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76
제175화
드디어 오양만답이 나왔다.
수백만 명의 인구를 먹여 살린다는 명성답게 사방이 지평선을 이룰 정도로 광대한 논을 품은 평야는 추수를 끝낸 후라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진천은 마왕이 그를 이 벌판으로 몰아왔음을 알면서도 크게 저항하지 않고 그의 의도에 따랐다. 기실 그는 애초부터 이 방향으로의 도주를 염두에 두었었다.
오양의 남단엔 참주봉이 있었다. 그리고 참주봉 너머엔 만상석굴이 있었다. 만상석굴은 석 달 전 오양의 마인들을 친 직후 장왕이 도래했을 때 가린과 함께 피신했던 절지(絶地)였다. 진천은 마왕이 양자호에 나타날 경우에 대비해 세 갈래의 도주로를 머리에 그려두고 있었다. 만상석굴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도피처였다.
마왕과 맞닥뜨린 후 그가 북으로의 탈출을 차단하는데 주력하자 진천은 미련 없이 오양 방면으로의 도주를 결정했다. 적지로 들어가는 셈이었지만 정맹의 영토로 들어가는 것보다 오히려 위험부담이 적었다.
우선 오양은 양자호에서 겨우 일백팔십 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전속력으로 경신을 전개하면 반 시진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진천은 그가 마련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권왕이 따라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한 마왕이 속전속결을 택할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물론 그 예상이 들어맞으려면 마왕에게 그를 한 입에 삼키려들었다간 목에 걸릴 수도 있음을 주지시켜야 했다. 진천은 추격전 초반에 최선의 절멸비를 날림으로써 그가 살코기가 아닌 가시임을 마왕에게 알려주었다. 그에게 한 수가 있음을 인지한 마왕은 기대대로 공격을 자제하고 몰이에 전념했다.
광활한 들판에 발을 들여놓으며 진천은 승부처에 이르렀음을 예감했다. 마왕은 틀림없이 오양만답을 사냥터로 삼으려 할 터였다. 그가 작심하고 나서면 거리를 좁히는 건 어렵지 않을 터이기에 전투는 불가피했다. 무작정 만상석굴로 달아나다간 뒤를 내주고 발버둥 한 번 치지 못하고 비명횡사할 가능성이 컸다.
마왕과의 일전을 각오했으나 진천은 최대한 만상석굴에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일직선으로 내달았다. 팔구 장의 거리를 유지한 채 그를 쫓던 마왕은 속도를 높였다. 순식간에 둘 간의 거리가 육칠 장으로 줄어들었다.
마왕이 양 손에 착용한 강조에서 여덟 줄기의 강선이 발출되었다. 마왕의 성명절기 중 하나인 팔선조강이 소리도 없이 진천의 등을 덮쳤다. 비환으로 강선의 화살비를 빠져나가며 진천은 절멸비로 반격했다. 마왕은 강조로 강기 비수들을 튕겨냈다. 여기까지는 최초의 접전과 거의 동일한 양상이었다. 그러나 마왕의 다음 대응은 처음과 달랐다. 주춤거리며 진천이 거리를 벌릴 여유를 허락했던 그때와는 달리 마왕은 절멸비를 쳐내며 곧장 그에게 쇄도했다.
진천은 몸을 돌렸다. 오 장 이내에 들어온 마왕을 등지고 달아나는 건 목을 쳐달라고 내맡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진천의 좌수에서 뻗어나간 절멸삭이 석 자 길이의 강기를 뿜어내 단창(短槍)처럼 변한 마왕의 강조를 휘감았다.
십이 성의 공력을 쏟아 부었지만 절멸삭은 조강(爪剛)을 잘라내지 못했다. 대신 조강이 돌연 일 장이나 늘어나며 진천의 허리를 베어왔다. 진천은 물러서지 않고 마왕에게 돌진했다. 그의 대응을 예측하지 못했는지 마왕이 일순 멈칫했다. 그러나 백전노장답게 바로 당혹감을 수습하고는 좌수에 낀 강조로 진천을 찔러갔다.
절멸삭을 절멸참으로 바꾼 진천은 강조를 맞받아쳤다.
끼익!
귀에 거슬리는 기음과 함께 진천은 강조에 실린 거력을 견디지 못하고 무릎이 접혔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한 진천의 머리 위에 벼락이 떨어졌다. 가까스로 마왕의 살초를 흘려낸 진천은 옆으로 쓰러지며 연달아 여섯 개의 절멸비를 날렸다. 근거리에서 사용하기엔 적당치 않은 수법이었으나 기사회생의 묘수가 되었다.
가일수를 하면 진천을 끝장낼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부상을 꺼린 마왕은 강조를 방비에 돌렸다. 임기응변의 궁여지책으로 절명의 위기를 모면했지만 진천은 아직 사지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마왕은 문자 그대로 엎어지면 코가 닿을 곳에 있었고 마왕과의 짧은 격돌에서 진천은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비수들을 쳐낸 마왕의 마수가 다시 진천에게로 향했다. 진천은 제 피로 범벅이 된 입술을 깨물었다.
판단착오였다.
진천은 마왕에게 십 초는 버틸 수 있으리라 보았다. 그러면 그 와중에 틈을 보아 도주를 재개할 참이었다. 한 번만 양보를 받아낸다면 단숨에 십여 장을 벌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마왕은 생각보다 강했다. 장왕과 더불어 팔대무왕 중 최약체를 다툰다는 평가를 받는 마왕이나, 그와의 격차는 확연했다. 도저히 맞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진천은 자신의 실태를 반성했다. 외조부와 일만 초의 수련을 치르고 권왕과 수시로 비무를 하며 팔대무왕에 대한 두려움이 엷어진 것은 양날의 검이었다. 남천도왕이나 마왕을 대면하고도 위축되지 않는 자신감이 생긴 반면 자기도 모르게 그들을 상대로 어느 정도는 버텨볼 수 있다는 자만심도 싹 튼 모양이었다.
양손에 낀 강조를 낫처럼 휘두르며 목을 베어오는 마왕을 직시하며 진천은 사신(死神)과 조우했음을 직감했다. 마왕과 강조와 그 뒤의 푸른 하늘이 이승에서 보는 마지막 장면일 터였다. 인간은 사신의 손을 피할 수 없는 법이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깨달은 순간 시간이 정지했다. 아니, 느리게 흘렀다. 빛살에서 굼벵이의 속도로 변한 강조를 바라보며 진천은 두 가지를 떠올렸다. 하나는 팔영보의 무영(無影)이었고 다른 하나는 외조부의 분천일획(分天一劃)이었다.
무영은 진천이 최근에야 팔영보 상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된 절초였다. 비환이나 화연 같은 다른 절기들과는 달리 무영은 구결의 형태를 갖추지는 않았다. 팔영보의 비기들을 원활히 구사할 수 있게 되면서 진천은 그것들 전부를 하나로 묶는 비학이 존재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인지했다. 진천은 미지의 절학에 무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따금 심상수련 중에 무영의 실마리를 잡기도 했지만 막상 구현하려고 하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진천은 ‘간지러움’이 뼈를 긁어내고 싶을 정도로 심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경험 상 욕심을 부린다고 이룰 수 있는 게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비환으로 이동할 공간까지 완벽하게 장악한 마왕의 마공을 받으며 진천은 아직 어설픈 수준의 시현조차 하지 못한 무영만이 유일한 구명줄이 될 것임을 알았다.
분천일획은 원주 강가 번천일백팔도 중 최고 최강의 무학이었다.
진천은 전날 외조부가 극한의 비무 수련을 매조지하며 선보였던 그 경이로운 일도(一刀)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일사부의 절멸도법은 강가 사대무학 중 세 가지, 즉 광섬, 파즉살, 쌍전을 심화발전 시켰지만 분천일획만은 발전은커녕 제대로 담아내지도 못했다. 일사부가 분천일획의 요체를 터득하는 데 실패한 탓이었다. 일사부는 그것이 자신의 유일한 여한이라고 한탄하곤 했다. 그나마 눈을 감기 직전 샘솟은 최후의 심득을 진천에게 전해주었으나 여전히 미완성이었다.
외조부의 분천일획을 접한 진천은 일사부가 그에게 남긴 과제를 완수할 단초를 얻었음을 깨닫고는 전율했다. 그러나 실현까지는 요원했다. 진천은 무영과 마찬가지로 분천일획 또한 그의 속에서 무르익을 때까지 여유를 갖기로 했다.
여유는 없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영영 기회는 없을 것이었다.
마왕이 발한 강기의 폭풍이 그의 동체와 사방 이삼 장을 쓸어버리려는 찰나 진천은 심상에서 솟구친 두 줄기 빛의 인도에 따라 움직였다.
그의 좌수에서 뻗어 나온 절멸도가 전면을 횡으로 그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동체는 정오의 태양이 선사한 짧은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진천이 행한 공격과 회피는 마왕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낳았다.
일시에 그의 호신강기를 깨뜨리고 본체를 침범한 진천의 절멸도에 대경실색한 마왕은 급히 신법을 펼쳤다. 하지만 옆구리에 진천의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중상은 아니었으나 마왕이 입은 심적 충격은 상당했다.
한편 마왕의 필살기인 멸지붕천(滅地崩天)에 직격당해 소멸된 것처럼 보였던 진천은 원래의 위치에서 팔구 장이나 떨어진 곳에 나타났다. 생사의 경계에서 터뜨린 비기로 목숨을 건졌으나 멸지붕천에 실린 경력의 여파로 내장이 파열되는 내상을 당한 진천은 한 움큼의 응혈을 토한 후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일순지간 멍하니 진천을 보고만 있던 마왕이 정신을 추스르고는 추격을 시작했다. 납득 불가의 결과였으되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다 잡은 고기를 놓쳤으나 고기는 아직 그의 어장 안에 있었다. 마왕은 경공의 속도를 올리며 살기도 키웠다. 금방 따라잡을 테고 반드시 뭉개버릴 참이었다.
진천은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잠시라도 혼미해져 중심을 잃으면 속도가 떨어져 마왕에게 덜미를 잡힐 것이었다. 진천은 남은 내공을 모조리 경신에 쏟아 부었다. 지금의 국면에서 절멸비로 마왕의 접근을 견제하는 수단은 자충수가 될 공산이 컸다. 후방에서 날아오는 마왕의 공격을 팔영보로 피해내며 그와의 거리가 칠팔 장 이내로 좁혀지기 전에 어떻게든 만상석굴에 들어가야 했다.
반의반 각이면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진천에게 만상석굴은 까마득히 멀어보였다. 하지만 망망대해 같았던 평야도 결국은 끝자락을 드러내더니 첨탑처럼 솟은 봉우리를 진천에게 선물로 내놓았다. 참주봉이었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여섯 차례의 강선 공격을 기적적으로 흘려낸 진천은 마침내 고대 궁궐의 성문처럼 거대한 만상석굴의 입구에 이르렀다.
진천은 암흑이 고인 석굴 속으로 뛰어들었다. 간발의 차이로 그를 놓친 마왕 또한 쏜살같이 안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입굴(入窟)하자마자 마왕은 비행을 멈추고 바닥에 내려앉아야 했다. 도처에 솟은 돌기둥들이 진로를 막고 있어서였다. 성질 같아서는 성가신 석주(石柱)들을 닥치는 대로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괜한 손찌검임을 알기에 마왕은 분기를 억누르고 어둠 속의 추격전에만 집중했다.
먹잇감을 놓칠 일은 없었다. 먹물 속에 들어온 듯 컴컴했지만 그의 기감은 사냥감의 일거수일투족과 호흡을 정확하게 포착해 냈다. 상처 입은 새끼용이 토해내는 가쁜 숨소리를 쫓으며 마왕은 기습에도 대비했다. 반 각 전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괴이하고도 강력한 절초가 다시 날아오지 말라는 보장은 없었다.
마왕은 사냥의 성공을 자신했다. 꽤 넓은 듯했지만 굴로 들어온 이상 하남신룡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마왕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만상석굴은 ‘꽤’ 넓은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넓었다. 오래 전 만상석굴 내부를 탐사했던 절독문의 독귀(毒鬼)들은 그곳의 면적이 십만 평에 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진천은 만상석굴의 넓이에 기대 생존과 활로를 모색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넓어도 단순히 도망만 다녀서는 결국은 마왕의 강조에 낚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만상석굴 곳곳에 안개처럼 깔린 시독(屍毒)을 이용하기도 어려웠다. 전날 장왕은 독기를 꺼려 심처(深處)로의 추격을 단념했으나 마왕이 그런 선택을 할 가능성은 서산의 일출보다 낮았다. 필살의 의지가 마왕 쪽이 더 강해서만이 아니었다.
마왕은 독에 관한 한 당금 무림의 확고부동한 이인자(二人者)였다. 그보다 상위의 독인으로 인정받는 이는 독후 연진진 뿐이었다. 독마(毒魔) 서문경(西門經)조차도 독공 방면에서 마왕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했다. 그러니 마왕이 시독에 몸을 사릴 일은 없으리라고 보아야 했다.
진천의 복안은 만상석굴의 넓이나 시독의 활용이 아닌 바깥으로 이어진 비밀 통로에 있었다. 기실 비밀이랄 것도 없었다. 누구든 만상석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면 외부로 통하는 몇몇 암로를 발견할 수 있을 터였다.
석 달 전 장왕이 떠난 후 오양 천지문에 가서 부상을 당한 동료들을 데리고 만상석굴로 돌아왔을 때 진천은 광대한 동굴의 내부를 꼼꼼히 조사해 두었었다. 오늘의 사태를 예견하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동료들이 운공에 들고 가린이 회복하는 동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벌인 심심풀이였다. 진천은 오늘의 행운을 가져다준 그날의 시간 때우기에 감사했다.
하지만 행운이란 표현을 쓰기엔 아직 일렀다. 만상석굴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릴 수는 있겠지만 마왕을 떨궈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만상석굴을 빠져나간 후 마왕과의 마지막 승부가 펼쳐질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