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9
제18화
하수린이 언급한 몇 개의 단어가 진천의 심기를 건드렸다.
운명.
그런 게 실재할까.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겨 낼 수 없는 올가미 같은 게 정말로 있을까.
그럴지도 몰랐다. 아닐 수도 있고.
진천은 후자이기를 바랐다. 살아오는 동안 여러 일을 겪으며 깨달은 바가 있다면 언제나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선택마저 애초에 정해진 필연적인 수순을 따르는 요식 행위일 뿐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면 고심이든 노력이든 의지든 인간의 발버둥은 아무 의미도 없지 않은가. 진천은 자신이 그렇게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기를 빌었다.
무인.
힘을 숭상하고 강해지기 위해 온 힘을 쏟는 족속. 채찍을 휘두르는 여인의 말마따나 은원과 무관하게 누가 더 센지 판별하기 위해 때로는 목숨까지 거는 자들. 당금 천하 무상문농(武商文農)의 위계질서에서 정상부를 차지한 특권층.
그러나 무인은 진천의 꿈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의 삶을 결정할 수 있기 이전 어머니에 의해 강요된 길이었다. 일단 떨어지면 다시 위로 올라갈 수 없는 폭포수처럼 들어선 이상 뒤로 돌아가지 못할 길이기도 했다.
그리고 죽음.
어째서 그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린단 말인가. 저 여인은 죽음이 무언지 알기나 할까.
진천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최초의 매질은 죽음과 관련된 것이었다. 여섯 살이 되던 그날 어머니는 기르던 강아지를 죽이라고 시켰다. 독심은 무인으로서 반드시 가져야 하는 자질임을 강조하며.
어머니가 내미는 비수를 뿌리친 진천은 강아지를 부둥켜안고 지시를 거두어 달라고 애원했다. 화가 나면 으레 그렇듯 어머니는 눈이 뒤집어졌다. 그러나 그날은 소리를 지르고 아이가 떼를 쓰듯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발광에 더해 매까지 들었다. 그러고는 참나무 가지가 부러질 때까지 그를 무자비하게 때렸다.
진천은 결국 비수를 손에 쥐었다. 매질이 아파서가 아니라 어머니가 진짜로 미칠까 봐 두려워서였다. 예리한 칼날이 반년도 못 산 어린 개의 목을 쑤시고 들어가 목숨을 거두었을 때, 진천의 가슴속에서도 무언가 영원히 사라졌다. 진천은 한순간에 심장이 녹아 버린 것 같은 그 끔찍한 느낌을 결코 잊지 못했다.
그 이후 진천은 살생의 명만은 듣지 않았다. 너무 심하게 맞아 까무러칠 지경이어도 끝까지 버텼다.
그를 죽이는 것 외엔 명령을 강제할 방법이 없어지자 양보하는 법이 없는 어머니도 한 발 물러섰다. 진천은 죽이지 않되 최선을 다해 무공을 익히고 어떤 싸움에서든 반드시 이기겠다는 맹세로써 어머니와 잠정적인 타협을 보았다.
어머니는 살인이 ‘사부의 저주’를 벗고 최강의 무인이 되기 위해 통과해야 할 필수적인 관문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 맹신으로 인해 기어이 참극을 초래했지만 그날이 도래하기까지 육 년간 진천은 적어도 ‘살령(殺令)’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진천은 죽기를 원치 않는 것만큼이나 죽이는 게 싫었다.
진천은 아름다운 눈으로 살벌한 안광을 쏘아내는 여인을 응시했다.
익숙한 눈빛이었다. 이기고 지는 걸 살고 죽는 문제로 여기는 자들의 눈빛. 창인에도 저런 눈빛을 가진 이들이 수두룩했다. 승부욕의 화신들. 그들은 포기하는 법을 몰랐다. 압도적인 차이를 인정할 때까지는.
채찍의 여인 역시 어설픈 우열의 판가름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뼈가 부러지고 운신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어서야 결과를 수용할 게 뻔했다. 창인의 독종들처럼.
진천은 여인을 주시하며 천천히 왼손에 감아 두었던 칡넝쿨을 풀고 부목을 뗐다. 거의 다 나은 발목과 달리 아직 덜 아물었지만 확실한 우위를 점하려면 좌수의 사용이 불가피했다.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는 싸워야만 했다.
처음과는 반대로 진천이 왼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무슨 짓이야?”
하수린이 물었다.
“나는 원래 왼손잡이요.”
진천이 대답했다.
살기등등했던 하수린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격투 중에 극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비장의 패를 스스로 까뒤집다니.
정정당당하거나 바보거나. 혹은 둘 다거나.
멋진 척하거나 멋지거나. 둘 다 아닐 수도 있지만 둘 다일 수는 없었다.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 낸 하수린이 채찍을 부렸다. 푸른 뱀이 바닥에서 구불구불 춤을 추었다.
“간다.”
목소리를 내뱉는 동시에 하수린의 신형이 위로 도약했다. 일 장 가까이 뛰어오른 그녀의 손에서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나선형을 그리며 청사편이 진천에게로 떨어졌다. 진천은 보법으로 포위망을 벗어나는 순간 배전의 위력을 담은 채찍 끝이 그에게 달라붙을 것임을 직감했다.
상대의 수에 응해 주는 것도 한 방법이었으나 장기전은 이미 선택지에서 지워 버렸기에 진천은 일곱 개의 동심원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채찍이 그를 휘감기 직전 느닷없이 쭉 늘어난 진천의 수도가 먼저 하수린의 명치 어림에 닿았다. 짧은 경악성을 토한 하수린이 공중에서 제비돌기를 했다. 진천은 그녀의 발차기를 피해 뒤로 떨어졌다.
관전자들에겐 단순한 공방으로 보였으나 하수린은 방금 용궁에 갈 뻔했음을 알았다. 만약 진천의 손칼이 조금만 더 들어왔다면 그녀는 중상을 면치 못했을 터였다. 적중되지는 않았으나 수기(手氣)만으로 가슴뼈가 욱신거리고 기혈이 뒤틀렸다.
하수린은 혼란스러웠다. 위기를 벗어난 것은 상대가 주저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의 임기응변 덕분이었을까. 답을 찾기 전에 그녀의 자존심이 먼저 작동했다. 어느 쪽이든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음은 분명했다. 상대에게 상응하는 위협을 주지 못했으니 확연히 밀렸다는 뜻이었다.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분노한 하수린은 생사대적에게나 구사할 최후의 절초를 꺼내 들었다. 회선편(回旋鞭)이 통하지 않으면 참광편(斬光鞭)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빛조차 베어 버리는 빠르기로 이 장을 물러선 진천에게 날아간 편두(鞭頭)가 그의 목을 뚫었다. 그리고 대결이 종결되었다.
하수린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청사편이 들려 있어야 할 그녀의 오른손은 비어 있었다. 코흘리개들 간의 싸움에서 실질적인 우열과 상관없이 코피가 난 쪽이 패배자가 되듯 병기를 놓친 무인은 승부에서 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또르르.
바닥으로 무언가 굴러갔다. 콩알 크기의 철구(鐵球)였다. 하수린의 가지런한 눈썹이 거칠게 휘어졌다. 저 조그만 쇠구슬이 그녀의 손목을 때리고 청사편을 떨어뜨리게 만든 원흉이었다.
하수린은 이를 악물었다.
손목뼈가 으깨진 고통보다 패배감이 백배는 더 쓰라렸다. 팔대무왕을 넘어 하남 무림 출신으로는 최초로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되고야 말겠다는 은밀하면서도 웅대한 야망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린 듯했다. 강호초출의 무명소졸에게 완패한 자가 어찌 무적의 절대자를 꿈꿀 수 있겠는가.
채찍을 집지도 않고 하수린이 전면으로 시선을 올렸다. 너무나 평범하게 생겼지만 결코 평범할 리 없는 사내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하수린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자신은 거침없는 살수를 뿌렸건만 상대는 그녀의 손을 겨냥했을 뿐이었다. 만약 철구가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면 피할 수 있었을까.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암기의 쇄도를 감지하자마자 손목에서 통증이 올라오지 않았던가.
인정하긴 싫지만 그녀가 목숨을 부지한 것은 사내가 손속에 사정을 둔 덕분이었다. 하수린은 사내에게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머릿속이 비어 버린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객잔에 깔린 묵직한 정적을 경망스러운 목소리가 깨뜨렸다.
“귀인을 몰라보고 망발을 떨었습니다. 죽을죄를 졌지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한쪽 구석에서 관전하고 있던 소(蘇)씨 성의 중년인이 진천을 향해 오체투지하고는 구명을 간청했다. 진정성을 보이려는 듯 바닥에 박아 대는 이마가 깨져 피가 철철 흘렀다. 그의 활약(?) 덕택에 객잔의 마비가 풀렸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하수린의 친위대 중 한 명이 목소리를 낮춰 중년인에게 윽박질렀다.
“닥쳐라, 쥐새끼.”
중년인은 입을 다물고 하수린이 입술을 열었다.
“내가, 졌어요.”
익숙하지 않은 말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말이었다. 그녀의 패배 선언에 친위대의 면상들이 일제히 우거지상을 지었지만 진천은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자신의 승리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팔정파의 하수린이에요.”
하수린이 뒤늦게 자기소개를 했다. 이미 이름을 밝혔던 진천은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하수린이 그의 수고를 덜어 주었다.
“당신 이름이 뭐라고 했죠?”
“나는 진천이오.”
“하늘이라. 어울리네요. 내 이름은 웃기지 않나요? 남자도 아닌데 수기린(麟)이라니. 정말 우스꽝스럽죠? 키도 작고 강하지도 않은 주제에. 안 그래요?”
진천은 하수린의 바뀐 말투만큼이나 그녀의 자조가 당혹스러웠다. 진천이 침묵을 지키자 하수린이 왼손으로 청사편을 집어 들어 갈무리했다. 둘둘 말린 채찍은 아이들이 차고 노는 공 모양이 되어 그녀의 허리에 걸렸다.
“당신은 어디서 왔나요? 아니, 어디로 갈 건가요?”
진천은 이번 질문에는 응답했다.
“나는 저분과 함께 주안으로 가는 중이었소.”
노덕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하수린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렇군요. 나중에 내가 찾아가도 될까요?”
하수린의 의도를 몰라 진천은 묵묵부답했다.
“나는 오늘 졌지만 다음 날엔 기필코 이길 거예요. 당신을 꺾을 준비가 되면 주안으로 가려는데, 받아 줄 거죠?”
진천은 비로소 깨달았다. 하수린이 보이는 공손함이 완전한 승복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을 낮춰 비참하게 만듦으로써 독한 결의를 다지려는 심산의 발로임을.
그녀의 동공 깊숙이 반짝이는 눈빛은 복수를 다짐하던 아타족의 청면괴인에게서 본 것과 똑같이 서슬이 퍼렜다.
“좋을 대로 하구려.”
혹이 붙은 느낌이었지만 하지 말란다고 들어먹을 여인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진천은 마지못해 받아 주었다.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하수린이 대머리 구차만에게 명을 내렸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해.”
대머리 무사가 허겁지겁 문으로 뛰어갔다.
“여기서는 식사를 하기 어려울 것 같네요. 원한다면 위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어요.”
하수린의 말에 엉망이 된 주위를 둘러본 진천이 노덕의 의견을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노 대인?”
“나는 아무래도 괜찮으니 자네 뜻대로 하게나.”
“알겠습니다.”
진천이 하수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이만 갔으면 하오만.”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진천을 물끄러미 바라본 하수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내가 찾아갈 거라는 걸 잊지 말아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우연히 만난 사내에게 연심이 싹 터 재회를 고대하는 여인의 바람처럼 들렸으나 그렇게 해석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언행이 정중하고 양순할수록 설욕의 각오가 더욱 강렬하게 전달되었다.
진천은 노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객잔을 나섰다.
팔정파에서 나왔을 수십 명의 무사가 적개심에 불타는 눈들로 두 노소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하수린의 명을 받고 달려 나간 대머리 무사가 단단히 주의를 준 듯 경거망동하는 자는 없었다.
무사들 뒤로는 수백의 군중이 호기심에 가득한 눈으로 진천과 노덕에게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팔정파의 정예들이 출동한 것을 보면 팔룡각에서 뭔가 큰 사달이 벌어졌음에 분명한 데다 무사들의 태도를 보건대 방금 나온 노인과 청년이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팔정파의 무사들이 두 사람을 건드리지 않고 길을 터주자 영문을 알지 못한 군중이 술렁거렸다. 진천은 그에게 달라붙는 시선들이 못내 불편했지만 무릎이 성치 않은 노덕을 배려해 천천히 인파를 뚫고 나갔다. 그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사람들은 그와 노덕을 따라오지는 않았다.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러서야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 낸 노덕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오늘 자네가 얼마나 엄청난 인물을 물리쳤는지 아는가?”
진천은 그저 어깨만 으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