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93
제192화
진천이 예언했다.
“월교의 도움이 없더라도 세평회와 정맹은 전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검후가 처음으로 대꾸했다.
“무슨 수로?”
“정파는 사마의 합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정사마대전은 전체적인 세력의 우열보다는 결국 무왕들의 쟁패에 의해 승패가 갈릴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가 우세합니다.”
검후의 회색 동공에 비웃음이 서렸다.
“검왕이 정맹의 편에 설 거라 보는 게냐? 그럴 리도 만무하지만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삼대사가 되지 않더냐? 검왕은 강하나 홀로 두 명의 무왕을 상대할 만큼은 아니다. 그런 일이 가능한 존재는 천무대제와 천마밖에는 없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삼백 년 전에 지상에서 사라졌다.”
“검왕 어르신이 저희에게 가세할 거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분은 끝까지 중립을 지키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왕이나 독후가 너희 쪽으로 돌아서기라도 한단 말이냐? 그건 검왕의 참전보다 더 가능성이 희박할 터인데? 독후가 정파 무림을 위해 싸운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독후에 관해서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사마의 연합에도 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냐?”
“그녀도 검왕 어르신과 같은 부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어쩌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검후의 눈빛이 변했다. 진천은 삼 년째 종적이 묘연한 독후에 관한 정보를 그녀가 모를 리가 없으리라 확신했다.
“독후는 그렇게 쉽게 이승을 등질 여자가 아니다.”
진천은 반박하지 않았다. 검후의 심중에 싹을 심어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진천이 입을 다물자 검후가 물었다.
“독후는 그렇다 치고 장왕에 대해서는 복안이 따로 있단 말이냐?”
진천은 대답에 뜸을 들였다. 검후가 미끼를 물었으니 서두를 까닭이 없었다. 검후는 진천을 채근하지 않고 그를 노려만 보았다. 진천은 그녀가 노련한 인물임을 알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은 인내심이 부족한 법이었다. 모든 일이 즉각적으로,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검후는 지하연무장에서와 달리 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진천으로서는 바람직한 징조가 아니었다.
“장왕은 조만간 마련을 떠나 이리로 올 것입니다.”
진천의 기습은 검후를 흔들지 못했다.
“그가 아들을 따라 세평회에 들기라도 한단 말이냐?”
검후의 찢어진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조소일 터였다.
비장의 패가 무용지물이 될 판이었지만 진천은 실망하지 않았다. 권왕에게서 소중걸에 관해 들었을 테니 검후가 코웃음을 치는 것도 당연했다.
“장마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와 무관하게 장왕은 저희 편에 서서 싸우게 될 것입니다.”
검후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어떻게?”
진천은 동문서답했다.
“그가 저희에게 가세하면 이쪽이 우세합니다. 설혹 독후가 나타나 사벌에 힘을 실어주더라도…….”
검후가 진천의 말을 잘랐다.
“어떻게 장왕을 너희 쪽으로 끌어들일 건지 물었다.”
“방식에 관해서는 비밀로 해두고자 합니다.”
“뭣이?”
“늦어도 보름 이내에 결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
진천은 좀 전에 하다 만 이야기를 이었다.
“독후가 사마연합군에 가담한다고 해도 저희가 밀릴 게 없습니다. 승산으로 따지면 육 할이 넘을 거라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저희에겐 아직 세상이 진정한 성능을 알지 못하는 강력한 무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무기는 단독으로 마도사류나 사파칠문의 하나를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
검후는 진천의 말을 알아들었다. 진천은 자신이 결정적인 변수가 되리라 주장하는 것이었다.
침묵에 잠긴 검후를 주시하며 진천은 승부수를 띄웠다.
“청컨대 어르신도 저희와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 되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월교는 당당한 승자로서 대륙의 절반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시종여일 방관의 자세를 견지하신다면 전쟁이 종결된 후 어떤 대가도 받지 못할뿐더러…….”
“닥쳐라! 감히 나에게 협박을 하는 게냐?”
진천은 심후한 공력이 담긴 검후의 안광을 담담히 맞받았다. 검후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닙니다. 각각의 선택에 따른 전망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부디 세상을 위한 올바른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마련과 사벌의 폭압과 폭정에 신음하는 뭇 백성들에게도 어르신의 통치 하에서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진천은 기다렸다. 잠시 후 검후의 면사가 펄럭이며 그가 예상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보름 후에 정하겠다. 네가 허언을 뱉은 게 아님을 증명하면 월교는 너희와 손을 잡겠다.”
오른 주먹을 왼 손바닥에 갖다 대며 진천이 기쁨을 감추지 않은 목소리를 토해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반드시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지만 진천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아직 중요한 과제가 남아있었다. 이 고비를 넘지 못하면 방금 거둔 성과는 물거품이 될 터였다.
진천이 정자를 나서려는 검후를 잡았다.
“명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검후의 동공에 냉랭함이 감돌았다.
“끝난 얘기다. 그 아이는 나와 함께 월교로 돌아갈 터이니 군말하지 마라.”
“외람되지만, 재고해 주시길 청하옵니다. 그녀는…….”
“그만! 거기까지다.”
검후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예기가 일었다. 하지만 진천은 뒷걸음질 치지 않고 버텼다. 검후가 발산하는 내기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그에 따라 진천이 두른 외기도 두터워졌다.
“내가 그 아이를 데려가겠다면 어쩔 테냐?”
“그러지 마시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싫다면?”
“…….”
“내가 네 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셈이냐고 물었다.”
“말릴 것입니다. 명에겐 자신이 원하는 곳에 있을 권리가 있습니다.”
진천과 검후는 팔을 내밀면 손끝이 닿을 거리에서 서로를 응시했다. 두 사람이 뿜어내는 기운에 태풍을 맞은 듯 정자가 몸서리를 쳤다. 그러더니 이내 여섯 개의 기둥이 쩍쩍 갈라지고 지붕이 깨져 수백, 수천 개의 목편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검후의 회색 동공에서 화염이 타올랐다. 그녀가 발검하려는 찰나 진천은 두 발 물러섰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진천의 양보로 대치가 풀리자 검후가 숨을 들이켰다. 땀 한 방울이 그녀의 이마에 미끄러지더니 면사 속으로 들어갔다.
검후를 면전에 두고 진천은 과감하게 고개를 숙였다.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명은 저와 제 친인들에게 소중한 벗입니다. 부디 그녀에게 저희와 어울릴 기회를 주십시오. 그녀는 이곳에서 사람을 아끼는 사람이 되고 더욱 강한 무인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진천은 정수리에 꽂히는 살기를 견뎠다. 모험이었지만 검후의 손에 목숨을 맡겼다. 그러지 않으면 검후는 결코 그의 도발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
두개골을 반으로 가를 것 같은 예기가 걷히자 진천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검후가 태도를 정하기까지는 반 호흡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한 시진만큼 길게 느껴졌다.
“그 아이가 월교의 재산임을 잊지 마라.”
검후의 표현에 반감이 들었지만 진천은 내색하지 않고 응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명은 언제라도 월교에 돌아갈 수 있습니다.”
진천은 ‘본인이 원할 때’라는 단서를 덧붙이지 않았다. 실리를 챙겼으니 구태여 검후의 심기를 건드릴 까닭이 없었다.
진천을 쏘아본 검후가 등을 돌렸다. 진천이 급히 그녀를 불렀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번엔 뭐냐?”
검후의 목소리에 진득진득한 불쾌감이 묻어났다.
“명의 나이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검후는 맥이 풀렸다.
“나도 모른다.”
“대략적인 나이라도 알려주시면 안 될는지요? 검왕 어르신 말씀으로는 스물이 넘었다고 하시던데.”
“스물에서 스물다섯 사이일 게다. 그 아이가 유룡관(幼龍關)에 들어온 게…….”
돌연 말끝을 흐리더니 검후가 뒷말을 잇지 않고 허공으로 신형을 날렸다. 진천은 경신을 전개하고 멀어져가는 검후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검후가 후원의 예원옥(藝苑屋)에 대기하고 있던 길잡이를 데리고 삼보장을 떠난 후 진천은 청와옥에 들르지 않고 죽림으로 갔다.
그에게서 검후와의 면담결과를 보고받은 권왕이 탄복했다.
“허어, 실로 대단하도다.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송 교주를 상대로 결국 원하는 걸 다 얻어냈구나.”
“운이 좋았습니다.”
“운은 무슨. 절반은 네 수완이고 나머지 절반은 미리 그녀를 구워삶아 놓은 내 사전작업 덕분이니라.”
진천은 그저 쓰게 웃었다.
“그나저나 송 교주가 일전불사를 외치지 않고 꼬리를 말다니 의외로구나. 자존심이 세기로 따지면 독후에게도 뒤지지 않는 여잔데.”
진천은 새삼스레 등골이 오싹했다. 검후에게 생살여탈권을 맡긴 것은 도박이었다. 성공하지 않았다면 육각정에서 염왕전으로 직행했을 공산이 컸다.
“그녀는 네게 겁을 먹은 게야. 사경을 헤매고 있어야 할 아이가 팔팔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네 생환결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느니라.”
“잘 하셨습니다.”
진천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네 ‘양단’에 의해 검이 반 토막 난데다, 아, 네 신수의 이름을 양단이라고 붙였다, 아우야. 칼의 극의를 구현했으니. 거창하게 지을 수도 있었지만 자고로 단순할수록 품격이 더 높은 법이다. 소 형의 일점처럼 말이다. 어떠냐?”
“마음에 듭니다, 큰 형님. 멋진 이름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므라든 입술을 활짝 벌리며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그린 권왕이 하던 말을 이었다.
“여하간 네 양단에 검이 두 동강 난데다 내상까지 입었으니 송 교주도 자못 부담스러웠을 게다. 더욱이 너는 또 한 번의 생환결로 내공이 증진되었을 터이니 자신감도 더 커졌을 게 아니냐. 필시 해 볼만하다고 여겼을 테지. 송 교주 정도의 고수가 네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정확한 분석이었다. 진천은 그와 눈싸움을 벌이던 검후의 동공에 깃든 동요를 감지했었다. 하지만 검후가 격돌을 자제한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개인의 감정과 광대한 영토와 수백만 백성을 다스리는 군주로서의 책임감 사이에서 갈등했을 터였다. 화풀이가 월교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은 명약관화했다. 검후는 나름 대승적인 차원에서 분기를 다스리고 사감(私感)을 제어한 것이었다.
권왕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제 머리를 쥐어짜야겠구나. 대체 무슨 수로 막가를 꼬드길 참이냐?”
진천은 즉답을 주지 못했다. 권왕의 말마따나 이제부터 고민을 시작해야 할 터였다.
“불과 몇 시진 전에 막가를 죽이는 것보다 그를 한 편으로 만드는 게 몇 배는 힘들 거라 하지 않았더냐? 그래서 포섭보다는 제거 쪽에 무게를 두자고 했잖으냐? 검후가 급작스럽게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너와 내가 열락궁으로 날아가고 있을 터인데.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네가 묘수를 짜낼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구나. 보름 안에 결판을 낼 거라고 했다고? 시일에 좀 더 여유를 두지 그랬느냐, 아우야?”
권왕의 말을 들으면서 머릿속을 정리하던 진천이 일순 처진 눈을 치떴다. 그 모습을 본 권왕의 가는 눈이 일자로 딱 붙었다.
“호오, 벌써 묘안을 찾아냈느냐?”
“아닙니다, 큰 형님.”
“아니긴, 이 녀석아. 누굴 속이려고. 틀림없이 기발한 수를 떠올린 게야. 어서 이실직고하려무나.”
쓴웃음을 지은 진천이 입을 열었다.
“얼핏 떠오른 거라 생각을 다듬어야 합니다. 다만 기기묘묘한 수법보다는 정공법으로 그를 공략하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그리고 열락궁엔 큰 형님 대신 다른 이와 함께 갈까 합니다.”
권왕이 짧고 굵은 눈썹을 이마로 밀어 올렸다.
“정공법이라니? 아니, 그보다 나 말고 어느 놈하고 가겠단 말이더냐? 물으나마나 장마, 그놈일 테지. 왜, 그놈에게 제 아비를 구슬리도록 읍소라도 시킬 참이더냐? 급하니 네 명민한 머리도 아둔하게 굴러가는구나, 아우야. 어째 내가 보는 걸 보지 못하는 게야. 중걸인지 대걸인지, 그 불퉁스런 놈이 네 말을 들을성싶지도 않지만 설령 듣는다손 치더라도 막가가 들어먹을 턱이 없다.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일장에 너를 때려죽이려 들 거라는데 내 손모가지를 걸어도 좋다.”
고소를 머금은 진천이 권왕의 오해를 풀어주었다.
“제가 같이 가고자 하는 이는 장마가 아닙니다, 큰 형님.”
“그래? 그럼 누군데?”
대답을 하려던 진천은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문 쪽에서 날아온 기음이 그의 기감에 걸린 탓이었다.
중요한 대목에서 대화가 끊기자 권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천은 그의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검후와 동이승에 이어 이날 세 번째로 삼보장을 찾은 방문객을 맞이하러 죽림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