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80
제179화
흩어지길 바라지 않던 장관의 뜻은 이루어졌다.
배장이 질러대는 원초적인 비명과 형의 고통을 끝내주기를 촉구하는 배단의 악다구니가 ‘그’를 부른 것이었다.
그의 도래를 제일 먼저 알아차린 이는 오재현이었다. 무언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접근하고 있음을 감지한 오재현은 인상을 잔뜩 구겼다. 희미한 야명주의 빛을 받은 그의 면상이 흉신악살처럼 보였다.
막 동혈을 떠나려던 삼인은 멈칫했다. 오랜 경험으로 두목의 표정이 위기가 닥쳤음을 알리는 이상 징후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왜 그러…….”
장관은 질문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별안간 오재현이 팔을 휘두른 탓이었다. 오재현의 소매에서 어린아이 새끼손가락 크기의 은빛 비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백 개의 은린(銀鱗)들은 어둠 너머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그 직후 하나의 인영이 중인의 시야에 들어왔다. 장관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하, 하남…….”
장관은 이번에도 뒷말을 잇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머리는 당장 도망치라고 윽박질렀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장관의 엉덩이가 땅에 닿기도 전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쇄도하는 진천을 향해 입으로 필살기인 섬광구(閃光球)를 쏘아 냈던 유재현은 절멸비에 복부를 맞고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칠병귀와 초검은 병기에 손을 얹긴 했지만 아무것도 못 해보고 진천에게 혈도를 제압당했다. 온전한 이는 본능적으로 무저항을 택한 장관뿐이었다.
달려오면서 순식간에 장내를 정리한 진천이 장관 앞에 내려앉았다. 진천은 단박에 전후 사정을 파악했다. 남천도왕은 반 년 전 사벌에 투신한 백도방 잔당들을 창인에 파견한 것이었다.
일곱 달 전 배수의 백도방을 집어삼키며 마령 문가는 백도방 총관 사구득을 앞잡이로 내새웠다. 사구득은 방주인 오재현이 저지른 패악들을 고발하며 마령 문가에 그를 징치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의 청을 받은 마령 문가는 정의를 실현한다는 구실로 배수에 일곱 명의 검호를 보냈다. 마도나 사파라면 그냥 먹어치웠을 테지만 명색이 정파였기에 마령문가로서도 최소한의 명문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해도 눈 가리고 아옹 하는 격이 아닐 수 없었다.
졸지에 백도방을 빼앗기고 쫓기는 신세가 된 오재현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절정 급의 부하 한 명 없이 마령 문가에 맞서려는 건 이란격석에 다름 아니었다. 오재현은 어쩔 수 없이 오래전부터 그를 탐냈던 사벌로 향했다. 전날 철곤귀에게 당한 부상에서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폐인으로 전락한 광객 이주한을 뺀 백도삼흉이 그의 뒤를 따랐다. 방주와의 의리 때문이 아니라 마령 문가가 그들을 거두어 줄 리 만무해서였다.
사벌은 암기공의 대가이자 중립지대 십대고수의 일인으로 자타가 공인했던 오재현을 우대했다. 사벌에 들자마자 북명각주로 임명되며 사령 위에 오른 오재현은 사패의 중립지대 침공 시 진포(鎭浦)와 영화(英華)에서 벌인 잔인한 행각으로 악명을 떨쳤다. 은린폭우(銀鱗暴雨)를 펼쳐 진포 정무관(正武館)과 영화 삼산파(三山派)의 무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함으로써 그는 몰살도 곽건이 수호보에서 저질렀던 만행을 재현했다. 오재현의 행태를 두고 마령 문가에 대한 간접적 복수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았다. 정무관과 삼산파는 둘 다 수호보처럼 정파를 지향하던 방파들이었다.
바닥에 착지한 진천은 아랫배에 절멸비가 꽂힌 오재현을 일별했다.
그와는 결국 악연으로 끝나는 셈이었다. 씁쓸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오재현이 마령 문가와의 구인결 당시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그 이후의 상황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를 비롯한 삼보장의 인사들은 전날의 언약에 매여 백도방을 도와 마령 문가와 대립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랬다면 전혀 다른 국면이 펼쳐졌을 것이었다.
진천은 오재현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에 대한 감상에 젖어있을 겨를이 없었다. 도마에 오른 생선처럼 펄떡거리며 끔찍한 비명을 토해내는 ‘큰 배씨 아저씨’를 구해야 했다.
배장을 혼절시킨 진천은 두 가지 동작을 동시에 수행했다. 좌수에서 뻗어낸 절멸비로 배장의 무릎 위를 자르며 우수의 검지로 지풍을 날려 배단의 혈도를 풀어준 것이었다.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배단은 형을 내버려 두고 장관에게 달려들었다. 장관은 배단보다 상위의 고수였으나 진천의 등장으로 얼어붙은 탓에 꼼짝없이 턱을 걷어차이고 말았다.
장관을 쓰러뜨린 배단이 칠병귀의 허리춤에 걸려있던 삭도(削刀)를 뽑아들었다. 오재현과 백도삼흉의 낯빛이 새파래졌다.
“제발 살려주시오.”
장관의 간청에 그의 목을 치려던 배단이 멈칫했다. 그러고는 배장의 절단 부위를 지혈하고 있던 진천을 돌아보았다.
“말리지 마라, 천아.”
진천은 침묵으로써 배단의 행사를 용인할 것임을 알렸다.
배단은 우선 그와 형의 생니를 뽑아버렸던 칠병귀의 턱을 박살 냈다. 그러고는 돌연 삭도를 내려놓았다. 장관은 의아했다. 설마 우리를 살려주려는 것일까. 장관은 곧 의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배단이 그의 품을 뒤지자 아연실색한 장관이 소리쳤다.
“안 돼!”
마혈이 찍히지 않았기에 장관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진천의 지풍에 팔다리가 굳어버렸다. 저항불능이 된 장관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배단이 그에게서 화룡타가 든 병을 빼앗았다. 백도방 사인의 얼굴이 공포로 질렸다.
“그냥 죽여라, 이놈아.”
장관이 부르짖었다.
병마개를 뽑으며 배단이 대꾸했다.
“여기는 관용과 용서의 땅이지만 원래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는 오직 하나의 율법만 존재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나는 창인의 백성이되 오늘만큼은 그 시절의 악귀로 돌아가련다.”
병에서 흘러나온 싯누런 액체가 발등에 닿자 장관은 졸도했다. 배단은 혈도를 짚어 그를 강제로 깨웠다.
절멸비에 단전이 깨지고 내장이 파열된 오재현이 엉금엉금 기어가며 도망을 시도했다. 성큼성큼 그들 뒤쫓아 간 배단이 가차 없이 화룡타를 쏟아부으려다 오재현의 이가 멀쩡한 걸 보고는 턱부터 망가뜨렸다. 자진의 기회를 상실한 오재현은 화룡타가 선사하는 지옥의 극통을 경험해야 했다. 초검과 칠병귀의 다리에도 화룡타를 떨어뜨린 배단이 삭도를 주워들었다.
묵묵히 배단을 지켜보고 있던 진천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지 마세요, 아저씨.”
낮은 음성이었지만 백도방 일파가 쏟아내는 비명의 합창을 뚫고 배단의 귀에 들어갔다. 삭도를 제 목에 갖다 댄 배단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너를 볼 자격이 없다, 천아. 나는 이자들에게…….”
배장에 대한 응급처치를 마친 진천이 몸을 일으켰다.
“아저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 괜한 짓 말고 칼 내려놔요.”
삭도를 빼앗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진천은 손을 쓰지 않았다. 생과 사의 결정은 배단 자신의 선택이어야만 했다.
진천이 다가가자 배단의 손에 힘을 주었다. 시퍼런 칼날이 파고 든 그의 목에서 피가 흘렀다.
“그러면 아저씨를 두고두고 원망할 거예요.”
배단이 울먹거렸다. 걸음을 재개한 진천이 그에게로 가서 삭도를 잡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가요, 아저씨. 상처가 덧나기 전에 큰 배씨 아저씨를 공 할아버지께 데려가야죠.”
삭도를 떨군 배단이 진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배단은 기절초풍했다. 그와 배장을 양 팔에 안은 진천은 밀림으로 들어가지 않고 수목의 바다 위를 새처럼 날고 있었다. 전날 중원에 갔다 온 장초에게서 진천의 무위가 일취월장했음을 전해 들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배단은 너무 놀라 탄성조차 나오지 않았다.
지하미로를 나온 지 일 각도 지나지 않아 창인에서 칠십여 리 떨어진 나무족의 숲에 이른 진천은 마을 입구에 떨어져 내렸다. 배단이 진천에게서 형을 받아들었다. 세 사람이 마을로 들어서자 진천을 발견한 몇몇 이족이 환호성을 질렀다. 진천은 나무족을 포함한 밀림의 부족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외인이었다.
금방 수백의 이족들이 진천을 둘러쌌다. 형을 들춰 업은 배단이 요령껏 사람들의 벽을 빠져나갔다. 요란한 환영인파에 파묻힌 진천은 일일이 그들의 인사에 답했다. 잠시 후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나와 포위를 풀어주었다.
노인의 호통에 수백의 인파가 썰물처럼 물러갔다. 쓴웃음을 지은 진천이 노인에게 이족의 언어로 인사했다.
노인은 나무족의 족장인 디안이었다. 그는 진천이 허 노야와 더불어 마음속의 스승으로 삼은 이였다.
디안과 인연을 맺은 것은 구 년 전이었다. 수맥의 지배권을 두고 창인의 여러 패거리들이 치고받느라 피가 마를 날이 없던 시기였다. 당시 장초를 중심으로 하는 대왕파(大王派)에 속해있던 진천은 우연히 제천파(制天派)로부터 나무족을 구해줌으로써 그들의 은인이 되었다.
거창한 명칭과는 달리 제천파는 녹림과 흑도 출신으로 이루어진 오합지졸들이었다. 그들의 밀림 행은 쟁투에 참가할 힘이 없었기에 택한 궁여지책이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뒈지나 마찬가지라면 이족의 계집들을 품고 떠날 가능성이라도 있는 밀림으로 가는 게 낫겠다고 여긴 제천파 일당은 운 좋게 밀림에 득시글대는 독충과 독사에 당하지 않고 나무족의 숲에 이르렀다.
다른 이들과 달리 독물에 구애받지 않고 수시로 밀림을 드나들던 진천은 수림 초입부터 전에 없던 부주의한 훼손이 이어진 걸 보고는 뒤를 쫓았다. 밀림의 이족들이라면 절대로 남기지 않았을 흔적이었다. 그 자취는 진천을 나무족의 숲으로 이끌었다.
진천은 제천파에 의해 몰살의 위기에 직면했던 나무족을 극적으로 구원했다. 일천에 가까운 나무족은 고작 열 명 남짓한 침략자들에 일방적으로 밀리며 누란지위에 처해 있었다. 날붙이가 없는 그들의 무기로는 하급이라고는 하나 무술을 익힌 데다 도검으로 무장한 무사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전장에 뛰어든 진천은 순식간에 십삼 인의 악도를 때려눕혔다. 아직 열 살도 되기 전이었으나 누구도 제대로 된 상승무공을 익힌 그의 삼초지적이 되지 못했다. 흉악한 이리 떼를 쓰러뜨린 맹호가 숨어있는 양떼를 향해 괴상한 손짓발짓을 하자 그것이 친선의 의사표시임을 알아차린 어느 노인이 앞으로 나왔다. 그가 디안이었다.
그날 이후 진천은 밀림의 수호자가 되었다. 창인의 패권 다툼에서 밀린 패잔병들이 밀림에 들어가 만행을 벌일 때마다 이족들로부터 연기 신호를 받은 그가 출동해 그들을 진압했다. 진천은 열 살 무렵 이미 창인을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로 성장한 데다 신기에 가까운 돌팔매질을 구사했기에 일당백의 전사로 손색이 없었다.
진천이 삼사 년 간 이족들과 쌓은 신뢰는 지하미로를 피로 물들였던 환란이 종식된 후 허 노야의 제안으로 시작된 새로운 창인의 건설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밀림의 부족들은 기꺼이 창인으로 와서 집을 짓고 길을 닦는 데 힘을 보탰다. 그 중 일부는 아예 창인에 눌러앉기도 했다. 그런 이들의 수가 점점 불어나더니 종래에는 창인 인구의 구 할이 밀림에서 온 이족으로 채워졌다.
벗어진 정수리부터 뾰족한 턱까지 지렁이 같은 주름들로 덮인 노인이 검지를 뻗어 진천의 가슴에 댔다. 진천도 똑같은 동작을 취했다. 영혼을 나눈 벗들끼리 나누는 나무족의 인사법이었다.
진천은 디안의 말에 위안을 받았다. 목전의 노인은 그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디안이 진천의 손을 잡아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