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78
제177화
진천이 팽구영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빠를수록 좋겠지만 시급을 다투는 일은 아닙니다. 사흘 내로만 삼보장에 도착하면 됩니다.”
금성에서 주안까지는 일천육백 리가 넘었다. 금성은 요처가 아니니 천리를 나는 전서응이나 특급 전서구를 갖추고 있을 리가 없었다. 금성에서 출발한 서신이 주안에 이르려면 적게는 네 번, 많게는 여덟 번 경유지에서 비둘기를 교체해야 할 것이었다.
대번에 팽구영의 안색이 밝아졌다.
“아! 충분하외다. 사흘이 아니라 내일 밤이나 늦어도 모레 오전 중에는 진 공자의 서신이 삼보장에 당도하도록 하리다.”
진천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진천의 정중한 감사인사에 팽구영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심중에는 의혹이 일었다. 정말 목전의 청년이 그 유명한 하남신룡일까. 전에 용모화를 본 적이 있으나 워낙 특징이 없는 얼굴인지라 기억에 남아있질 않았다.
팽구영이 흰 눈썹을 이마 가운데로 밀어 올려 삿갓 모양을 만들었다. 고민거리가 있으면 부지불식간에 나오는 표정이었다.
무림의 배분은 나이가 아니라 무력으로 결정되기에 파락호 행색을 한 청년이 온 대륙에 쩌렁쩌렁한 위명을 울리는 하남신룡이 맞는다면 그에게 평대가 아니라 하대를 해도 문제 삼을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보이는 공손한 태도가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남신룡이 벌레나 다름없는 천민들에게도 존대를 한다는 괴이한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망상을 일삼는 자들이 지어낸 헛소리로 치부했었다. 말이 안 되지 않는가.
팽구영의 뇌리에 얼마 전 산동(山東)에서 일어났다는 황당한 사건이 떠올랐다. 그날 약관 어림의 청년이 산동에 나타나 자신이 하남신룡이라고 밝히면서 모종의 사안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고 했다.
백현문(白玄門)을 몰아내고 산동을 차지한 고암 설가의 무인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의 뜻에 따라 신도시 건설에 일조한다는 명목으로 보석을 내놓았다. 워낙 당당하게 구는 데다 그의 면상이 하남신룡의 용모화와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의심스러운 구석이 없지 않았으나 대놓고 무공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다. 자신을 하남신룡이라고 주장하는 청년은 고수라고 보기 힘든 미약한 기운을 분출했지만 반박귀진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었기에 그냥 넘어가야 했다. 실제로 하남신룡을 직접 보았다는 이들의 목격담에 따르면 그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부로 보인다고 했다.
결국 고암 설가의 무인들은 백현문의 소유하고 있던 진귀한 보석을 청년에게 건네주었다. 그들로부터 보석을 받은 청년은 접대를 뿌리치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 괴청년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은 곧 드러났다. 그가 산동 백현문에 나타났던 그 시각 진짜 하남신룡이 정맹을 방문했음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산동에 들어앉은 고암 설가의 무인들은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자신들이 유치한 수법에 당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입단속을 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벌어진 일이었기에 소문이 퍼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팽구영은 바짝 정신을 차렸다.
잘못하면 산동의 멍청이들에 이어 강호의 조롱거리가 될 지도 몰랐다. 전서구를 빌린다고 하나 그게 전부일 리가 없었다. 만약 태연스러운 낯짝을 한 저 젊은이가 추가적인 요구를 하면 불문곡직 견문을 넓혀달라고 요구할 참이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그 요구를 거절한다면 저 자는 십중팔구, 아니 십 할의 확률로 산동에서 고암 설가를 등쳐먹은 놈일 터였다.
“다른 부탁은 없소?”
팽구영은 자신의 목소리가 갑자기 딱딱해졌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읽은 진천은 쓴웃음이 났다. 필히 보름 전 그의 행세를 하며 산동의 고암 설가에게서 음양옥주(陰陽玉珠)를 얻어냈다는 괴인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동일인이 아님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불필요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경비무사들에게 육지비행술을 보여주며 날아오지 않았던가. 이 노인은 그들의 증언을 벌써 까먹었단 말인가.
진천의 속으로 던진 질문을 들은 듯 팽구영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잖아도 그것 때문에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기꾼이라면 하늘을 날아올 리가 없지 않은가. 그건 최소한 초절정의 중(中) 이상이라야 흉내라도 가능한 경신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따져보면 여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경비무사들은 기껏해야 창이나 휘두를 줄 아는 하급의 종자들이었다. 어둠 속에서 일이 장 길이의 호만 그리며 떨어져내려도 멀리서 날아왔다고 착각하고도 남을 놈들이었다.
그 정도라면 자신도 그럴싸하게 구사할 수 있었기에 팽구영의 의심은 확신으로 치달았다. 약간의 재주는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목전의 거지가 하남신룡일 가능성은 일 푼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실은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습니다.”
진천의 대답에 팽구영은 쾌재를 불렀다.
그럴 줄 알았다, 이놈!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중년인이 다가와 팽구영의 귓전에 속삭였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칠숙. 아무래도…….”
팽구영이 밥상을 가로채려 드는 조카의 말을 막았다.
“가만히 있어라, 고(高)야. 내가 알아서 하마.”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중년인은 뒤로 물러섰다.
진천에게 시선을 돌린 팽구영이 물었다.
“그래, 이번엔 또 무슨 부탁인지 들어볼까……요?”
팽구영은 억지로 말미에 ‘요’를 붙였다. 거의 확실하다고 믿었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한 안전장치였다.
“서신을 쓸 지필묵을 주셨으면 합니다.”
팽구영은 어리둥절했다. 지필묵이라니. 그게 여기서 왜 나오는가. 혹시 십결방에 황금의 가치를 가진 붓이나 먹이 있었던가. 지난 한 달 간 십결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보물을 따로 숨겨둔 비고(秘庫)는 없었다.
“어떤 지필묵을 말하는가?”
팽구영은 자기도 모르게 말을 놓았다.
“글씨를 쓸 수 있으면 아무 거나 괜찮습니다.”
예상했던 답변이 아니었기에 팽구영은 말문이 막혔다. 그가 우물쭈물하는 틈을 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년인이 끼어들었다.
“지필묵을 가져오기에 앞서 귀하의 신공을 견식 할 영광을 주겠소? 지필묵을 얻으려면 그 정도의 수고는 해주어야 할 것 같소만.”
조카의 월권에 팽구영이 노성을 터뜨렸다.
“조용히 있으라고 하지 않았더냐? 나도 막 그 말을 하려던 참이었단 말이다.”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기에 진천은 숙질의 갈등을 중단시켰다.
“보잘것없는 솜씨지만 보여드리겠습니다.”
진천의 좌수에서 하얀 고드름이 돋아나자 모두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양쪽에서 잡아당긴 엿가락처럼 흐물흐물 늘어난 고드름은 무려 삼사 장을 뻗어나가더니 집채만 한 바위를 쓱 그었다. 황소 열 마리를 합쳐 놓은 크기의 거암이 쩍 갈라지자 중인의 입들도 쩍 벌어졌다.
절멸삭을 회수한 진천이 포권을 취했다.
“이 정도면 지필묵을 얻을 수 있을 지요?”
중년인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턱이 제멋대로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팽구영이 애꿎은 아랫사람들을 닦달했다.
“어서 저분께 지필묵을 ‘모셔다’ 드리지 않고 뭐하는 게냐?”
팽구영은 충격으로 인해 자신의 말이 꼬였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공중으로 솟구치는 진천의 신형을 올려다보며 팽구영은 오늘의 일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잔귀쌍마라는 악종들의 제자답지 않게 하남신룡이 정심으로 가득한 협사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나 그는 그 이상의 인물이었다. 그가 이곳에서 보인 예의와 겸손과 순후함과 배려의 미덕은 만인의 칭송을 받아 마땅했다. 팽구영은 하남신룡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며 입방아를 찧는 위인들에게 그를 직접 겪어본 사람으로서의 특권을 살려 그의 실체를 알려줄 참이었다.
이는 팽구영만이 아니라 그로부터 경비무사들에 이르기까지 진천의 등장과 퇴장을 지켜본 모든 이들이 공통으로 품은 감상이자 다짐이었다.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천은 어둠으로 물든 남쪽 하늘로 묵묵히 날아갈 뿐이었다.
반 각 만에 금성에서의 용무를 마친 진천은 남행을 서둘렀다.
기우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불안했다. 팔정파 사람들을 인질로 삼은 압박이 통함을 알게 된 남천도왕이 창인을 내버려 둘 성싶지 않아서였다. 어쩌면 남천도왕은 흑창 동이승의 보고를 받기도 전에 창인으로 수하들을 파견했을 지도 몰랐다. 그들이 늑장을 부리지 않았다면 이미 창인에 당도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진천은 외조부가 양자호에 오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가 왔더라면 남천도왕이나 마왕 중 한 명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랬더라면 엄청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설혹 사벌과 마련이 결맹하더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남천도왕과 마왕의 연수가 남천도왕의 머리에서 나온 작품이리라 확신했다. 마인들은 파괴와 살육을 본성으로 할 뿐 암계와 협잡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파의 거물들은 마두들보다 훨씬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었다.
진천은 막막했다. 실로 암담한 형국이었다. 마련을 약화시키기 전에는 사벌을 자극하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결국 둘이 손을 잡는 걸 막지 못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만약 전격적으로 사마 연합군과의 전면전이 발생한다면 정맹은 고전을 면치 못할 터였다.
전체적인 전력도 약세였지만 무엇보다 형세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절대고수의 수에서 차이가 났다. 검왕이 사실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감안하면 이쪽이 보유한 무왕은 권왕과 외조부 둘 뿐이었다. 반면 저쪽은 삼 년 이상 종적이 묘연한 독후를 빼더라도 셋이나 있었다. 독후가 가세한다면 도저히 역불급이었다.
물론 절망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예측 불가의 변수가 여럿이었다. 우선 외부의 전란은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열락궁에 틀어박힌 채 두문불출 중인 장왕의 태도변화가 중대한 변수가 될 터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마련에 가담한다면 독후의 참전과 상관없이 전세는 적들 쪽으로 기울게 뻔했다.
검후와 월교도 무시해서는 안 되는 변수였다. 어쩌면 검후를 설득해 한 편으로 삼을 수 있을지 여부가 정사마대전의 향방을 가늠할 승부수가 될지도 몰랐다. 사마 연합군에 의해 정맹이 무너진다면 다음 차례는 월교가 될 것임을 그녀에게 주지시킨다면, 성사가능성이 충분할 것 같지만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벌이나 마련만큼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정맹도 결코 월교의 우군이 아니었다. 검후가 적들이 상잔하고 자멸하는 어부지리에 끌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정맹의 곤경을 방관할 가능성도 상당했다.
진천은 형세분석과 차후 전망으로 복잡해진 머릿속을 비우려 애썼다. 아무리 궁리해봐야 명확한 지도를 그리기는 어려웠다. 상황이 닥칠 때마다 최선의 수를 찾아 길을 열어나갈 도리밖에 없었다.
그리고 진천은 알고 있었다. 다른 변수들과 달리 그가 통제하거나 조절할 수 있을뿐더러 가장 결정적인 변수가 될 인물, 혹은 사안이 있음을.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무력의 극적인 향상이었다.
만약 무영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고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않은 분천일획의 모방이 절멸도에 익게 된다면 장왕이나 마왕과 해볼 만했다. 그들을 능가하지는 못하겠지만 위협은 될 수 있을 터였다. 가령 목을 내주더라도 장왕의 양팔을 자를 수만 있다면 남는 장사였다. 거기에 강력한 원군을 대동한다면, 예컨대 명이 그를 거든다면 장왕이든 마왕이든 능히 대등한 승부를 펼칠 수 있었다.
진천은 자해를 통한 무력 상승이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염두에 두었다. 설령 그 시도가 자신의 예기치 못한 죽음을 초래할지라도 어떤 타개책도 없는 국면이 도래한다면 기꺼이 목숨을 걸 각오였다. 크기는 오분지 일로 줄었지만 핵심은 절반이나 남아있는 독정을 모조리 녹여 미증유의 공력을 얻게 된다면 장왕이나 마왕과 일대일로 겨루어 물리치는 것도 꿈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