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87
제186화
고량의 이야기가 끝나자 진천은 금성을 들렀다 창인에 갔던 일을 들려주었다.
일수천비 유재현과 백도삼흉을 지하미로에서 잡은 대목에 이르렀을 때 여러 곳에서 탄성이 나왔다. 세평회 인사들에게 유재현은 잊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배수에서 왕 노릇을 하며 온갖 패악을 저지르더니 결국 그렇게 끝날 운명이었구먼.”
여상구의 감상은 모두의 공감을 얻었다.
“나도 아우님을 만나 개과천선하지 않았더라면 유 방주와 같은 꼴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네. 아니, 틀림없이 그랬을 걸세. 정말, 고마우이. 죽는 건 두렵지 않으나 올바르게 살아가는 인생의 맛과 기쁨을 알지 못한 채 지옥으로 떨어졌다면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구먼.”
농담이 아닌 듯 여상구의 이마주름이 깊어졌다.
팽하연이 탁자 밑으로 살짝 여상구의 손을 건드렸다.
“그렇지 않아요, 여 공. 회주와의 인연이 아니었더라도 여 공은 정도를 걸었을 거예요. 도화각의 주인이었던 시절에도 알게 모르게 많은 음덕을 쌓았잖아요? 예전에 오대세가의 동료들과 봉천을 방문하기 전에 집보각(輯報閣)의 첩인(諜人)으로부터 여 공이 각지의 가여운 아이들에게 베풀었던 은혜에 대해 들었어요. 그래서 호감을 가졌었지요. 여 공을 직접 만나보니 그 정보가 그르지 않았음을 알겠더군요.”
팽하연의 회상에 여상구의 뺨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허어, 이 여모, 몸 둘 바를 모르겠구려. 말씀은 고마우나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부끄러울 따름이오.”
진천은 수줍음을 타는 의형과 그에게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는 팽하연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노덕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자네가 때맞추어 창인에 당도해서 다행일세. 조 형은 별고 없는가?”
노덕의 질문에 내일 당장 눈을 감아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병색 완연한 노인의 얼굴을 떠올린 진천은 씁쓸했다.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여도 근기가 튼튼해 그가 십 년은 끄떡없을 거라던 공 할아버지의 진단을 믿을 도리밖에 없었다.
“노야는 여전하십니다.”
이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답변이었지만 노덕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먼. 더 늙기 전에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가 중원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지는 않던가?”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창인을 떠나실 마음은 없으실 듯싶습니다.”
노덕이 눈빛에 아쉬운 마음을 담았다.
노소의 대화가 잠시 끊긴 틈을 타 갈매기 눈썹을 그리고 있던 하수린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일수천비 같은 고수까지 창인에 보낼 정도라면 세평도 안심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진천은 하수린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불만도.
전날 금성에서 날려 보낸 전서구에서 진천은 세평에 머무는 노덕과 노미현 부녀를 급히 삼보장으로 귀환시키라고 일러두었었다. 하수린은 세평으로 보낸 팔정파 사람들의 안위를 염려하는 것이었다. 진천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허 노야를 비롯한 창인의 친인들이 세평에 있다면 그도 그랬을 터였다.
“당분간은 괜찮으리라 보오. 하지만 수일 내로 대책을 마련하는 게 좋겠소.”
하수린이 반색했다.
“어떤 대책이죠?”
“모두와 의논한 후 결정해야겠지만, 세평을 정맹에 개방했으면 하오.”
하수린이 한쪽 눈썹만 추어올렸다. 진천은 그 표정이 실망을 나타냄을 알았다. 그녀는 팔정파 사람들을 삼보장으로 부르리라 기대했을 터였다.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하수린이 침착하게 말했다.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좌중을 둘러본 진천이 차소영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지금까지 차 소저가 세평의 치안을 맡아 수고해왔소. 하지만 근래 도시의 규모가 너무 커져 애를 먹고 있는 걸로 알고 있소.”
“그래요, 진 공자. 사실 감당불가의 상태가 된 지 꽤 됐어요.”
진천이 다시 하수린에게 눈을 돌렸다.
“세평회의 인원만으로는 세평을 건사하기 어렵소. 그러니 외부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소. 원래 팔정파 분들에게 부탁하려 했으나 이번 일도 있고 하니 이참에 정맹도 불러들이는 게 어떨까 싶소. 모두 모인 김에 이 자리에서 대체적인 그림을 그렸으면 하오만.”
하수린으로서는 반대할 까닭이 없었다.
여상구가 이마주름을 그었다.
“아우님의 뜻이라면 나도 따르겠네만 어째 입맛이 씁쓸하구먼. 기껏 죽을 쑤어서는 탐욕스러운 개들에게 던져주는 꼴이 될 듯싶어서 말일세.”
쓴웃음을 지은 진천이 의형을 달랬다.
“사벌이 마련과 손을 잡은 이상 정맹과의 연수는 필연입니다, 형님. 물론 세평의 관할권은 어디까지나 우리에게 있습니다. 앞으로 있을 정맹과의 협상 시 이 원칙은 반드시 관철시켜야 합니다. 이 문제는 형님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여상구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맡겨주게나, 아우님.
세평회는 진천이 제기한 사안에 대해서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갔다.
구름이 물러가자 반달이 뽀얀 얼굴을 내비쳤다.
서늘한 월광을 받으며 진천은 후원으로 향했다. 가린이 어슬렁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잡초가 무성한 연무장에 이른 진천은 걸음을 멈추었다. 추억의 장소였다.
“여긴 오랜만이지, 가린?”
전날 소중걸과의 비무에 대비해 진천은 이곳에서 가린을 상대로 신법을 다듬으며 구슬땀을 흘렸었다. 냄새라도 맡을 요량인지 가린이 납작한 코를 벌름거렸다.
“가린은, 좋다.”
진천은 구부정한 자세임에도 칠 척이 넘는 가린을 올려다보았다. 권왕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저리로 가자, 가린.”
진천은 연무장 가장자리에 놓인 반석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갸웃거린 가린이 콧바람을 뿜어내고는 그를 쫓았다. 진천은 한 자 반 높이의 반석 위에 올라섰다. 그러자 가린과 눈높이가 얼추 비슷해졌다.
“저 달을 봐, 가린. 밀림에서 보던 것과 똑같지?”
가린이 진천의 시선을 따라 천공으로 눈을 올렸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반월을 바라보았다.
보름달에 얽힌 아타족의 제사와 식인 풍습에 관해 대화를 나누려던 진천의 속을 읽었는지 가린이 선수를 쳤다.
“가린은, 답답하다. 가린은, 듣고 싶다.”
쓴웃음을 지은 진천은 지루한 논의에 싫증을 내고는 지하연무장으로 돌아가려던 가린을 붙잡고 후원으로 데려온 이유를 밝혔다.
“부탁이 있어, 가린.”
“…….”
“창인에 가서 내 친인들을 지켜줬으면 해.”
“…….”
진천은 대꾸 없는 가린의 표정을 살폈다. 속과 겉이 일치하는 이였기에 그의 감정을 헤아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혹스러움과 거부감. 혼란.
진천은 목소리에 진심을 담았다.
“내겐 너무나 중요한 일이야. 그리고 너 말고는 믿고 맡길 사람이 없어.”
휘어져 올랐던 가린의 눈초리가 누그러졌다. 그러나 가린은 응낙의 의사표시를 망설였다.
진천은 장황한 말로써 그를 설득하려 들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군더더기를 붙이는 건 가린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선택은 오롯이 가린의 몫이었다.
침묵하던 가린이 갑자기 손을 뻗었다.
진천은 그의 거대한 손이 목을 움켜쥐도록 내버려두었다. 가린이 무엇을 확인코자하는지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목이 가린의 손에 들자 절로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지금 이 순간 가린은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그의 목을 꺾어 절명시킬 수 있었다.
가린이 맹수 같은 눈으로 진천의 처진 눈을 노려보았다. 진천의 평온한 눈빛에 강렬했던 가린의 안광이 점차 부드러워졌다.
진천의 목을 놓아준 가린이 말했다.
“가린은, 간다.”
그의 결정을 예측했음에도 진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가린.”
진천은 가린에게 대륙을 종단할 때 유념해야 할 점들에 대해 상세히 알려주었다. 가린이 주안으로 왔던 여덟 달 전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기에 이전의 경로를 수정해야만 했다. 특히 사벌이 그의 이동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주의해야 했다.
“내 친인들이 창인 지하미로에서 인모주(人眸蛛)의 거미줄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줄 거야. 그럴 가능성은 몹시 희박하지만 만약 강기를 부리는 무인이 오면 충돌하지 말고 독정(毒井)으로 유인해야 돼. 그리고…….”
진천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가린은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설명이 끝나자 가린이 물었다.
“가린은, 언제?”
막연한 질문이었지만 진천은 알아들었다.
“짧으면 백 일, 길면 일 년쯤.”
“가린은, 돌아온다.”
“그래, 가린.”
진천을 지그시 바라보던 가린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는 무릎을 구부려 도약의 자세를 취했다. 진천이 황급히 가린을 붙잡았다.
“친인들에게 작별인사는 하고 가야지. 그리고 가기 전에 보여줄 게 있어, 가린.”
“…….”
“아마도 현재 지상에서 가장 강할 무인의 솜씨를 보고 싶지 않아?”
가린의 동공이 새벽하늘의 샛별처럼 반짝거렸다.
진천은 명과 사오 장의 거리를 격하고 섰다.
권왕과 검왕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린도 진천과 명의 대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자신의 동굴 입구에서 서성거렸다. 드넓은 지하연무장엔 그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
진천은 보지 못하는 명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잘 부탁하오, 명.”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명이 성난 황소처럼 돌진했다. 진천은 절멸도를 뽑지 않고 명을 상대했다. 팔영보를 발한 그의 신형이 유령으로 화했다. 진천은 근거리에서 명의 파상공세를 흘려내었다. 전날 소중걸과 강민을 좌절케 했던 수법이었다.
“캇!”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달아나는 진천에게 약이 올랐는지 명이 괴성을 토해냈다. 그러고는 검왕의 절기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관전하던 권왕이 탄성을 내질렀다. 아직 절대지경에는 들지 못했으나 명의 무력은 초절정의 극상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명은 그녀에게서 일 장 밖으로 벗어나지 않은 진천을 어쩌지 못했다. 그녀의 공격은 절정 고수의 안목으로도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빨랐으나 진천은 여유롭게 피해내었다. 수백 초의 공방에도 진천의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한 명이 돌연 손을 멈추더니 씩씩거렸다.
그녀의 질문은 검왕의 의문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 동안 약간의 성취가 있었소.”
진천의 답변에 명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진천의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명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다시 쫓고 쫓기는 싸움이 벌어졌다. 여전히 쫓기는 자가 우세하게 보이는 기이한 광경이었다.
자존심이 상한 듯 명이 소리 질렀다.
진천은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의 좌수에서 돋아난 하얀 사슬이 명을 휘감았다. 절멸삭을 뿌리치려던 명이 뾰족한 비명을 토해냈다. 명의 갑피에 혈흔을 남긴 절멸삭이 진천의 좌수로 되돌아왔다. 명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진천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진천은 쓰게 웃었다.
검왕이 명의 감상을 공유했다.
“지난번에 무력을 속인 게 아니라면 너는 정말 괴물이라고 보아야겠구나. 불과 이십여 일만에 이리도 늘었다니.”
진천은 검왕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오른 주먹을 왼 손바닥에 갖다 댔다.
“감히 어르신의 검을 받아보고 싶습니다.”
느닷없는 비무 청에 검왕의 백미가 꿈틀거렸다.
권왕이 진천을 지원했다.
“내 아우를 혼내주는 게 어떻소, 소 형? 저 천방지축에게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려주구려.”
“…….”
“만용이긴 하오만 내 아우에겐 그만한 자격이 있지 않나 싶소. 바라건대 저 녀석에게 가르침을 주시구려, 소 형.”
권왕의 거듭된 청에 검왕이 반응을 보였다.
“내 검에 저 아이가 다칠 지도 모르네, 진광.”
검왕의 엄포에 권왕이 움찔했다.
“뭐, 그리되더라도 자업자득이니 할 수 없지. 죽이지만 말구려.”
검왕이 진천에게 눈길을 주었다. 내공을 싣지 않은 무심한 눈길이었으나 진천은 태산에 짓눌린 듯한 위압감을 느꼈다. 짐작대로 검왕은 다른 무왕들보다 윗길의 초인임에 분명했다.
진천을 응시하던 검왕이 천천히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명이 냉큼 그와 자리를 바꿔 권왕 옆에 가서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