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91
제190화
진천은 눈을 떴다.
어슴푸레 명의 얼굴 윤곽이 보였다. 눈을 두 번 깜빡이자 그녀의 이목구비가 들어왔다. 칼귀, 눈동자 대신 암흑이 고인 눈, 납작한 코, 얇고 삐뚤어진 입술. 그 입술에서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 빠져나왔다.
“애아아.”
괜찮으냐고 묻는 것이었다.
진천은 몸을 일으켰다.
“물론이오.”
진천은 넝마가 된 상의를 벗었다. 피로 범벅이 된 옷을 벗자 탄탄한 근육질의 상체가 드러났다.
명이 진천의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길고 비스듬히 난 상흔(傷痕)을 가냘픈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진천은 쓰게 웃었다.
“언젠가는 죽겠지만 오늘은 아니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진천은 명의 등을 토닥였다.
“…….”
“정말 놀랐소. 명이 검후 어르신의 제자라니.”
“검왕 어르신께 검공을 배우기 전에 그 분의 가르침을 받았소?”
진천의 질문에 명이 벌벌 떨었다. 진천은 그녀가 경기를 일으키지나 않을지 염려스러웠다. 진천이 양팔을 잡아주자 명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린 명이 울먹였다.
진천은 명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았다. 그의 신수에 부러진 검후의 은검(銀劍) 조각이 바닥에 놓여있었다. 검왕과 달리 검후는 검편을 챙기지 않고 내버려 두고 간 것이었다.
진천은 명과 검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명이 그 주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는지 의문이었다.
명에게 물어보는 대신 진천은 상상했다.
검후와 명이 마주 보고 서있었다. 검후가 인정사정없이 검을 찔러갔다. 명은 피하지 못하고 가슴에 검을 맞았다. 검후의 검은 초절정 고수의 호신강기보다 단단한 명의 갑피를 여지없이 뚫고 들어갔다.
명은 피를 흘렸다. 비명을 질렀다. 명은 경이로운 회복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검후는 그녀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른 곳을 찔렀다. 팔. 다리. 목. 배. 어깨. 옆구리. 작은 몸이되 찌를 곳은 많았다.
공포에 질린 명에게 검후가 다그쳤다. 피해내라고. 반격하라고. 이런 방식으로. 저런 수단으로.
명은 검후의 지시를 따르지 못하고 허둥지둥 댔다. 그러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진천은 명을 이해했다. 두려움은 사람의 이지를 마비시키는 법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가 모친에게 그랬듯. 대웅이 곽건에게 그랬듯.
진천은 명을 껴안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는지 명이 움찔했다. 하지만 진천을 밀어내지 않고 순순히 그의 품에 안겼다. 사 척이 되지 않는 명은 체구도 왜소했다. 살점도 없었다. 앙상하다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정도였다.
명이 물었다.
진천은 기대와 불안이 범벅이 된 명의 목소리에 가슴이 아팠다.
“명이 원한다면 여기에 있어도 좋소.”
“그럼, 그렇게 하오.”
명이 발작을 일으킬 태세이자 진천은 재빨리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분은 명을 데려갈 수 없소. 내가 해결할 테니 나를 믿어주구려.”
의지와 진심이 담긴 진천의 음성이 명을 진정시켰다.
진천이 명의 어깨를 잡았다.
“그럴 거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순 없소.”
잠시 침묵하던 진천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오래 살지 못할 거요, 명.”
명이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진천은 이번엔 즉답했다.
“내겐 병이 있소. 불치병이오. 아마도 길어야 서너 달…….”
진천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명이 소리 질렀다.
“내가 명에게 내 비밀을 알려준 건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오. 부탁이라고 해도 좋소. 부디 들어주기를 바라오.”
진천이 명의 작은 손을 잡았다.
“명은 강해져야 하오. 아무도 명에게 명이 원하지 않는 것을 강요하지 못하도록.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히 검공을 갈고닦아야 하오.”
가린과 달리 명은 무공 수련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진천이 그녀가 가린처럼 강약과 속도만 조절할 수 있어도 한 단계 성장하리라 확신했다. 그리되면 절대지경에 드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진천의 말을 듣고도 명은 반응이 없었다. 진천은 그녀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필시 검후를 떠올렸으리라.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명이 야무진 목소리를 토해냈다.
“고맙소. 그리고 미안하지만 부탁이 또 있소.”
“나는 명이 이곳의 사람들과 어울리길 바라오. 청와옥에서 나를 비롯한 모두와 함께 지내는 게 어떻겠소? 대웅은 이미 올라갔고, 이제 가린도 없으니 명 혼자 지하연무장에 있어야 하지 않소? 이 황량한 곳에 혼자 있을 명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편치 않소.”
명은 진천 말고는 아무하고도 말을 섞지 않았다. 타인이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걸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삼보장에 온 이후 그녀가 곁을 준 이는 가린 뿐이었다. 명은 가린에게서 ‘향긋한’ 냄새가 난다고 했다.
명이 썩 내켜하지 않는 기색이자 진천은 설득을 계속했다.
“친우들에게 기회를 주구려. 다들 명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오. 명도 알잖소?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얘기를 나누다 보면 머지않아 그들도 나처럼 명의 말을 이해하게 될 거요. 사람은 홀로 있으며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때도 있어야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고락을 나누며 더불어 지내야 하는 존재라오. 그래야 건강하오. 몸도 마음도.”
“알고 있소. 그러나 명이 앞으로 수련을 통해 더 강해질 수 있듯이 사람들과 어울림으로써 더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 있소. 생각해 보오. 나 같은 벗이 여럿 있으면…….”
“명도 나에게 특별하오.”
“그렇소.”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명을 보며 진천은 가슴이 아렸다. 누가 이 순수한 소녀 같은 여인을 스스로 흉측한 괴물로 여기도록 키웠단 말인가.
“친구의 종류는 다양하오. 특별한 친구도 있지만 편한 친구, 말이 통하는 친구, 도움을 주고 싶은 친구, 반대로 의지하고 싶은 친구 등등. 물론 특별한 친구가 최고요. 이곳엔 좋은 사람들이 많소. 명이 그들과 친교하고 우정을 나누면 정말 좋겠소.”
명이 왼쪽으로 심하게 찌그러진 입술을 깨물었다.
진천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다른 부탁이 있소.”
명이 불거진 눈썹을 찡그렸다.
고소를 지은 진천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오.”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
대번에 명이 진천의 말을 끊었다.
진천은 명의 손을 잡았다. 명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부디 들어주오. 내겐 더없이 중요한 일이오.”
“나는 어릴 적부터 수많은 죽음을 보아왔소. 사람들의 삶이 저마다 다르듯 죽음 또한 그러하오. 나는 평온한 죽음이 최고라고 생각했소. 나도 그런 죽음을 맞이하길 바랐소.”
“그러려면 여한이 없어야 하오. 두고 가는 이 세상에 대한 걱정이 없어야 하오.”
“명은 훗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될 거요. 그런 사람은 아주 많은 일을 할 수 있소.”
진천은 그가 오래 산다면 하고 싶었던 일들을 명에게 들려주었다.
진천은 명의 손을 잡고 지하연무장을 나왔다. 벌써 환하게 날이 밝아있었다.
기감을 끌어올리니 먼 죽림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잡혔다. 권왕과 검후일 터였다. 죽림에 들어가 검후를 보기에 앞서 진천은 명을 청와옥에 데려다주었다. 그녀는 검후와 담판을 짓는 자리에 없는 게 나았다.
진천과 명이 청와옥에 들어서니 뜻밖의 손님이 와 있었다. 흑창 동이승이었다.
삼면의 벽을 홍백의 꽃으로 장식한 일층의 화실(華室)에서 노덕과 담소를 나누고 있던 동이승이 복도로 걸어오는 진천을 보고는 얼른 일어나 예를 차렸다.
“적송림 남파의 동모가 하남신룡을 뵙소.”
진천은 처진 눈을 올렸다. 불길한 징조였다. 동이승과는 아흐레만의 재회였다. 양자호의 비무로부터 따지면 사흘이었다. 그가 세평회에 들기 위해 삼보장을 다시 찾은 거라면 환영할 일이지만, 남천도왕의 사자로서 왔다면 썩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후자일 경우 남천도왕은 양자호의 사건이 있은 직후 동이승을 보낸 것이었다.
심중의 의혹을 내색치 않고 진천은 미소로써 동이승을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그런데 두 분이 서로 아는 사이셨습니까?”
노덕이 진천의 질문에 답했다.
“아닐세. 흑창과는 오늘 처음 보았다네. 알고 보니 나하고 동갑이지 뭔가. 더욱이 내가 젊은 날 몸담았던 상단들하고도 인연이 있더구먼. 그래서인지 마치 오랜 친우를 본 듯한 기분이었다네.”
동이승이 도덕의 말을 받았다.
“오래전부터 노 장주의 영명을 흠모해오던 차에 이리 만나게 되어 영광일 따름이오.”
“나야말로 사파의 협객으로 명성이 자자한 흑창을 보아서 기쁘기 한량없소.”
동이승과 덕담을 주고받은 노덕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럼 얘기들 나누게나. 이 몸은 이만 물러나겠네.”
진천은 노덕에게 명을 맡겼다. 노덕은 이층에 있는 진천의 옆방으로 그녀를 데려가기로 했다.
노덕이 화실을 나가자 진천은 동이승에게 착석을 권했다.
“앉으시지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동이승이 염소수염을 매만졌다. 긴장했다는 징표였다.
진천은 방문의 용건을 묻고 싶었지만 자제했다.
“차를 다시 내올까요?”
“아니외다. 어찌 감히 하남신룡에게 폐를 끼칠 수 있겠소.”
진천은 그를 지나치게 어려워하는 동이승의 모습이 낯설었다. 일전에 쌓은 친분과 편안함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진천은 둘러가지 않기로 했다.
“어쩐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동이승이 고개를 돌려 복도를 바라보았다.
“실은 귀공이 아니라 벌주의 장손을 보러 왔소. 운공에 들었다기에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소.”
진천은 가슴이 무거워졌다. 남천도왕이 대웅을 대상으로 급히 흑창을 보냈다면 한 가지 이유밖에는 없었다.
동이승이 침울한 음성을 뱉어내었다.
“귀공에게는 미안하지만 일전의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됐소. 비록 세평회의 일원이 되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협사들의 활약을 지지하고 응원하겠소. 설사 적으로 만나게 되더라도 결코 귀측에 창을 겨누지 않을 작정이외다.”
진천은 동이승의 고충을 이해했다. 세평회가 마련과만 각을 세웠던 열흘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동이승이 사벌을 등지는 것은 무리였다. 홀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사벌을 떠나 세평회에 든다면 사파의 명문 적송림은 몰살의 화를 입을 수도 있었다. 남천도왕은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진천은 그렇게밖에는 위로할 수 없었다. 동이승이 진천의 말을 받으려는 데 이층에서 내려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