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79
제178화
“우라질, 더럽게 덥네. 중원엔 지금쯤 슬슬 동장군이 내려오고 있을 텐데 지하인데도 이런 삼복더위라니. 바퀴벌레도 넌덜머리를 내고 달아날 이런 곳에서 잘도 살아왔구나. 네놈들이 여간 독종들이 아님은 잘 알겠다. 하지만 더 버텨봤자 네놈들만 힘들어질 뿐이다. 어차피 다 털어놓을 것, 괜한 오기 부리지 말로 얼른 불고 가라. 그러지 않으면 지옥을 맛보게 해 줄 테다. 허나 순순히 토설하면 고통 없이 일 장에 죽여주마.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한다. 어떠냐?”
백도방의 지낭 역할을 했던 삼안호리 장관이 그의 앞에 마혈을 찍힌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장한을 어르고 달랬다.
두 장한, 배씨 형제는 장관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음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가볍게 침 세례를 피한 장관이 허리를 쭉 폈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들이킬 놈들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회를 준 건 이 어르신이 고문을 극히 꺼리는 데다, 네놈들 같은 버러지들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공정한 절차를 밟는 공명정대한 성품의…….”
잠자코 지켜보던 전(前) 백도방주 오재현이 장관의 장광설을 끊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바로 시작해라.”
장관은 오재현이 뒤에 있다는 점을 이용해 면상 가득 불만을 드러냈다. 심문을 맡겼으면 내 방식대로 풀어나가도록 보장해 주어야 하지 않은가. 방주는 다 나쁜데 특히 성질머리가 급한 점이 더 나빴다. 성질 같아서는 방주고 나발이고 그냥 들이받고 싶지만, 성질대로 했다간 목전의 포로들에 앞서 염왕전으로 떠나게 될 게 빤하기에 장관은 꾹 참았다. 예전만 못하다지만 일수천비 오재현은 여전히 삼초 이내에 그의 명줄을 자를 수 있는 초절정의 강자였다.
“알겠습니다, 방주. 바로…….”
이번에도 장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오재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방주라고 하지 말랬지.”
장관은 목덜미가 서늘했다. 오재현의 목소리에 담긴 짜증은 위험수위였다. 자칫 잘못하면 진짜로 뒤통수에 비수가 꽂힐 수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각주. 제 불찰입니다. 너무 오래 입에 붙어있는지라 저도 모르게 그만.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실수하지…….”
“시끄럽다. 나와라. 내가 직접 할 테니.”
오재현의 명에 장관은 군소리 없이 물러섰다. 오재현의 인내심이 엷어진 경우엔 입을 다물고 무조건 복종하는 게 신상에 이로웠다. 하지만 장관은 덕이라고는 한 줌도 없는 그의 상전에게 속으로 욕설을 뱉는 것은 잊지 않았다.
장관을 뒤로 물린 오재현이 배씨 형제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사벌의 북명각주(北冥閣主)다.”
오재현은 그의 지위를 들은 배씨 형제가 마땅한 반응을 보이기를 기다렸다. 북명각을 들어보지 못했더라도 조금이라도 강호 물을 먹은 자라면 그가 엄청난 거물임을 알아볼 터였다. 사벌 삼십이 각(閣)의 수장들은 전원이 사령(邪令)이었다. 사령은 흔히 북맹의 용호에 비견되지만 그들보다 수가 적었기에 그 이상의 위상이라고 보아야 했다.
배씨 형제 중 동생인 배단(裴短)이 응답을 내놓았다.
“사벌의 개가 여기엔 왜 기어들어왔냐? 주워 먹을 뼈다귀도 없는데.”
혀를 깨물어 자진하지 못하도록 이를 다 뽑아버렸기에 발음이 이상했으나, 백도방 패거리가 그의 말을 알아듣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오재현의 면상을 덮은 흉터들이 일제히 꿈틀거렸다.
뒤에서 관망하던 장관은 성질머리 사나운 방주, 아니 각주가 불문곡직 배불뚝이 사내의 머리통을 부술까봐 조마조마했다. 배불뚝이를 염려해서가 아니었다. 배불뚝이와 쇠꼬챙이는 온갖 독물이 득시글거리는 지하미로를 헤매다 천신만고 끝에 잡은 고기들이었다. 그나마도 그의 지략이 없었더라면 그물에 걸리지도 않았을 터였다.
장관은 각주가 성질을 부리더라도 하나만 쳐 죽이기를 바랐다. 둘 다 황천길로 보내면 지난 이틀간의 고생을 되풀이해야 할 게 뻔했다. 이번엔 이틀이 아니라 그 두세 배의 시간이 걸릴지도 몰랐다. 어쩌면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고 밀림까지 들어가야 할 수도 있었다. 이 빌어먹을 지하미로 곳곳에 벌레 같은 놈들이 산재해 있는 게 분명했지만, 꽁꽁 숨어버리면 찾을 방도가 없었다. 한 번 써먹었던 유인책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
놀랍게도 오재현은 정수리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살기를 실행에 옮기지 않고 자중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다시 장관에게 심문을 일임했다는 것이었다. 장관은 각주가 바보가 아님을 다행으로 여겼다.
배씨 형제 앞에 선 장관이 품에서 병을 꺼냈다.
“손가락뼈를 하나씩 분지른다거나 발목의 힘줄을 뽑는다거나 아니면 배를 찢어 창자를 쑤시는 것 같은 어린 아이 장난은 하지 않겠다. 재미도 없을뿐더러 너희 같은 독종들에게 통할 성싶지도 않으니까. 대신 이 귀물(鬼物)을 먹여주마. 네놈들은 상상도 못할 만큼 비싼 귀물(貴物)이지만 아낌없이 베풀어줄 참이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화룡타(火龍唾)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창인 행에 앞서 준비한 야명주나 피독주(避毒珠)의 수십 배 가치를 지닌 보물이었다. 약문의 이단아들이 만들어낸 화룡타가 그토록 비싼 이유는 조제 자체가 워낙 어려운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십 할을 자랑하는 고문 성공률에 있었다. 제아무리 독한 자들이라도 ‘화룡의 침’ 한 방울이면 술에 약한 취객이 속을 게워내듯 뱃속에 든 비밀을 남김없이 토해내었다.
장관이 복숭아 모양의 병을 들어보였다.
“이게 뭔지 궁금할 테지? 화룡타라고 하는데 들어보았느냐?”
배씨 형제의 안색이 변했다. 장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일이 잘 풀릴 징조였다.
“화룡타를 아는 걸 보니 흑도나 사파 출신이구나. 그렇다면 얘기가 쉽겠군. 이 아까운 귀물을 낭비할 것 없이 자발적으로 털어놓으려무나. 혹시 아느냐? 이 어르신의 기분을 흡족하게 해주면 너희를 살려줄지. 아니, 살려주고말고. 너희도 하남신룡, 그러니까 진천이란 이름을 쓰는 자와 친인일 테지? 귀한 인질이니까…….”
퉤!
방심하고 있다가 배씨 형제 중 형인 배장(裴長)이 뱉어낸 침을 뺨에 허용한 장관의 낯빛이 붉어졌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들이구나. 그래, 그렇게 화염지옥을 맛보고 싶다면 원대로 해 주마.”
쇠꼬챙이처럼 마른 배장의 머리를 움켜쥐고 끌어낸 장관이 그를 바닥에 눕혔다.
“한 놈은 뚱뚱하고 다른 한 놈은 홀쭉하지만 네놈들은 형제일 테지? 코가 똑같이 생겼구나. 형제가 아니라면 둘도 없는 벗일 게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놈들은 동료가 잡힌 걸 알고서도 몸들을 사리는데 구출한답시고 달려들 리 없었을 테니. 무슨 관계든 상관없다. 소중한 이가 화염지옥에서 발광하는 광경을 감상하려무나.”
배장이 까무러치지 못하도록 혈도를 점한 장관이 병마개를 뽑더니 조심스럽게 그의 발등에 안의 내용물을 부었다.
치지직.
시뻘겋게 달아오른 인두를 물에 담근 듯한 기음과 함께 살이 타면서 생긴 노린내가 암굴에 퍼졌다. 배장의 입에서는 소름끼치는 괴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차마 형의 고통을 지켜보지 못하고 배단이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고막을 찌르는 비명성은 차단할 방도가 없었다.
배상의 발에 떨어진 액체는 그의 살과 뼈를 녹이며 위로 올라갔다. 파도에 잠식당하는 모래톱처럼 정강이가 서서히 사라졌다. 배장 앞에 쪼그리고 앉은 장관이 꼬드겼다.
“대단하구나. 무릎까지 버티는 놈은 처음이다. 이만큼 했으니 아무도 너를 비난하지 않을 게다. 괜한 고생 하지 말고 어서 토설하려무나. 화룡타가 심장에 닿으려면 족히 반 시진은 걸릴 게다. 뭐, 별미를 오래오래 맛보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으마.”
“어으 어어오으아아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요구사항을 묻는 배상을 내려다보며 장관이 느긋하게 느물거렸다.
“뭘 털어놓아야 하냐고? 그야 간단한 것 아니냐. 하남신룡과 특별히 가까운 자들 다섯 명의 이름, 생김새를 비롯한 특징, 그리고 그들의 소재다.”
“우어 어오야아 이어. 으이어…….”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듣겠구나.”
배상의 말을 자른 장관이 배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배단은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왕 형이 무너진 바에야 그를 편히 보내주는 게 나았다. 인간이 느끼는 최악의 고통이라는 작열통(灼熱痛)에서 한시라도 빨리 해방시켜야 했다.
“다 알려줄 테니 먼저 내 형을 보내주시오.”
장관은 배단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안 돼.”
“…….”
“아직도 누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지 모르겠느냐? 네 형의 참극을 끝내주고 싶다면 너부터 성의를 보여야지. 뭐, 시간을 끌 참이면 그렇게 하려무나. 다음엔 네 차례고 화룡타는 아직 많이 남았다. 충고하건대 머리가 달려있으니 그걸 써 보는 게 어떠냐? 너희가 아니라도 결국 누군가는 탈탈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 충고를 준 김에 경고도 하마. 만약 거짓을 고한다면…….”
“알았소. 일단 우리 둘이 천이와 막역한 사이요. 그러니…….”
“저런, 저런. 잔머리를 굴리란 소리가 아니었는데. 네놈들을 빼고 말해보려무나.”
“허 노야, 공 할아범, 대왕객잔의 장초, 푸줏간 성가(成家), 그리고 나무꾼 최씨(崔氏)가 있소. 장초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지금 오란에 가 있소. 곰 같은 덩치에 얼굴의 반을 수염으로 덮은 털보이니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요. 성가와 최씨는 이곳 지하미로에 있소. 어딘가에 숨어있을 테니 알아서들 찾아보구려. 성가는 왼쪽 귀에서 턱까지 길쭉한 도상(刀傷)이 나 있고, 최씨는 왼손의 손가락이 엄지와 검지, 두 개뿐이오. 둘 다 체구는 보통이오. 제길, 빨리 내 형을…….”
“어허, 잘 나가다 왜 샛길로 빠지느냐? 이럴수록 그의 고통이 길어질 뿐임을 모르겠느냐? 허 노야와 공 할아범이란 자들에 대해서도 소상히…….”
“그들은 밀림에 있소. 여기서 정남(正南)으로 칠팔십 리쯤 내려가면 이족의 마을이 있소. 제법 큰 촌락이오. 노인들은 둘 다 거기 있을 거요. 공 할아범은 의원이고 선풍도골의 풍모를 지녔소.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보자마자 알 수 있을 거요. 허 노야는 대머리에 당신들 우두머리처럼 흉터가 면상에 가득하오. 칠십 대 중반이나 아흔이 넘은 걸로 보이는 노인네요. 그는 병중이라 거동이 불편하오. 이제 내 형과 나를 염왕에게 보내주시오.”
“그건 곤란하지. 우선 네 말의 진위 여부를 확인해야 하지 않겠느냐?”
“맹세코 모두 한 치의 어김도 없는 사실이오. 나는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지어낼 만큼 명민한 놈이 아니오.”
“그야 모를 일이지. 내가 보기엔 상황 판단이 빠른 걸로 보아 충분히…….”
“이 개새끼야. 어서 형을 죽이라니까.”
“허, 이런 천하의 말종을 보았나. 동기를 죽이라고 빌다니.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내버려 두면 화룡타가 어련히 제 몫을 할 테니 기다려보려무나.”
배단이 쏟아내는 저주와 원성의 언사를 귓등으로 흘리며 장관이 몸을 일으켰다.
“대충 필요한 정보는 얻은 것 같습니다, 각주. 이제 어떻게 할까요?”
수하의 수완을 칭찬하지 않고 오재현이 바로 지시를 내렸다.
“너와 칠병귀는 이족의 마을이란 곳에 가서 두 늙은이를 잡아오너라. 초검은 오란으로 가서 털보를 잡고. 나는 여기를 더 뒤져보마.”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지시였으나 장관이 이견을 제시했다.
“그러지 말고 다 같이 움직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각주? 제가 보기엔 오란의 털보나 이곳의 잔챙이들보다 밀림에 들어있다는 노인들의 비중이 더 클 듯싶습니다. 이족들이야 개미떼와 다름없으니 문제가 아니지만 밀림에 깔려있다는 독물(毒物)들이 심히…….”
오재현이 찢어진 눈을 부라렸다.
“시끄럽다. 고작 독물 따위가 무서워서 나를 귀찮게 할 셈이더냐. 피독주 두 알 모두 네놈들한테 줄 테니 잡소리 말고 갔다 와라.”
장관은 한숨이 나왔다. 각주는 뭉치면 안전하고 흩어지면 위태로워진다는 격언도 들어보지 못했단 말인가.
심히 불만스러웠지만 또 토를 달았다간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기에 장관은 약자로서 본분을 따랐다.
“명을 받드오.”
유재현이 뒤를 돌아보자 각각 야명주 하나씩을 들고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칠병귀 조요상과 초검 양준이 냉큼 장관의 말을 복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