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94
제193화
정오의 방문객은 북운상단의 오재승이었다.
진천을 본 오재승이 갈색 준마를 그에게로 몰고 왔다. 그가 말을 타고 온 적은 처음이었기에 진천은 긴장했다. 무슨 급보일까.
살점 없는 강퍅한 뺨에 새색시처럼 홍조를 띤 오재승이 허둥지둥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숨도 고르지 않고 말했다.
“마침 계셨구려, 진 공자.”
진천은 오재승의 낯빛과 음성에서 그가 불길한 소식을 들고 온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어쩐 일이십니까, 오 단주.”
오재승이 조심스레 소매에서 꺼내 든 금색 봉투를 두 손으로 내밀었다. 봉투 위에 찍힌 문장(紋章)을 본 진천은 오재승이 흥분한 까닭을 알았다. 오각형 안에 두 자루의 도가 엇갈려 있었고 그 아래엔 청룡과 백호가 얽혀있었다. 그것은 정파 무림의 지존인 북천도왕을 상징하는 표식이었다. 문장 옆에는 진천 친전이라는 글귀가 조그맣게 쓰여 있었다.
“일각 전 본단에 정맹의 특급 전서응(傳書鷹)이 날아들었다오. 받자마자 바로 이리로 달려왔소.”
진천은 오재승 앞에서 봉인을 뜯고는 봉투를 열었다. 안에 든 서찰을 펼치니 웅혼한 필체로 단숨에 휘갈겨 쓴 듯한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빠르게 훑어본 진천이 오재승에게 보여주었다. 오재승이 황급히 양손을 모으더니 꼬부랑 노파처럼 상체를 구부렸다.
“감히 받들지 못하오. 거두어 주시오.”
쓴웃음을 지으며 진천이 내용을 알려주었다.
“별 것 아닙니다. 저더러 정맹의 창립기념일에 일신으로 오라시는 명입니다.”
“아! 그렇구려.”
그래도 오재승이 눈을 들지 못하자 진천은 서찰을 품에 갈무리했다. 그제야 오재승이 허리를 폈다.
“안에 들어가시지요. 귀단의 백엽차 같은 명품은 없지만 상급의 작설차가 있습니다.”
“아니외다. 쌓아놓은 업무가 산더미인지라 상단에 돌아가 보아야 하오. 그보다 긴히 알려드릴 정보들이 있소이다. 전서구들이 정맹의 전서응이 오기 직전에 날아들었기에 미처 기록할 짬이 없었소. 그래서 진 공자를 뵌 김에 구두로 전할까 하오만.”
“무엇인지요?”
오재승이 ‘각지’의 상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올려 보냈다는 일급정보들을 풀어놓았다. 거의 대부분 진천과 관련된 내용들이었다.
진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재승이 방금 그에게 알린 정보들은 지금쯤 대륙 전역에 퍼지고 있을 터였다. 내용인즉슨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하남신룡의 활약상이었다.
지난 몇 달 간 하남신룡에 패한 이들의 명단은 실로 화려했다. 장마 소중걸, 창천도군 문찬경, 검마 나오권, 그리고 몰살도 곽건.
근간에 공개된 정보에 따르면 장마는 이미 오월에 세평회의 인사들과 마령 문가의 도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남신룡에게 일패도지했다고 했다. 비무의 양상은 구월에 있었던 하남신룡 진천과 섬전도 강민 간의 대결 때와 대동소이했다. 신출귀몰한 신법을 펼쳐 장마의 강공을 여유롭게 흘려낸 하남신룡은 단 한 차례의 공격으로 승부를 매조지었다. 섬전도 때와 마찬가지로 일방적인 승리였다.
정맹에서 있었던 창천도군과의 일전은 그렇지 않아도 근래 초미의 관심사로 인구에 회자되는 중이었다. 당시 태평전 경내에서 치러진 재대결은 정심원의 원로들만 참관했었는데 그 결과를 두고 온갖 억측이 횡행했다. 든든한 동료들의 관전 하에 안방에서 싸운 창천도군이 노장의 위엄을 과시하며 전날 구인결에서 당했던 망신을 설욕했을 거라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었지만, 신묘한 신법의 소유자인 하남신룡이 약세나마 꽤 오래 버텼을 거라 추측하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이번에 알려진 실상은 세간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장마와 섬전도를 상대로 선보였던 신비한 신법으로 창천도군의 파상공세를 무마시킨 하남신룡은 끝내 그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했다. 스스로 칼을 거둔 창천도군은 하남신룡을 극찬함으로써 패배를 자인했다. 하남신룡은 압도적인 무위에도 불구하고 창천도군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음으로써 강호의 존장에 대한 예의를 지켰다.
창천도군의 연패도 경악스러운 사건이었지만 검마의 변을 따를 수는 없었다. 마련이 장악한 문천으로 쳐들어간 세평회는 그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검마류의 본진과 충돌했다. 그 싸움은 전과 마찬가지로 세평회의 대승으로 끝났다. 세평회의 무인들은 전 무림에 위명을 떨친 육지마검 남진철을 비롯한 검마류의 검호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하지만 그들의 전과는 하남신룡 일인이 거둔 전과에 비할 수 없었다. 하남신룡은 단독으로 검마와 맞서 단 삼초 만에 그의 팔을 자르고 단전을 깨뜨렸다고 했다.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가히 천하가 뒤집힐 일이었다. 단순히 무력을 견주는 비무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부딪치는 생사투였다. 쌍방의 진신무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혈투에서 검마를 맞아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자는 팔대무왕을 제외하고는 무림을 통틀어 단 한 명도 없었다. 검마 나오권은 마련의 이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초강자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위업을 이루었으니 더 이상 하남신룡을 ‘최고의 후기지수’라는 이름으로 묶어두기는 불가능했다. 그는 장마나 섬전도, 혹은 몰살도 따위가 아니라 마땅히 무왕들과 비견되어야 했다.
혹자는 무림사의 신화적 존재인 천무대제 이강을 소환하기도 했다. 상운의 첩지에 몇몇 문통이 그 불멸의 이름을 언급했다는 오재승의 전언에 진천은 낯을 붉혔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몰살도 곽건과의 일전은 검마로 인해 사소한 사안으로 치부되었다. 양자호에서 주제를 망각하고 하남신룡에게 덤빈 몰살도가 단 일 초에 폐인이 되는 참화를 입었다는 소식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기에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상운은 그 정보를 아예 이급으로 분류했다. 몰살도의 불운은 지나가는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진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관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 정보들의 발원지가 어디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오재승에 따르면 그가 가지고 온 정보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출처가 불분명하다고 했다. 상운의 특급문통들이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정보의 내용과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조직은 사패밖에는 없었다. 월교는 애당초 그의 전적에 대해 알지 못하니 논외고 마련이나 사벌에서 검마와 곽건의 변고를 누출했을 리도 만무하니 남은 곳은 한 군데 뿐이었다.
진천은 씁쓸했다. 정맹의 행사 뒤에 외조부가 도사리고 있음은 불문가지였다. 외조부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훤히 보였다.
기존의 전략을 송두리째 바꾸어야 했기에 썩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으나, 진천은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도로 담을 수 없다면 현재의 조건에서 최선의 수를 새로이 찾는 게 나았다.
대웅은 동이승과 함께 미시(未時) 말에 떠났다.
대웅은 배웅을 마다했다. 떠나기 전 그는 노미현, 그리고 진천과 차례로 독대를 가졌다. 대웅은 노미현과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진천에게 말하지 않았고 진천도 묻지 않았다. 진천은 대웅이 말하지 않음으로써 전하고자 했던 말을 알고 있었다.
모두들 마당으로 나와 정문을 나서는 대웅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추풍이 낙엽을 몰아와 대웅의 앞길에 뿌렸다. 바삭한 나뭇잎이 그의 발에 바스러졌다. 삼보장 인사들은 그 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질 때까지 한참 동안 제 자리에 서 있었다.
쾅, 쾅, 쾅.
열 개의 벼락이 동시에 떨어진 듯한 굉음이 지하연무장을 흔들었다.
무지막지한 경력을 실은 권왕의 권강(拳剛)이 연신 허공을 때렸다. 만근거석도 가루로 내버릴 위력이었으나 공중을 배회하는 진천을 어쩌지는 못했다. 아무리 강한 주먹이라도 유령을 때려눕힐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극성의 팔영보로 권왕의 공격을 회피하면서 진천은 쉴 새 없이 반격을 가했다. 그의 좌수에서 발출된 비수와 밧줄과 칼이 권왕에게도 신법을 펼치도록 강요했다. 진천의 절멸도가 호신강기만으로는 방어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생사대적과 싸우기라도 하는 양 격렬하게 치고받던 노소는 동시에 손을 멈추었다. 바닥에 착지한 권왕은 서 있기도 힘든지 아예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의 옆에 떨어진 진천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숨을 고르는 진천을 일별한 권왕이 푸념했다.
“이 노형은 정말 갈 때가 되었나 보나, 아우야. 이 정도로 전신의 뼈마디가 쑤시다니. 예전에는 보름 내내 쉬지 않고 싸우고도 끄떡도 없었는데. 좀 적당히 하지, 이 녀석아. 이러다 골병이라도 들면 책임을 질 테냐?”
푸념이 과장으로, 그리고 다시 불평으로 바뀌자 진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권왕은 엄살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진천 역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외조부와의 극한수련 때만큼이나 탈진지경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우야?”
“글쎄요, 사흘이나 나흘 정도일 듯싶습니다.”
“그래? 나는 적어도 닷새는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지도 모릅니다.”
진천이 ‘모른다.’고 하면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는 권왕이었지만 말꼬리를 잡지 않았다. 하루나 이틀 정도라면 몰라도 햇빛이 들지 않는 지하연무장에서 시간의 경과를 정확히 파악하기란 어려웠다.
“그나저나 네 무영은 참으로 천외천의 비학이구나. 내가 작심하고 일권파천황(一拳破天荒)을 부렸다고 해도 너를 잡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구나. 절초들을 모조리 아우르는 무영을 발현했으니 팔영보는 이제 정점에 이르렀을 테지, 아우야?”
진천은 신중하게 대답을 골랐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상대로 권왕의 일자 눈이 휙 올라갔다.
“여기서 더 올라갈 데가 있다고? 너무 욕심을 부리는 거 아니냐? 과욕이 탈을 초래하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지 알 테지? 주화입마에 든 자들은 대부분 거기서 출발한단 말이다.”
농담이 아닌 듯 권왕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진지하고 엄격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큰 형님.”
권왕의 뺨이 누그러졌다.
“노파심에서 한 소리다만, 쓸 데 없는 잔소리임을 안다. 너처럼 뼛속 깊이 무욕인 아이는 온 세상을 뒤져도 찾기 어려울 터인데. 그렇더라도 무리는 하지 말거라. 네 발전 속도는 나조차 두려울 정도니라.”
“알겠습니다, 큰 형님.”
“네가 부족하다고 느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아니면 나와 비무하던 중에 또 다른 상승의 실마리를 발견한 게냐?”
“아닙니다.”
“아니긴, 이 녀석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속 시원히 털어놔 보거라. 너와 나 사이에 감출 게 뭐가 있느냐?”
“……무영이 팔영보의 최종 단계이자 완성형임은 틀림없을 듯싶습니다.”
“그렇지? 그러면 네 스스로 그 이후의 단계를 창안하려는 게냐?”
“그보다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라니?”
“큰 형님도 아시다시피 팔영보는 고대의 환인(幻人)들이 남긴 절기입니다.”
“그래서?”
“무림이 태동한 천 년 전까진 단전에 내공을 쌓는 수단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권왕의 일자 눈이 한껏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