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83
제182화
감정을 추스른 진천은 질문으로 응수했다.
“사선이요? 그게 뭐죠, 할아버지? 그런데 오른쪽 눈에는 없나요? 그럼 불행 중 다행인 건가요?”
진천의 기대와 달리 공 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농담할 문제가 아니다.”
공 노인의 엄한 표정에 진천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알아요, 할아버지. 설명해 주세요.”
잠시 진천을 바라만 보고 있던 공 노인이 침중한 음성을 뱉어내었다.
“사선은 사신(死神)의 왕림을 알리는 징조다. 수명이 다해 늙어죽는 이에겐 거의 보이지 않지만 불치의 병을 얻어 죽음을 코앞에 둔 자들에겐 열에 서넛 꼴로 나타나는 몹쓸 신호야.”
“그렇군요. 저는 제 눈에 그게 생긴 줄도 몰랐어요.”
“선이라곤 하지만 실제로 줄이 그어져 있는 건 아니다. 뭐랄까,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 일시적으로 올라왔다 사라지니까.”
“그럼 할아버지만 볼 수 있다는 건가요?”
“꼭 그렇지는 않다. 이 방면으로 공부가 깊은 의원이라면 웬만하면 알아차릴 수 있을 게야. 하지만 그들도 눈을 가까이 대고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잡아내지 못할 게다. 오히려 오해하기 십상이지.”
“할아버지는 어떻게 한 번에 발견하셨나요?”
“그야 너를 아니까 그랬지. 너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기(死氣)를 두르고 있었느니라.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호랑이만한 표범을 가볍게 쫓아버릴 정도로 강한데다 열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치유불능의 중병에 걸려 목숨이 오락가락 하는 이나 가질 법한 기운을 눈에 담고 있다니. 하지만 얼마 후부터 갑자기 사기가 사라지더니 이내 보이지 않더구나. 이제야 말하지만 나는 헛것을 보았다고 여기고는 내가 노망이 든 줄 알았느니라. 그때 얼마나 실의에 잠긴 줄 아느냐?”
진천은 쓰게 웃었다.
공 노인과 최초로 조우했던 시기는 독정의 주입이 끝난 직후였다. 진천은 다섯 살부터 오 년에 걸쳐 이사부가 조제한 환약(丸藥)을 주기적으로 복용해야 했다. 천우신단(天宇神丹)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였지만 독물(毒物) 덩어리에 다름 아니었다. 알약을 먹을 때마다 진천은 심장이 찢어지고 기맥이 뒤틀리는 지옥의 극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 지금 다시 그 사기가 나타난 거군요? 그때보다 훨씬 뚜렷하게.”
진천의 질문에 공 노인이 뜻밖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 반대다.”
진천은 어리둥절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문자 그대로 그 반대란 말이다, 녀석아. 네 눈엔 지금 생기가 기름을 끼얹은 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느니라. 그 불속에 사신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게 문제지만.”
진천은 공 노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촛불은 꺼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몸을 불살라 가장 환해지는 법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지난 몇 년 간 간혹 네게서 미미하나마 사기가 피어오를 때가 있었다. 무공을 극한으로 수련하는 자들이 일시적으로 그런 현상을 보인다고 들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다. 몇 마디 잔소리는 했던 듯싶지만.”
진천은 공 노인이 지나가는 그를 붙잡고 뜬금없이 지나친 수련은 독이 될 수 있음을 주지시켰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더라도 네겐 유별난 죽음의 기운이 늘 따라다녔다. 딱히 처방할 방도가 없는지라 몹시 신경이 쓰이면서도 나로서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구나. 그런 증상을 보이는 이들은 대체로 요절한다지만 예외도 있으니 네가 거기에 속하길 바랄 밖에. 실은 늘 안쓰러웠더랬다. 너처럼 재주가 특출한 데다 심성마저 비단결 같은 아이가 단명 한다면 얼마나 속상한 일이겠느냐? 그렇다고 네 명이 그리 길지 않은듯하니 남은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충고를 할 수도 없었다. 너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 매 순간 충실히 사는 아이였으니.”
“저를 아껴주셔서 고마워요, 할아버지.”
“고맙긴, 이 녀석아. 너는 내 생명의 은인이 아니냐. 몇 번째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만.”
“일백오십팔 번째예요.”
“그런 쓸데없는 숫자는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왜 네 왼눈에 사선이 그어져 있는 게냐? 일백을 넘은 나도 이토록 팔팔한데 아직 스물도 안 된 녀석이 어쩌다가…….”
애초의 질문으로 돌아간 공 노인이 말끝을 흐렸다. 진천은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다.
얼마간의 침묵 후 진천이 입을 열었다.
“아마 제 몸에 든 독 때문일 거예요, 할아버지. 그게 초라면 제가 익힌 심공이 심지가 되겠네요. 둘이 만나 제 수명이 타들어간 듯싶어요.”
“독이라니? 그리고 심공이라면 어떤 심공을 말하는 게냐? 설마 힘을 얻는답시고 몸을 망가뜨린다는 마공은 아닐 테지?”
너무나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기에 진천은 고소를 짓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제 이사부가 중원에서 마의(魔醫)라고 불렸다는 건 아시죠, 할아버지?”
“그래. 천하에 둘도 없는 악종이라면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신성한 의(醫)에 살육과 파괴를 본성으로 하는 마(魔)를 붙이다니 상종해서는 안 되는 종자였던 게지. 그런 놈은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져야 하느니라.”
공 노인이 거리낌 없이 악담을 퍼부었다.
진천은 쓰게 웃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 노인과 이사부는 ‘상종’한 적이 없었다. 그랬다면 서로를 경원시했으리라.
“제 이사부는 역천기결이라고, 상궤를 벗어나는 심공을 창안했어요, 할아버지. 그리고 그 심공의 운용에 필요한 영약을 만들어 제게 주었어요. 영약이라기보다는 독정(毒精)이라고 해야 옳겠지만. 저는 그 독정을 심장에 담아야 했어요.”
공 노인이 질문 공세를 퍼붓기 전에 그에게 역천기결의 운공법과 요체를 간략하게 알려준 진천은 생환결에 관해서는 보다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중원에 나가 몇 차례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면서 생환결을 여러 번 사용해야 했어요. 경이로운 속도로 부상이 치유되고 공력도 크게 증진되었지만, 그 대가로 수명이 단축된 모양이에요.”
공 노인이 가지런히 뻗은 백미를 찌푸렸다.
“역천(逆天)이라니, 그놈이 일말의 양심은 남았던 게로구나. 이름을 제대로 붙인 것을 보니. 아니면 하늘도 우습게 볼 만큼 광오(狂傲)했던 겐가? 자고로 천리를 거슬러 끝이 좋은 법은 없느니라. 하여간 정녕 천하의 말종(末種)이로다. 제 악업을 애꿎은 제자에게 떠넘기다니.”
진천은 속이 쓰렸다. 이사부는 실제로 그를 실험대상으로 삼았었다. 설사 독정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가 사망했더라도 이사부는 자신의 역작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아쉬워할 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을 것이다.
“역천기결인지 뭔지는 백날 들어봐야 이해난망이니 네 심장에 들었다는 독정에 대해서나 자세하게 말해보려무나. 네 이사부란 놈이 무슨 독을 어떤 방식으로 썼다더냐?”
진천이 머뭇거리자 공 노인이 재촉했다.
“어서 말해보래도. 혹시 아느냐? 내가 도움이 될지.”
“저는 독정에 구체적으로 어떤 독들이 담겼는지 알지 못해요, 할아버지. 조제 방식은 더더욱 모르고요.”
“뭣이? 그놈이 네게 알려주지 않았단 말이냐?”
“네.”
“허어, 이런.”
공 노인의 만면에 실망감이 드리웠다.
진천은 사제지간의 정이라고는 먼지 한 톨만큼도 느낄 수 없었던 이사부의 냉막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일사부의 행복뿐이었다. 역천기결과 독정 역시 일사부의 간곡한 청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모친이 애원을 했어도 결코 진천에게 전하지 않았을 터였다.
“제가 아는 거라곤 천우신단, 그러니까 독정에 들어간 독물이 총 팔십여 종이라는 것과 독충이나 독사의 독이 들어가지 않고 독초로만 이루어졌다는 정도예요, 할아버지.”
그나마도 이사부 사후 일사부가 귀띔해준 덕분에 알게 된 내용이었다. 일사부도 그 이상은 알지 못했다.
진천의 말에 공 노인이 혀를 찼다.
“츳, 그래서야 아무런……. 아니다, 아주 없는 것보다야 낫지. 아니, 나은 정도가 아니라 잘 하면 해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공 노인이 돌연 의욕을 보였다.
“팔십여 종이라고 했느냐? 거기에 그게 다 독초라고? 그놈이 중원에서 그것들을 갖고 오진 않았을 테지?”
“네, 할아버지. 아마도 전부 밀림에서 구했을 거예요.”
공 노인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독초라고 하지만 대부분 약초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풀들일 게다. 예컨대 이족들이 ‘잉까’라고 부르는 풀은 멋모르고 먹으면 즉사를 면치 못하지만 잘만 쓰면 간장병에 특효약이 되기도 하거든. ‘조밧’의 잔뿌리도 심장을 멈추게 할 수도 있지만 복용량에 따라 굉장한 정력제가 된단다.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렇군요.”
“그렇다마다. 독과 약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게야. 인정하긴 싫지만 네 이사부란 놈은 제법 솜씨가 있었던 게지. 네 심장에 든 독정은 너를 죽이는 대신 무력증강에 크게 일조했으니 천고의 영약이 된 셈이야. 다만 생환결이라는 게 잠재되어 있던 독성을 촉발시켰을 게다. 하지만 이독제독이라지 않더냐? 무엇을 어떻게 얼마만큼 썼는지를 알아내면 독기를 중화시키는 방법도 찾아낼 수 있을 게야. 공력이 감소하거나 심한 경우 아주 잃을 수도 있겠지만, 생명이 우선이 아니더냐?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물론이에요, 할아버지.”
“그래, 한 번 해보자꾸나. 불로장생의 영단이나 만병통치약에 대한 꿈은 버렸다만 네 병 하나 치료하지 못하겠느냐? 내, 무선(武仙)보다 귀하다는 약선(藥仙)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해독제를 만들어보마.”
“고마워요, 할아버지.”
진천은 진심으로 공 노인에게 감사했다.
“오늘, 아니 지금부터 당장 시작하자꾸나. 큰소리는 쳤다만 쉽지는 않을 게야. 시간도 상당히 소요될 테고. 네 과도한 생기가 급격히 사그라지기 전에 서둘러야 하느니라. 우선 ‘찌앙’과 ‘꼰따’에 대한 반응부터 알아보자꾸나. 둘 다 중독에 응급처방으로 쓰이는 약초들이란다. 그런 연후…….”
진천이 난색을 표하며 공 노인의 말을 막았다.
“죄송하지만, 할아버지. 저는 바로 중원으로 가봐야 해요.”
“뭐라? 안 된다, 이 녀석아. 아무리 급한 사정이 있어도 네 목숨보다 중한 일이 어디 있더냐? 잔말 말고 나와 함께 이곳에 머물며 치유에 전념하자꾸나.”
공 노인이 진천의 팔을 잡아끌었다. 진천은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진지하게 물었다.
“제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
입술을 깨문 진천을 본 공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어이 고집을 부릴 요량이구나?”
“죄송해요, 할아버지.”
“대체 중원에 무슨 일을 두고 왔기에 그러느냐? 까딱 실기했다간 천추의 한을 남길 터. 갑작스레 상태가 악화되면 손써볼 여지도 없이 저세상으로 떠나게 될지도 모르는데 부득부득 가려느냐?”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걸려 있어요, 할아버지. 잘하면 제가 그들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안 될 수도 있지만 시도는 해보려고요. 혹시라도 늦기 전에 일이 잘 풀리면 다시 돌아올게요.”
공 노인은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진천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일백 세 노인임에도 아직 붉은 윤기가 흐르는 그의 입술에서는 그 동작과 반대의 의미를 지닌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 만류는 여기서 접으마. 네가 입술을 깨문 이상 더 떠들어봐야 내 입만 아플 터이니. 다만 떠나기 전에 네 독정을 조금 남겨놓고 가거라. 그거라도 있어야지 연구하는 시늉이라도 해 볼 것 아니냐?”
쓴웃음을 지은 진천이 좌수에서 절멸도를 꺼냈다. 고드름 같았던 백색의 강기가 가늘고 뾰족해졌다.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진천이 침(針)으로 변용한 절멸도를 보고 있던 공 노인이 소리쳤다.
“잠깐!”
침을 심장에 찔러 넣으려던 진천이 멈칫했다.
“여기서 말고 창인으로 가서 꺼내려무나. 그곳의 내 거처에 옥관(玉管)이 있다. 북해 빙궁의 빙정으로 만든 기물(奇物)이니 꽤 오래 독정을 보존할 수 있을 게야. 간 김에 피도 좀 뽑자꾸나.”
“그래요, 할아버지. 꽉 잡으세요.”
진천이 공 노인을 안아들었다. 그러고는 공중으로 비상해 숲 위를 날았다. 진천의 품에 안긴 공 노인이 괴성을 내질렀다. 두려움에서 터져 나온 비명이 아니라 새로운 체험을 반기는 환호성이었다. 쇳덩이 심장의 소유자답게 공 노인은 태생적으로 공포에 둔감한 괴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