지 않은 것은 두 가지 경우밖에는 없었다. 고량이 서신을 전하지 못했거나 서신을 받았음에도 외조부가 외면했거나. 진천은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외조부의 합류가 중대한 사안이었음에도 직접 수행하지 않고 고량에게 맡긴 까닭은 시일도 촉박하거니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서였다. 진천은 무엇보다 장왕과 독후가 적진에 참여하는 사태를 우려했다. 그들이 양자호에 나타나면 설사 외조부가 오더라도 대적불가의 형세에 처할 터였다.
진천은 상운(商雲)의 힘을 빌려 장왕과 독후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장왕은 정진의 열락궁에 틀어박혀 있음이 확실했다. 독후는 여전히 행방이 묘연했다. 그들이 전격적으로 양자호에 모습을 드러낼 것 같지는 않았지만 진천은 돌다리를 두드려보기로 했다. 비무 전날 임계에 도착해 권왕과 더불어 양자호 인근을 수색한 것은 그러한 조심성의 일환이었다. 혹시라도 장왕이나 독후가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었다면 권왕의 기감에 걸려들었을 터였다. 마왕은 몰라도 두 사람이 은신에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진 않았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마왕으로부터의 최초의 공격은 숲을 벗어나자마자 날아왔다.
진천은 어렵지 않게 그의 등에 쏟아지는 암기들을 피해냈다. 아직 마왕과는 십오륙 장쯤 떨어져 있었기에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거리가 그 절반으로 들어들면 위험했다. 그리고 시간은 진천의 편이 아니었다.
무릇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대결은 전자가 불리한 법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양자의 속도가 비슷할 때의 얘기였다. 추격자의 속도가 더 빠르다면, 그리고 지구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아무리 갈지자로 달아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잡히기 마련이었다.
협곡이나 수림 같은 지형지물을 교묘하게 이용하기도 어려웠다. 새처럼 공중을 비행하는 절대고수를 떨궈 낼 방도는 없었다. 골짜기에 들어선다면 스스로 퇴로가 없는 궁지로 발을 들여놓는 셈이었다.
추격전이 개시된 지 일 각도 지나지 않아 진천은 칠팔 장의 거리를 내주고 말았다. 마왕 같은 절대지경의 초인에겐 코앞이나 마찬가지였다. 과연 곽건의 십전섬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강선(剛線)들이 빛살처럼 날아왔다. 일순 마왕이 쏘아 낸 빛줄기가 진천의 동체를 관통하는 듯 보였다.
“엇!”
손쉬운 사냥 성공을 자축하려던 마왕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진천이 신묘한 움직임으로 그의 팔선조강(八線爪剛)를 모조리 흘려내서만이 아니었다. 진천의 좌수에서 백광이 번득인 순간 마왕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팔선조강에 못지않은 강선들이 그의 전신 요처를 노리고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허공에 뜬 상태인지라 회피가 용이치 않았기에 마왕은 그의 강조(剛爪)로 진천의 절멸비를 쳐냈다. 강조를 낀 손가락은 물론이고 손목과 팔꿈치까지 얼얼해지자 마왕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렸다. 검마를 가볍게 제압했다는 어린 괴물을 경시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호신강기로 받아내려 했다간 부상을 입었을 터였다.
예상을 훌쩍 초과하는 진천의 무력에 놀란 마왕은 더욱 살심을 다졌다. 기필코 제거해야 했다. 여기서 더 크면 신룡이 아니라 천룡이 될 판이었다.
필살의 결의를 품으면서도 마왕은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진천을 몰았다. 섣불리 진천을 공격하기보다는 그가 권왕에게로 되돌아가거나 정맹의 영토로 도주하는 걸 막는 데 주력했다. 퇴로를 막힌 사냥감은 어쩔 수 없이 서남 방향으로 달아나야 할 터였다. 그곳은 마련의 땅이었다. 더욱이 백리만 더 가면 평야지대가 나오기에 몸을 숨길 곳도 없었다. 마왕은 거기서 어린 괴물을 끝장 낼 참이었다. 하남 무림이 배출한 신룡은 승천을 하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었다. 그가 살아날 확률은 전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