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90
제189화
진천은 검후가 갑자기 커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검후의 동작을 지각한 명이 비명을 토해내며 뒷걸음질 치다 넘어졌다. 하지만 진천은 그녀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발검을 하지 않았음에도 검후에게서 발출된 예기가 그를 옭아맸기 때문이었다. 대항을 하려들면 급전으로 치달을 공산이 크기에 진천은 갈등했다.
검후가 천천히 은빛의 검을 뽑았다. 검신이 너무 좁아 검이라기보다는 기다란 꼬챙이처럼 보이는 협봉검이었다.
검후의 일그러진 입술이 벌어졌다.
“권왕의 말처럼 혓바닥이 매끄러운 아이구나. 네 무력이 맹랑한 혀 놀림을 받쳐줄 수 있는지 확인해 볼 것이다.”
진천은 그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예기를 견디며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포권을 취했다.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진천이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밧줄처럼 그를 칭칭 감은 예기도 따라왔다. 이미 비무가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검후와의 거리가 오륙 장이 되자 진천은 화연으로 예기의 그물을 벗어났다. 그의 동체가 흐릿해지더니 일 장 옆에서 형체를 갖추자 검후의 눈에 기광이 스쳤다. 그러고는 사선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빛살의 속도로 공간을 가른 뇌전이 진천을 두 쪽으로 갈랐다. 하지만 둘로 나뉜 진천의 반신들은 환상처럼 다시 합체했다.
검후가 진천에게 쇄도했다. 그녀의 은빛 검이 일으킨 푸른 강기가 야명주를 무시하고 지하연무장을 지배하는 어둠을 찢어발겼다. 검강(劍剛)의 소낙비는 비연을 펼친 진천을 가두지 못했다. 진천의 신법이 신기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파악한 검후가 그를 벽으로 몰았다. 진천은 후퇴하지 않고 절멸삭을 꺼내 맞불을 놓았다.
청강(靑剛)과 백강(白剛)의 충돌은 전자의 우위로 판명되었다. 검후의 막강한 내력을 체감하며 진천은 첫 격돌에서 칠팔 보나 양보해야 했다.
검후는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진천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진천은 그녀의 몰이에 굴하지 않고 지하연무장 중앙을 전장으로 고수했다.
검후의 공세가 한층 거세졌다. 그녀가 전력을 발할 작정임을 깨달은 진천은 최고조로 집중했다. 관전하던 권왕도 긴장하는 기색이었다. 명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진천은 기시감이 들었다.
검후의 검공은 마왕의 조공과 흡사한 데가 있었다. 순간순간 마왕과 싸우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는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검후는 월교의 십삼대(十三代) 교주였던 아수라마검(阿修羅魔劍) 장일청(張溢淸)의 제자였다. 그리고 장일청은 마련 검마류 출신이었다. 검마 자리를 놓고 구천마검(九天魔劍)과 다투다 그에게 밀린 장일청은 월교에 투신한 후 무력이 급상승했고, 종내에는 교주 위까지 올랐다.
전날 보영대첩에서 월교가 일통무련을 도와 정사마연합군에 맞섰던 것은 마도에서 쫓겨난 장일청의 사적인 복수심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당시 월교가 정사(正邪)의 무인들은 내버려두고 마인들에게만 바득바득 달려든 사건을 두고 한 동안 세상이 시끄러웠다. 나중에서야 보영대첩이 있기 직전 월교의 교주가 사파 백골교(白骨敎)의 반역자였던 탈혼귀(奪魂鬼) 오만중(吳萬重)에서 검마류의 추방자 장일청으로 바뀌었음을 알게 된 강호는 그제야 전후사정을 이해했다.
당시 월교는 심하게 말해 자고나면 주인이 달라지는 난장판이었다.
검후가 등장하기 전까지 십 년 이상 권좌를 유지한 이는 초대교주였던 칠성검군 이충이 유일했다. 이충 사후 사십 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교주가 열 번 이상 교체되었다. 그나마 초기의 교주들은 칠팔 년가량 버텼으나, 장일청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길어야 이삼 년이었다. 장일청에게 축출된 탈혼귀처럼 반년도 임기를 채우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장일청 역시 일 년 이 개월 만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물론 자의로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암살을 당한 이는 교주 직을 수행할 수 없는 법이었다.
흔하디흔한 교주들 중 하나로 끝날 수도 있었으나 장일청은 다른 이들과 달리 월교의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송하령이라는 걸출한 후인을 남긴 덕분이었다.
송하령은 서른여덟 살에 팔극천수(八極天手) 성찬성(成贊星)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교주에 올랐다. 역대 최연소이자 최강의 교주였다. 정파 무림 성주 성가의 이단아였던 성찬성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음에도 십 초도 버티지 못하고 검후의 검에 목을 내주고 말았다.
월교 제 십육대 교주에 등극한 검후 송하령은 철권통치를 시작했다.
그녀가 교주로서 행한 최초의 사업은 그 유명한 황금대궐의 철거였다. 월교의 성세를 상징하던 호화로운 궁궐과 전각들은 소박한 와옥들이 늘어선 범상한 마을로 대체되었다.
검후의 조치는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검후는 소수의 친위대만 거느리고 반란 세력을 진압했다. 단호하고도 무자비한 진압이었다. 월교 서열 일백 위 이내의 고수들 중 예순여섯 명이나 그녀의 검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되는 참화를 입었다.
소극적인 가담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이들은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했다. 창립 이래 월교가 고수해 온 특유의 집단지도체제는 완전히 옛일이 되어버렸다. 아무도 검후의 명에 토를 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난 사십이 년 간 월교에서 검후는 신과 동급이었다.
명불허전.
철혈의 여제는 자신이 팔대무왕의 일인에 속한 것이 단지 사패의 일익인 월교의 주인 대접을 받은 탓이 아님을 무력으로써 증명했다.
진천은 검후의 무위가 마왕의 아래가 아님을 절감했다. 파괴력은 마왕에 비해 약간 처졌으나 정치(精緻)함의 측면에서는 그보다 우위였다. 이는 신법을 특장기로 하는 진천에게는 좋지 않은 상성이었다.
진천은 어느 시점부터 무영을 극성으로 펼쳐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검후의 검강들을 빗겨낼 수가 없었다. 검후는 방어력도 막강했다. 진천이 연달아 쏘아내는 절멸비는 그녀의 호신강기에 닿기도 전에 검막에 걸려 떨어졌다. 절멸삭은 그녀에게 별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 절멸참이 그녀의 검과 대등하게 맞섰는데 진천은 근접전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검후와 달리 호신강기에 공력을 할애할 여력이 없어서였다.
진천은 비무를 중단하고 싶었다. 하지만 검후가 입을 벌리거나 거리를 벌릴 여유를 주지 않고 맹렬하게 압박한 탓에 비무를 멈출 방도가 없었다.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검후는 끝까지 갈 심산임에 틀림없었다. 그녀가 그를 미래의 우환이 아니라 현재의 위험으로 간주했다는 뜻이었다.
진천은 최선의 무력을 드러냄으로써 협상력을 높이려 했던 것이 순진한 발상이었음을 자인했다.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부정적인 효과를 낳을 가능성을 애써 축소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기에 진천은 후회를 떨쳐버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목전의 과제는 생존이었다.
권왕은 자신이 팔뚝의 힘줄들이 터져나갈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진천과 검후의 대결은 비무가 아니라 생사결로 치닫고 있었다. 권왕은 진천의 생사가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끼어들기엔 이미 늦은 국면이었다. 섣불리 개입했다간 파국을 초래할 수도 있었기에 그로서는 진천의 분전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권왕의 눈에 검후의 만검폭우(萬劍暴雨)에 갇혀 궁지에 몰린 진천이 파리를 쫓듯 좌수를 흔드는 광경이 들어왔다. 권왕은 진천이 그가 ‘양단(兩斷)’이라고 내심 명명했던 신수를 구사했음을 알았다. 그 순간 비무, 아니 생사투가 종식되었다.
검후는 쓰러진 진천에게 가일수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진천이 최후에 발한 반격에 검이 부러지고 내상을 입어서가 아니었다. 권왕이 그녀를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미쳤는가, 송 교주.”
검후에게 노기를 가감 없이 분출한 권왕이 고개를 돌리며 소리 질렀다.
“안 돼.”
진천에게 달려와 그를 안으려했던 명이 주춤했다. 권왕이 다시 주의를 주었다.
“그 아이를 건드리지 마라.”
명은 말귀를 알아들었다. 진천은 괴물이었다. 전날 그녀와의 첫 비무 때도 심장이 뚫리는 중상을 입고도 금방 회복되지 않았던가. 왼 어깻죽지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갈리는 참혹한 검상을 입었지만 숨이 붙어있으니 내버려두면 회생할 터였다. 명은 그러기를 간절히 빌었다.
진천의 옆에 선 명은 안구가 들어있지 않은 눈으로 검후를 노려보았다. 그녀로서는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동이었다.
명의 눈길에 검후의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그녀는 명에게 제혼주(制魂呪)를 읊지 못했다. 권왕의 기감에 걸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무슨 짓인가? 내 아우를 죽일 참이었나?”
권왕의 추궁에 검후는 목에 걸린 울혈부터 삼켰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피를 토해낼 수는 없었다.
진탕된 내기를 다스린 검후가 입을 열었다.
“내가 그럴 작정이었으면 저 아이의 명줄이 붙어있었을까요?”
권왕의 일자 눈이 씰그러졌다. 진위를 판단하기 어려워서였다.
“손을 과하게 썼음은 인정해요. 변명 같지만 저 아이의 무력이 내 예상을 훨씬 초과하는 바람에 투기(鬪氣)를 억제하기 힘들었어요. 하지만 살의를 품지는 않았어요.”
권왕은 검후의 말이 절반은 사실임을 알았다.
“대체 저 아이는 누군가요?”
여러 의미가 담긴 검후의 질문에 권왕이 뒤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누운 진천과 그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은 명이 보였다. 다시 시선을 검후에게 돌린 권왕이 말했다.
“여기서 나감세. 대나무밭에 가서 내 아우가 어떤 사람인지 자세하게 알려주겠네.”
자신을 진천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려는 의도임을 간파했으나 검후는 권왕의 청에 응했다. 검이야 도구에 불과하니 반 토막이 났어도 부리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내상을 입은 상태로 권왕과 대적하는 건 무리였다.
권왕은 앞장서지 않고 검후가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검후는 경신을 전개하지 않고 걸어서 지하연무장의 출입구로 향했다. 십 보의 거리를 유지한 채 그녀의 뒤를 따르며 권왕이 명에게 말했다.
“그 아이 곁을 떠나지 마라.”
명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천은 권왕과 검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검후의 공습에 일격을 허용해 바닥에 쓰러지자마자 생환결을 운용한 탓이었다.
그러나 진천은 그가 운공에 든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는지 정확히 예상했다. 검후는 즉각적인 후속타를 가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의 신수가 그녀를 일시적으로 운신불능으로 만들 터이기 때문이었다. 촌각의 백분지일도 되지 않을 만큼 짧은 지체일 터이나 권왕이 그녀를 제지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도주를 택하지 않고 정면대결을 감행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권왕의 존재였다. 권왕이 없었다면 완전히 다른 전술을 택했을 터였다.
진천은 검후의 최종절학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팔대무왕의 일인답게 터무니없이 강했지만 일수에 그를 절명시킬 만큼은 아니었다. 진천이 아는 한 당금 무림에서 그런 능력을 가진 이는 검왕뿐이었다. 그만이 무영을 무력화시키고 그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을 수 있었다.
검후가 마지막에 선보인 검은 실로 무서웠으나, 그리고 그의 상반신을 반으로 가를 뻔했으나, 심장을 범하지는 못했다. 심장이 터지지 않으면 진천은 부활할 수 있었다. 그의 심장에는 아직 밤톨만한 독정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용해된 독정이 진천의 혈맥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누군가 벌겋게 단 인두를 들고 그의 속을 헤집는 듯한 극통이 올라왔으나 진천은 신음성 하나 흘리지 않고 참아내었다. 역천기결을 익혔을 때부터 고통은 떨굴 수 없는 동반자였다.
무참히 잘린 가슴뼈와 척추와 늑골이 달라붙었다. 뭉개진 근육과 내장도 빠르게 아물었다.
진천은 자신이 치유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강해지고 있음을 지각했다. 그리고 또한 알았다. 그의 눈앞에 어른거리는 사신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