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86
제185화
죽림을 나온 진천은 청와옥으로 향했다.
하지만 열 발짝을 가기도 전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후 요란한 바퀴소리가 들리더니 두 마리 말이 끄는 소형마차가 삼보장의 대문을 들어섰다.
진천은 마차가 정지한 곳으로 걸어갔다. 그를 본 마부가 허둥지둥 마부석에서 내려와 허리를 접었다. 진천이 처음 보는 이였다. 그가 마부에게 인사를 하려는데 마차 문이 열리고 고량이 나왔다.
진천을 본 고량이 반색했다.
“양자호에서의 일이 잘 끝난 모양이구나.”
진천이 응답하기도 전에 차소영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고랑(高郎)!”
백와옥에서 뛰쳐나온 차소영이 한달음에 고량에게 달려왔다. 연인들은 서로를 손을 잡고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마차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온 이는 차소영만이 아니었다. 청와옥에서는 여상구와 대웅, 그리고 소중걸이 나왔고 백와옥에서는 노미현이 나왔다. 지하연무장에서도 가린과 명이 올라왔다.
모두들 마차로 몰려왔다. 고량이 아니라 진천을 보러. 마부는 슬그머니 말 뒤로 돌아가 숨었다.
반갑게 그를 맞이하는 친인들을 둘러본 진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노 대인은 어디에…….”
진천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노덕이 청와옥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무릎이 불편한지 그가 약간 절뚝거리며 마차 쪽으로 다가오자 진천은 그리로 갔다. 마부만 남고 다들 그의 뒤를 따랐다.
“설마 벌써 창인까지 다녀온 겐가?”
노덕의 질문에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인.”
노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만이 아니라 명을 제외한 모든 이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창인은 주안에서 직선거리로만 육천 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서신을 보냈던 금성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진천은 이틀 만에 일만 리가 넘는 길을 왕래한 셈이었다. 실로 믿기 힘든 일이었으나 아무도 진위 여부를 따지려들지 않았다. 진천이 거짓말을 할 이가 아니거니와 그에겐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믿어서였다.
중인의 궁금증은 따로 있었다. 여상구가 그들을 대표해 질문을 던졌다.
“마왕과 조우했다고 들었는데 그를 어떻게 따돌린 겐가, 아우님?”
즉답을 주지 않고 친인들을 둘러본 진천이 말했다.
“좀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잘 풀렸습니다, 형님. 고 형의 공이 큽니다.”
모두의 시선을 받자 고량이 머쓱해했다.
“네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급하게 나오느라 겉옷을 제대로 챙겨 입지 않은 노덕이 몸을 떨자 진천이 말했다.
“날이 쌀쌀하네요.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지요. 검선과 하 소저도 보고 싶군요.”
진천의 제안에 따라 모두들 청와옥으로 들어갔다. 가린과 명은 지하연무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진천이 잡았다. 강호를 울리는 명사들과의 합석이 부담스러웠는지 마부는 끝내 대접을 마다하고 마차를 몰아 삼보장을 떠났다.
일층의 다연실이 북적거렸다.
여상구의 부축을 받은 팽하연과 소중걸에게 매달리다시피 한 하수린이 차례로 다연실에 들어왔다. 너른 원형 탁자를 둘러싸고 있던 열두 개의 의자가 꽉 찼다. 가린이 두 개를 차지한 탓이었다.
주전자를 든 노미현과 대웅이 막 끓인 작설차를 좌중의 찻잔에 골고루 따랐다. 차를 마시지 않는 가린은 냄새가 싫지 않은지 검붉은 색깔의 찻물을 들여다보며 코를 킁킁거렸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명은 인상을 쓰며 찻잔을 멀리 밀어냈다.
차 시중을 마친 대웅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진천에게 물었다.
“건이 놈은 어떻게 됐어, 천?”
중인의 절반 이상이 부지불식간에 몸을 떨었다. 일곱 달이나 지났지만 전날 곽건이 삼보장에서 남긴 인상은 그만큼 강렬하고 사악했다.
“그는 단전이 깨졌다.”
간단명료한 대답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랬구나.”
대웅의 반응이 미진하다고 여겼는지 고량이 감상을 밝혔다.
“잘 했다, 천. 공력을 잃었으니 그 야차 같은 놈은 이제 끝장났다고 봐야겠지? 그놈의 칼에 숨진 수호보의 원혼들을 대신해 네게 감사한다.”
고량에 이어 하수린과 여상구 등이 진천의 과업을 치하했다.
진천은 여상구의 청에 따라 곽건과의 비무를 친인들에게 들려주었다. 여상구가 이마주름을 잡았다.
“허어, 놀랍구먼. 그자가 격격쇄까지 구사했다니. 아우님보다는 못하지만 가히 엄청난 무재가 아닌가. 더 크기 전에 싹을 밟아서 다행일세. 이번에 제거하지 않았으면 두고두고 우환거리가 되었을 걸세.”
진천은 동감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곽건이야말로 진정한 괴물이었다. 그가 온전히 성장했다면 미래에 그를 감당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을 터였다.
“남천도왕이 길길이 날뛴 것도 이해 못 할 바가 아니구먼. 코앞에서 제 후계자가 폐인이 되는 꼴을 보았으니 눈이 뒤집힐 만도 했을 테지.”
진천은 의형의 말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남천도왕의 암습은 곽건의 부상과는 무관했다. 그는 애초부터 그럴 작정이었을 터였다.
진천은 마왕의 출현과 그와 벌였던 추격전에 대해 설명했다. 이야기 말미에 가서 진천이 고량에게 고개를 돌렸다.
“늦었지만 내 외조부께서 오신 덕분에 흑사천에서 마왕을 쫓아버릴 수 있었소. 당시 나는 하천가 아래에 은신해 있느라 그분의 도래를 알지 못했소만. 그런데 어떻게 내 서신을 외조부께 전할 수 있었소? 나는 아까 권왕 어르신을 뵙기 전까진 고 형이 실패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오.”
고량이 씁쓸히 웃었다.
“고생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나도 애를 먹긴 했다. 네가 이른 대로 정맹에 들자마자 집법단주를 찾았다. 네 심부름으로 왔다고 하니까 금방 만나주더구나. 집법단주에게 맹주님을 면담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북천도왕께서 정맹에 계시지 않는다지 뭐냐. 혹시 집법단주가 내용을 밝히지 않는 것을 괘씸하게 여겨 어깃장을 놓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는 맹주가 반드시 아셔야 하는 긴급사항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랬더니 버럭 화를 내더구나. 자기를 거짓말쟁이로 여긴다면서. 그에게 사과하고 간청했다. 어떻게든 맹주님을 뵈어야 한다고. 도와주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미리 준비해 둔 양 일사천리로 말을 쏟아낸 고량이 차로 목을 축였다.
“솔직히 네 이름을 팔긴 했다. 그랬더니 적극적으로 나서더구나. 집법단주는 맹주님이 그날 아침 원주로 떠났다고 했다. 나흘 후에야 돌아오실 예정이라면서. 네가 지정한 날짜까지는 채 이틀도 남지 않아 마음이 급해진 나는 원주로 가기로 했다. 다행히 집법단주가 정맹의 용호기(龍虎旗)를 단 특급마차를 내주어 원주까지 한 번의 검문도 받지 않고 내달릴 수 있었다. 다음날 밤 원주에 당도한 나는 시한에 임박하긴 했지만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거라 믿어 비로소 안도했다. 하지만 다 와서 문제가 생겼다.”
진천은 듣지 않고도 알 것 같았다. 십중팔구 외조부에게 이르기 전에 강가의 그물에 걸렸으리라.
“원주에 들어서고 반각도 지나지 않아 강가의 무인들이 달려 나왔다. 내 용무를 듣더니 기다리라고 하더구나. 시간이 아까웠지만 나로서는 그들의 지시를 따르는 것 외엔 방도가 없었다. 설사 내상을 입은 상태가 아니었다고 해도 내 무력으로 뚫고 나갈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으니까. 얼마 후 몇몇 사람이 내가 억류된 곳으로 왔다. 절정 급의 고수들이었지만 내가 아는 이들은 없었다. 내가 북천도왕 어르신을 친견하기를 청하자 일언지하에 불가하다고 답하더구나. 마침 네가 시한으로 제시했던 자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조급해진 나는 모험하기로 했다. 그들에게 북천도왕께 전할 네 서신을 갖고 있다고 했지. 그랬더니 달라고 하더구나. 안 된다고 했다. 실랑이가 오가던 중 나는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것임을 깨달았다.”
결정적인 대목에서 고량이 말을 끊자 손에 땀을 쥐고 경청하던 중인이 일제히 비난의 눈길을 쏘아보았다. 따가운 눈초리에 고량은 집어 들었던 찻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나는 애가 탔다. 늦어도 그날 자시까지는 북천도왕께 서신을 전해주어야 한다던 네 목소리가 귀에 울리더구나. 그 순간 퍼뜩 너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보았다. 소란을 피우기 직전이었던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신을 그들에게 내주었다. 그러고는 꼭 북천도왕께 전달해달라고 요청하고 마차를 타고 떠났다.”
싱거운 결말에 여상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허, 그게 단가? 그럴 거면 처음부터 건네주지 그랬나? 그랬다면 북천도왕 어르신이 제때 도착해 아우님이 곤경에 처할 일도 없었을 것을.”
고량이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소, 여 공. 나는 그들을 믿지 않았소. 강가는 천이에게 우호적이지 않잖소? 결과적으로는 내 판단이 옳았소. 그자들은 내가 준 서찰을 북천도왕 어르신께 전하지 않았소.”
“그럼 어떻게 그 어른께 양자호의 일을 알려드렸단 말인가?”
“나는 원주 외곽에서 마차를 보냈소. 혹시 감시하는 눈들이 있을지 몰라 풀숲이 우거진 곳에서 몰래 마차를 빠져나온 나는 다시 원주로 잠입했소. 무사들이 순찰을 돌긴 했지만 원주 내부를 가로지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소. 하지만 강가촌에 접근해감에 따라 점점 경비가 삼엄해졌소.”
“용케도 경비망을 돌파했구먼.”
“그렇지 않소. 내 능력으론 역부족이었소.”
“허면 무슨 수단으로 그 어른께 다가갔다는 겐가?”
여상구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고량이 진천을 보았다.
“너는 알 수 있을 테지, 천? 너라면 어떻게 할지를 염두에 두고서 쥐어짜낸 방책이었으니까.”
진천은 쓰게 웃었다. 그에겐 너무 쉬운 문제였다. 기실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외조부에게 가까이 갈 수 없으니 그분이 오도록 만들었던 듯싶소만.”
고량이 감탄했다.
“역시!”
이마에 갈매기 눈썹을 그리고 있던 하수린이 끼어들었다.
“뭐예요. 둘만 알지 말고……, 아!”
말하던 도중에 고량이 취한 방도를 알아차린 하수린이 손뼉을 쳤다.
“소동을 일으킨 거군요. 북천도왕께서 감지할 수 있도록.”
고량이 마무리를 지었다.
“그렇소, 하 소저. 나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소. 하남신룡이 전하는 급보를 북천도왕께 알려야 한다고. 강가촌이 있는 언덕까지는 사오백 장이나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북천도왕 어르신의 청력을 믿었소. 내상이 악화를 무릅쓰고 단전의 공력을 바닥까지 긁어모아 고함소리에 쏟아 부었소. 나를 포위한 강가의 무인들에게 제압당할 때까지 여섯 번 소리칠 수 있었소. 그리고 마지막 외침이 끝난 직후 그 어르신이 천공에서 떨어져 내렸소. 나는 그분께 천이가 일러준 대로 양자호의 비무 건에 대해 알려드렸소. 그리고 남천도왕과 작당한 마왕이 그곳에 나타날 가능성이 있으니 북천도왕께서도 쌍룡암 근처에 잠복해주시기를 천이가 바란다고 말씀드렸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어른이 하늘로 날아오릅디다.”
고량을 칭찬하는 말들로 좌중이 시끄러웠다.
진천도 그에게 아낌없는 감사를 표했다. 고량이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다면 결말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몰랐다. 아마도 그의 은신처를 알아낸 마왕과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 했을 것이었다.
마왕을 떠올리며 진천은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제 사마 연합군과의 전면전은 불가피했다. 정맹만으로는 감당불가의 대적(大敵)이었다. 월교를 우군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일방적인 열세에 처할 게 명약관화했다. 설사 월교가 정맹과 한편이 되더라도 전체적인 전력에서 밀리는 형세였다.
하지만 진천은 세력의 우열이 아니라 무왕들의 쟁투에 의해 대륙의 운명을 건 승부가 판가름 나리라 확신했다. 결국 한 명이라도 많은 무왕을 가진 쪽이 승리를 거두게 될 터였다.
진천은 이 관건적인 사안을 최우선적으로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권왕과 외조부 외에 그가 수를 내볼 수 있는 무왕은 셋이었다. 진천은 오늘 당장 그중 한 명에게 응수타진을 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