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8
제17화
급격히 어두워지는 노덕의 안색을 살핀 진천이 항의했다.
“초면에 추물이라니 너무 심하지 않소?”
콧방귀를 뀌더니 하수린이 쏘아붙였다.
“흥, 뭐가 심해. 그보다 더 심한 표현이 없어서 유감인데. 저 노물은 내가 가장 혐오하는 부류야. 싫다는 여인을 범해 강제로 아내로 삼은 것으로도 모자라 견디다 못한 그녀가 진실을 밝히려 하자 독약을 먹여 십여 년이나 식물인간으로 만든 악종이잖아. 그러고도 수시로 저항할 수도 없는 그녀를 희롱하고 괴롭혔다지? 끔찍해. 더러워. 너무 역겨워 생각만 해도 토악질이 날 지경이야. 그런 악귀에게 추물이라고 했기로서니 뭐가 문제야? 강호 물정에 어둡다더니 너는 저 노물의 정체를 모르는 거 아냐? 흥, 그렇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자에게 자기의 추악한 진면목을 알려 주었을 리가 없지.”
진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소문이 다 사실은 아니오. 어떤 일의 이면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있을 수 있고 여기 노 대인의 경우도 그러하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비난하는 것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오.”
하수린이 비웃음을 날렸다.
“한심하긴. 저 노물이 순진한 너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이제라도 정신 차리는 게 어때? 피해자가 피 맺힌 사연을 피를 토하며 직접 고백했어. 게다가 한 점 거짓도 없는 진실임을 스스로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증명했어. 더 이상 무슨 근거가 필요해?”
잠시 공백을 둔 뒤 진천이 반박했다.
“내막은 알려진 것과 다를 수 있소. 설사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실제로 벌어진 일임을 입증하지는 못하오. 온전한 진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비극의 다른 당자사가 가진 조각들도 맞춰 보아야 하오. 내가 아는 한 이분 역시 어긋난 인연의 희생자였을 뿐이오.”
그녀의 친위대들로서는 놀랍게도 하수린이 인내심을 발휘했다.
“좋아. 변명의 기회를 주지. 어디 한 번 그 내막이라는 걸 들어보자.”
진천이 노덕을 보았다. 노덕이 고개를 저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소이다. 나는 어떤 벌로도 만회가 불가능한 잘못을 저지른 죄인일 뿐이외다.”
하수린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흥,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래도 강호에서 오래 굴러먹은 생강답게 영악하군, 노물. 시답잖은 궤변을 늘어놓으면 이 자리에서 혀를 뽑고 심장을 도려내려고 했는데. 하지만 반성하는 척한다고 해서 용서해 줄 거라고 착각하지는 마. 모르면 모를까 내 손에 걸렸으니 그냥 보낼 순 없어.”
진천이 미간을 모았다.
“무슨 말이오?”
하수린도 아미를 찌푸렸다.
“몰라서 물어? 가여운 여인의 원한을 대신 갚아 주겠다는 거야. 죽이지는 않겠지만 살아 있는 게 더 고통스럽도록 만들어 주겠어.”
진천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그의 입에서 ‘그러지 말기를 바라오.’라는 말이 빠져나오기 전에 하수린의 경고가 먼저 작고 도톰한 입술에서 튀어나왔다.
“내 행사를 방해할 참이면 너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어쩔래?”
진천은 노덕의 앞에 섬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 * *
소미관 안의 공기가 바위로 변한 양 무겁게 내려앉았다.
오십여 명의 손님과 일곱 점소이는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상황을 주시했다. 그들은 진천이라는 청년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진즉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평범한 사내라면 대머리 무사가 괴이한 행동을 보였을 리도 없을뿐더러 하수린이 말을 섞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하수린의 말이 그들의 판단이 옳았음을 알려주었다.
“제법인데. 빈틈이 없어. 내 수하들이 자중한 것도 당연해.”
진천은 대꾸 없이 하수린을 응시했다.
“요새 도처에서 새로운 강자들이 출현한다는데 너도 그중 하나겠지? 사문이 어디야?”
“…….”
“신비한 척하기는. 너도 그 노물처럼 꽤나 뒤가 구린 모양이구나. 좋아, 설사 네가 어마어마한 배경을 가지고 있더라도 팔정포에서는 팔정파가 왕이야. 왕의 뜻을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지.”
하수린이 허리에 찼던 애병을 꺼내 들었다. 삼 장 길이의 푸른 채찍이 뱀처럼 바닥에 똬리를 틀었다.
침묵하던 진천이 입을 벌렸다.
“나는 싸우기 싫소.”
노덕은 그의 말이 진심임을 알고 있었다. 일전에 진천이 고량에게 일전을 청했을 때 창인의 무인들은 하나같이 놀란 기색들이었다. 나중에 조인상에게 물어보니 호전적인 성품과는 거리가 구만 리쯤 떨어진 진천이 먼저 싸우자고 나선 전례가 극히 드물었기에 그랬을 거라는 설명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조인상은 한 가지 사실을 귀띔해 주었다. 싸움을 꺼리되 일단 붙게 되면 진천은 불퇴전의 전사로 변한다고. 그것은 승부욕의 발로가 아니라 모친에게 했던 맹세 때문이라고 했다.
진천이 그의 발언에 황당해하는 하수린을 설득했다.
“우리는 싸울 이유가 없소. 노 대인에 대한 소저의 감정은 알겠으나 만에 하나 소저가 틀린 정보를 가지고 이분을 징치했음이 판명된다면 그 과오를 어찌 감당할 것이오? 시일이 지나 저간의 사연이 알려지게 되면 그때 가서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보오. 하니 노 대인과 나를 보내 주길 바라오. 우리는 가고 소저는 소저의 일을 보면 되는 것이오.”
하수린의 눈썹이 다시 갈매기가 되었다.
“늦었어. 내 청사편(靑蛇鞭)이 나오기 전이라면 몰라도 이제 와서 어물쩍 넘어갈 수는 없어.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노물보다 너에게 더 관심이 생겼어. 네 실력을 보지 않고 보내면 오랫동안 잠을 설칠 게 빤해. 그러니 너는 나와 싸워야 돼.”
“…….”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내 수하들은 끼어들지 않을 테니. 너와 나, 일대일의 대결이야.”
“…….”
“그래도 염려돼? 좋아. 네가 일백 초만 견디면 놔주지. 어때?”
“약속하는 거요?”
“호오, 자신 있는 모양이지? 좋아, 그럼 시작해 볼까.”
“잠깐.”
빙빙 돌기 시작했던 하수린의 채찍이 다시 잠잠해졌다.
“또 뭐야?”
진천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서는 곤란하오. 객잔에 괜한 피해를 주고 싶지 않소.”
“생긴 것과 다르게 참 꼼꼼하구나, 너는.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나중에 내가 다 보상할 테니. 됐지?”
“그렇다면 사람들이라도 내보냅시다. 자칫 비무가 격렬해지면 주변에 있다가 다치는 이가 나올지도 모르잖소?”
객잔의 객들이 일제히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는 싸움 구경을 못 하게 하려 들다니. 그 무슨 고약한 심보란 말인가. 그들로서는 다행스럽게도 하수린이 즉각 거절했다.
“보든 말든 그들 소관이야.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보고 싶은 자들은 그러면 되고 불똥이 튈까 겁나는 자들은 알아서 나가면 돼.”
중인은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했다. 하지만 이어진 하수린의 격앙된 목소리가 그들의 환호를 막았다.
“그리고 이건 비무가 아냐. 정의를 실행하려는 나와 그걸 방해하려는 너의 결투지.”
진천은 굳이 하수린의 규정을 정정하려 들지 않고 다른 요구를 했다.
“최소한 의자와 탁자라도 치우는 게 어떻소?”
진천을 노려보던 하수린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 피곤한 작자군. 기껏 투지를 끌어올렸는데 김이 다 샜잖아. 이게 마지막이야. 더는 군소리하지 마. 무조건 채찍을 갈길 테니까.”
하수린의 눈짓을 받은 팔 인의 친위대가 부지런히 기물들을 벽 쪽으로 몰았다. 곧 객잔 중앙에 삼백 평 넓이의 공간이 마련되었다.
“자, 이제 됐지?”
노덕이 구석으로 피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진천이 하수린을 마주 보며 포권을 취했다.
“한 수 배우겠소.”
하수린이 콧바람으로 응수했다.
“흥, 나는 널 가르치고 싶은 생각 없어. 무도한 늙은이를 편드는 자를 응징하려는 거지. 자, 덤벼.”
진천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 뿐 선공을 가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핫!
뾰족한 기합성을 터뜨린 하수린이 먼저 손을 썼다.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던 그녀의 채찍이 빛살의 속도로 진천에게 날아갔다. 이로써 향후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들 하남 무림 출신의 두 초신성 간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하수린의 채찍이 뻗고 휘고 꺾이며 현란한 곡선을 그렸다.
진천은 채찍의 움직임에 맞춰 이리 비틀고 저리 휘청거렸다. 채찍은 예측이 불가능한 궤도를 따라 제멋대로 날아다녔으나 진천의 불규칙한 발놀림은 신기하게도 그에 조응했다. 마치 채찍과 사람이 한데 어울려 춤을 추고 있는 듯 기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그러나 채찍의 위력은 진짜였다. 창두(槍頭)처럼 생긴 채찍 끝이 바닥을 찍을 때마다 목판이 쩍쩍 갈라졌다. 철갑을 두르지 않은 한 적중되는 순간 몸이 찢어질 것임은 명약관화했다.
휘이잉.
기이한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하수린의 청사편이 전권을 완벽히 장악했다. 그럼에도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진천의 신형을 잡아채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진천 역시 채찍을 완전히 뿌리치지 못하고 피하기에 급급했다. 주도권을 쥔 쪽은 하수린이었다.
순식간에 삼십여 초가 지났다.
두어 차례 채찍에 돋은 세침에 목덜미를 스치는 아찔한 순간이 있었지만 절묘한 보법을 선보이며 진천이 조금씩 하수린과의 거리를 좁혔다. 반격을 가하려면 최소한 그녀의 이 장 이내로 들어가야 했다.
원거리가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함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하수린은 적극적으로 진천을 제지하지 않고 접근을 허용했다. 진천은 그녀에게 근접전에 대비한 비장의 수가 있음을 짐작했지만 그대로 달려들었다.
전신을 휘감아 오는 채찍을 아슬아슬하게 흘려 낸 진천이 자세를 낮춘 후 단숨에 도약해 하수린을 들이받았다. 원시적인 수법이었지만 채찍을 무기로 부리는 이에겐 매우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진천의 예상대로 하수린에겐 대책이 있었다. 놀랍게도 하수린은 그녀에게 돌진해 오는 진천에게 어깨를 부딪침으로써 맞불을 놓았다. 마지막 순간 진천은 상체를 틀어 충돌을 피했다. 스쳐 지나가는 찰나 두 사람은 주먹과 발길질을 교환했다. 하수린의 권공은 진천의 머리카락을 훑었고 진천의 각법은 그녀의 옷자락을 때렸다.
떨어지자마자 몸을 회전한 진천이 재차 그녀에게 붙었다. 둘둘 말린 하수린의 채찍이 방패가 되어 그의 수공을 차단했다. 그러더니 채찍이 펴지며 진천을 밀어냈다. 진천은 무리하지 않고 흐름에 따라 거리를 벌렸다.
하수린은 공세를 취하지 않고 채찍을 거두었다. 진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백 초가 지났소?”
하수린의 동공에서 불꽃이 일었다.
“내가 우스워?”
진천은 그녀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목전의 여인은 그가 만난 이들 중 두 번째로 강한 사람이었다. 아타족의 청면(靑面)괴인보다는 약했지만 무림의 유명한 고수라는 금강권 고량보다는 윗길이었다. 그런 강자를 어떻게 우습게 여길 수 있겠는가.
진천에게서 대답이 없자 불이 난 듯 하수린의 뺨이 붉어졌다.
“저 늙은이에게 한눈팔지 마. 내 수하들은 이 대결이 끝날 때까진 절대로 그 노물에게 손대지 않을 테니까.”
“…….”
“지금까지의 초수는 무효야. 너도 나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
“미리 말하지만 이제부터는 전력을 쏟아 내야 할 거야. 왜냐하면 나는 생사투에 임할 작정이니까. 어설프게 굴다가 네가 죽어도 난 몰라.”
“꼭 이래야 하오? 소저와 나는 서로 아무런 원한도 없잖소?”
“강호초출이라니까 이 누님이 친절하게 알려 주지. 무인이 만나면 은원과 상관없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경우가 있어. 지금이 바로 그런 때야. 이유 따윈 필요 없어. 그냥 운명이야.”
하수린이 발산하는 맹렬한 투기(鬪氣)가 객잔을 가득 채웠다.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치 살벌해진 공기를 감당치 못한 사람들이 슬며시 객잔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많은 이가 그들의 선도에 따라 문으로 몰려갔다. 객잔에 남아 있는 자는 하수린의 친위대를 제외하면 열 명 남짓에 불과했다.
철천지원수와 마주친 듯 살기까지 뿜어내는 하수린의 옥용을 묵묵히 바라보며 진천이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