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77
제176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진천은 빠른 속도로 전진했다.
장애물들을 깨부수거나 돌아오느라 마왕은 조금씩 뒤쳐졌다. 창인의 지하미로를 연상시키는 복잡한 동혈들을 지나며 진천은 엉뚱하게도 명을 생각했다. 그녀에게 보이는 세상은 이와 같을 것이었다. 얼마나 답답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일다경가량 달리자 갑작스럽게 어슴푸레한 빛이 암흑 너머에 스며들었다. 진천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전력 질주했다. 마왕이 최소한 이십 장은 떨어져 있음을 알았지만 금방이라도 그의 손이 목덜미를 움켜쥘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걸림돌이 사라진 공간에서 이십 장이면 마왕에겐 눈 깜짝 할 새 지울 수 있는 거리였다.
진천은 토끼나 드나들 법한 좁은 구멍을 빠져나왔다. 전날 장왕이라면 결코 통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물론 비대한 장왕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출입할 수 있을 터였다. 축골공(縮骨功) 같은 비술을 발휘할 것도 없이 그냥 무지막지한 장공으로 뚫어버리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화염 같은 햇살이 쏟아지자 진천은 눈을 깜박거렸다. 하지만 속도는 조금도 줄이지 않고 미친 듯이 내달렸다. 지금은 촌각의 차이로 생과 사가 엇갈릴 수 있는 국면이었다.
비탈길을 굴러 떨어지듯 내려온 진천은 드디어 목표로 삼았던 냇가에 이르렀다. 물에 뛰어들기 전 힐끗 돌아보니 마왕은 아직 만상석굴에서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가 출구에 거의 도달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수중으로 들어간 진천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천운이었다. 만약 마왕이 그가 입수하는 장면을 보았다면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을 것이었다.
만상석굴 남쪽으로는 흑사천(黑蛇川)이 흘렀다.
바닥에 까만 모래가 깔려 있어 흑(黑)이었고 물길이 뱀처럼 구불구불했기에 사(蛇)였다. 폭이 좁아 강이라는 이름을 얻진 못했지만 사하(社河)에 합류하기까지의 길이가 이삼백 리에 달라는 시내였다. 주변의 풍광이 삭막한 데다 유속이 빨라 수영이나 낚시를 즐기기가 어려웠기에 사람들의 발길을 끌지 못하는 하천이기도 했다.
진천은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지 않고 벽으로 붙었다. 그러고는 안으로 파고들었다. 토중에서 일 장을 나아간 진천은 기를 갈무리하고 호흡을 닫았다. 귀식대법을 펼침과 동시에 진천은 생환결을 운용했다.
당장 목숨이 경각에 달린 치명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으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마왕이 단시간에 그를 찾아내지 못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가 남긴 자취와 혈흔을 보고 마왕은 흑사천이 도주로임을 알아차렸을 것이었다. 그가 수상비(水上飛)를 전개했다는 가정 하에 상류와 하류 중 어느 쪽으로 갔을지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터였다. 굴곡진 흑사천을 따라 위아래로 훑어볼 필요 없이 공중으로 상승하여 확인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은 예상하기 어려웠다. 마왕은 그가 물속에서 달아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었고 아니면 바닥 아래나 옆벽 너머 어딘가에 숨어서 몸을 웅크리고 있을 거라 짐작할 수도 있었다. 전자면 다행이고 후자면 위험했다.
진천은 운에 운명을 맡길 수는 없었다. 그가 은신했다고 생각했다면 마왕은 입수 지점부터 수색에 착수할 터였다. 하류 방면을 중점적으로 살필 수도 있지만 역을 찔렀을 거라 지레짐작하고 상류 쪽으로 거슬러 갈지도 몰랐다. 여하간 많은 시간은 소요되지 않을 것이었다.
좀 더 멀리 나아간 후에 흙벽을 파고들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마왕은 그의 움직임을 포착해냈을 것이었다.
숨을 멈췄다고 하나 심장의 박동까지 없앨 수는 없었기에 마왕의 기감에 걸리는 건 시간문제라 보아야 했다. 하여 지금의 조건에서 대비책은 생환결의 운용뿐이었다.
생환결을 통해 내상을 치유하고 무력이 약간이나마 상승하면 진천은 마왕과 정면대결을 펼칠 작심이었다.
부지불식간에 터져 나온 분천일획의 변용과 무영을 다시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 기실 두 절기 모두 명과의 일전에서 맹아가 싹 텄었다. 완연한 실패이긴 했지만 생사의 경계에서 절박하게 묘수를 갈구했던 그날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비약도 없었을 것이었다.
물론 실전에서 신공을 다시 구사할 수 있다고 해도 마왕과 대등한 승부를 펼칠 가능성은 희박했다. 마왕은 여전히 철벽일 터였다. 하지만 아까처럼 일방적으로 깨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적어도 수십 초는 버틸 수 있을 터이고 한두 번의 양보도 받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위급지경에 처하기 전에 만상석굴로 도주할 수 있을 터였다.
진천은 마왕의 무력이 권왕보다 우위에 있을 거라 평가했다.
종이 한 장의 차이지만 둘이 일대일로 겨룬다면 마왕의 승산이 높으리라 보았다. 이는 세간의 인식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권왕은 오랫동안 검왕과 더불어 팔대무왕 중 최강을 다투는 무존으로 인정받아 왔다. 반면 마왕은 장왕과 함께 여덟 무왕들 중 최약체로 꼽혔다. 만약 권왕과 마왕의 결전에 승패를 두고 내기를 하라면 절대다수가 권왕에게 돈을 걸 터였다.
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권왕은 지는 해였고 마왕은 중천을 차지한 태양이었다. 둘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질 게 틀림없었다. 진천은 권왕의 무력이 더 쇠퇴하기 전에 그를 뒷받침해줄 수 있도록 자신이 강해지기를 빌었다.
독수리의 발톱 같은 것이 심장을 옥죄었다 찢어버리는 듯한 격통을 느끼며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통증을 참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진천은 자신의 수명이 또 한 번 급격히 단축되었음을 직감했다. 얼마나 남았을까. 그 질문이 뇌리에 떠오른 순간 진천은 강제로 지워버렸다. 답을 찾기도 씁쓸하거니와 지금은 머리 위에 도사리고 있을 마왕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환생결의 공능으로 내상이 경이로운 속도로 아물었다. 심장의 독정이 녹으며 증가된 내력이 단전에 고였다.
진천은 서서히 호흡을 재개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구태여 먼저 뛰쳐나갈 까닭이 없었다. 마왕이 그를 찾을 때까지 심력과 기력을 소모하도록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었다.
동면하는 곰처럼 미동도 없이 웅크리고 있던 진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땅 속에서는 시간의 경과를 알기가 어렵지만 적게 잡아도 한 시진은 지났을 터였다. 어쩌면 두 시진이 흘렀을지도 몰랐다. 마왕이 그의 은신을 열 번은 감지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진천은 자문했다. 마왕은 그의 위치를 파악하고도 공격을 자중하고 있는 걸까. 아님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암습하려는 속셈일까.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진천은 행동을 개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설령 마왕이 지상에서 대기하고 있더라도 이제는 나가야 할 시점이었다. 진천은 아까부터 심중에 떠오른 한 가지 문제로 인해 마음이 조급해진 상태였다.
조금씩 흑사천 쪽으로 이동한 진천은 물살에 몸을 실으며 기감을 끌어올렸다. 마왕의 기운은 잡히지 않았다. 진천은 과감하게 물 밖으로 솟아올랐다. 그를 맞이한 것은 월광이었다.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진천은 허탈했다. 마왕이 어딘가에 숨어서 그를 지켜보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긴 어려웠지만 그렇지 않을 공산이 컸다. 마왕은 그를 두고 떠나버린 것이었다. 설마 그가 그런 식으로 은신할 것을 예측하지 못했단 말인가. 물길을 따라 무작정 추적했단 말인가. 진천은 마왕을 붙잡고 묻고 싶었다.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으나 어쨌거나 나쁜 상황은 아니었기에 진천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동북 방면으로 경신을 전개했다. 한 가지 일을 처리하고 서둘러 남행해야 했다.
진천은 도중에 양자호 쌍룡암에 들렀다.
권왕과 남천도왕이 치렀을 격전의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있었다. 폐허로 변한 현장을 살펴본 진천은 두 사람이 대결이 오래 지속되지 않고 조기에 끝났음을 알았다. 남천도왕은 곽건 때문에 마음이 급했을 터였고 권왕은 마왕을 쫓기 위해 발을 빼고 싶었을 터이니 치열하게 싸우다 암묵적으로 합의를 보고 동시에 물러선 모양이었다.
권왕이 남천도왕의 칼에 당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진천은 북으로 신형을 날렸다. 하지만 삼보장으로 귀환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쌍룡암을 떠난 지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진천은 양자호에서 이백 리 떨어진 금성(金城)에 이르렀다. 금성은 일천여 년 전 호(昊)국의 도읍 시절엔 황금으로 성을 지을 만큼 영화를 누렸던 고도(古都)였으나 지금은 인구가 이만도 넘지 않는 소도(小都)에 불과했다. 중립지대에 속해 있던 금성은 현재 사평 팽가의 지배권에 들어있었다.
금성에 들어선 진천은 한 달 전까지 그곳의 지배방파로 군림하던 십결방(十結幇)으로 직행했다. 저자를 지나는 이들 중 상공을 날아가는 검은 그림자가 사람임을 알아차린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사평 팽가의 분타로 전락한 십결방에 이른 진천은 정문 앞에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경비를 보던 무사들은 자신들이 헛것을 보았다고 여기고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진천은 그의 비행과 착지를 목격하고는 반쯤 얼이 빠진 무사들에게 다가가 포권을 취했다.
“세평회의 진천입니다. 이곳의 책임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경비무사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빨리 정신을 차린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하, 하, 하남신룡!”
진천의 별호를 들은 경비무사들의 반응은 저마다 달랐다.
어떤 이는 엉덩방아를 찧었고 또 어떤 이는 땅바닥에 엎드렸다. 창을 던지고 달아나는 이들도 있었다. 두 명은 비명에 가까운 경악성을 내질렀다.
쓴웃음을 지은 진천은 사평 팽가의 검사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대문에서 벌어진 소동을 인지한 일군의 무인들이 달려 나왔다. 그들 중 선두에 섰던 중년인이 진천의 십여 보 앞에 멈춰서더니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귀하가 하남신룡이오?”
“그렇습니다.”
장내가 술렁거렸다.
곧이어 이삼십 명의 무인들이 더 정문으로 몰려나왔다. 백발이 성성한 칠십 대의 노인이 전면에 나섰다. 그러고는 방금 전 중년인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귀하가 정말 하남신룡이오?”
진천은 같은 대답을 해야 했다.
“그렇습니다.”
웅성거림이 커졌다. 백발노인의 미간에 주름이 패었다. 외기도 별 볼 일 없거니와 너무나 평범한 인상인지라 진천의 말을 반신반의하는 듯했다. 경비무사들 중 하나가 진천의 신분을 보장해주었다.
“정말입니다요. 저 공자님께서 하늘에서 날아오시는 걸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요.”
그러자 다른 경비무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자신들도 보았다며 떠들어댔다.
노인이 진천에게 포권하며 허리를 접었다.
“노부는 사평 팽가의 구영이라고 하오. 무림에 명망이 드높은 진 공자가 이 궁벽한 곳엔 어쩐 일이시오?”
진천은 머릿속을 뒤졌지만 팽구영이라는 이름은 찾지 못했다. 오재승이 건네 준 강호인명록에는 일천이 넘는 주요 인물들에 관한 정보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거기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으로 보아 팽구영이라는 노인은 아마도 절정에 미치지 못하는 검객일 터였다. 하지만 그의 무력이나 위상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전 통보도 없이 이렇게 불쑥 나타나 죄송합니다. 실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팽구영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부탁이시라면?”
진천은 에둘러가지 않고 바로 용건을 꺼냈다.
“주안 삼보장의 친인들에게 전할 내용이 있어 귀측의 전서구를 빌렸으면 합니다. 가능할는지요?”
잔뜩 긴장하고 있던 팽구영이 반색했다.
“물론이외다. 그런 거라면 당장…….”
웬일인지 말끝을 흐린 팽구영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진천은 그가 무엇을 떠올렸는지 짐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