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95
제194화
벌떡 상체를 일으킨 권왕이 진천의 뒷말을 재촉했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팔영보는 공력이 아니라 다른 기운으로 구사하는 비술이었을 것입니다.”
“옳거니. 그 이기(異氣)를 찾은 게로구나.”
“아닙니다. 여러 모로 궁리도 하고 시험도 해보았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습니다.”
“흠, 어쨌거나 발상을 했으니 언젠가는 답이 나오겠지. 네 앞길이 창창하니 해법의 발견은 시간문제일…….”
무심코 말을 뱉어내던 권왕이 실수했음을 깨닫고는 뒷말을 얼버무렸다. 진천은 미소로써 의형의 자책감을 덜어주었다.
“설사 해법을 찾는다고 해도 꼭 지금보다 나을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어쩌면 공력으로 운용하는 현재의 팔영보가 아득한 옛날 환인들이 펼쳤을 환법을 훨씬 능가할지도 모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우야. 그러니 이기(異氣)니 뭐니 너무 집착하지 말고 차라리 완숙한 경지에 오르는 데 신경을 쓰려무나. 그게 네 목표를 이루는 데 그나마 현실적인 도움이 될 게야.”
진천은 처진 눈을 올렸다. 권왕은 그의 속을 읽은 것이었다.
진천의 목표는 ‘일점’의 파훼였다. 검왕이 쏘아내는 일점을 피할 수만 있다면 천지 간에 그를 위협하는 무공은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일점에 대처하려면 세 가지 방법 밖에 없었다.
첫째, 일점이 뚫지 못하는 철벽을 두를 것. 완벽한 금강불괴지체였다던 천무대제 이강에게만 허락된 비법이었다.
둘째, 검왕이 일점을 발하기에 앞서 그를 죽일 것. 역시 일수멸세(一手滅世)의 위명을 지닌 천무대제가 아니면 해내지 못할 일이었다.
셋째, 일점에 당하기 전에 피할 것. 진천으로서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하지만 진천은 설사 무영이 최고조에 달할지라도 일점을 빗겨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의 본능은 완전한 회피가 불가능할 것임을 알리고 있었다.
일점은 시작점을 가지지 않는 검공이었다. 검왕은 어떤 위치에 있더라도 마음을 먹은 순간 그가 노린 곳에 보이지 않는 검을 찔러 넣을 수 있었다. 문자 그대로 심검(心劍)이었다.
진천은 아쉬웠다. 권왕의 말마따나 시간이 넉넉하다면 일점에 대응할 수단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 지금으로선 무망한 꿈이었다.
그렇더라도 진천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참이었다. 궁극의 무학에의 도전은 성패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조금씩이라도 성장할 것이었다. 그 성장이 사마의 무리를 무찌르는 데 도움이 될 것임은 불문가지였다.
방금 전의 실언이 부담스러웠던지 권왕이 화제를 돌렸다.
“나는 오늘 확신했다, 아우야. 네 환생결 말이다. 전부터 뭔가 찝찝하다고 느꼈는데 이제 확실히 알았다. 그 기공은 단지 공력만 증강시키는 게 아니지? 네가 환생결을 치른 후엔 어김없이 무공도 진일보했단 말이지. 필시 환생결엔 상단전을 깨우치는 효능도 있는 게야. 그렇지? 미리 경고컨대 부인하지 말거라. 그건 내 안목에 대한 모독이니라. 내가 모욕을 참는 사람이 아님을 알지?”
권왕의 엄포에 진천은 쓰게 웃었다.
“아주 영향이 없지는 않을 테지만 엄격하게 말하자면 환생결에 뇌를 활성화하는 공능은 없습니다, 큰 형님. 다만 내력이 증진됨에 따라 머릿속으로만 구상하던 절초들을 실제로 구사할 수 있게 된 점은 있습니다. 창인을 떠날 무렵 저는 고작 두 자루의 절멸비만 날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요. 지금은 한 번에 여섯 자루를 연달아 여러 번 발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각 비수의 속도와 방향과 힘을 조절하면서요. 숙련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 대부분은 이전부터 내공이 쌓이면 실행해보려고 심중에 그려놓았던 절기들이었습니다.”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권왕의 모습에 진천은 설명을 보탰다.
“큰 형님도 짐작하시겠지만 제 외조부님과의 비무수련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지도 덕분에 절멸도법의 처음과 끝을 확연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짙은 안개 속을 헤매다 햇빛이 만물에 선명함을 선사하는 땅으로 나온 기분이었습니다. 오늘 큰 형님께서 제 무공이 조금이라도 나아졌다고 느끼셨다면 아마도 양단 때문일 거라 사료됩니다. 제가 보기에도 검왕 어르신이나 검후 어르신을 상대했을 때보다 반의반 치라도 나아간 듯싶습니다. 그러나 진일보라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위대한 무왕들에게 연이어 가르침을 받으며 거칠었던 부분이 다듬어진 것뿐입니다.”
진천을 지그시 바라보던 권왕이 천장으로 시선을 올렸다.
“무정한 하늘 같으니. 모처럼 불세출의 무재를 내렸으면 진득하게 두고 볼 일이지 어찌하여 그리도 일찍 데려가려 한단 말이더냐.”
탄식하는 의형을 달랠 말을 찾지 못한 진천은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진천은 지하연무장을 나왔다.
해가 져서 어둑어둑했다. 등을 걸러 나온 차소영에게 날짜를 물어보니 사흘이 지나있었다. 권왕과 함께 지하연무장에 들었을 때는 해 뜰 무렵이었으니 정확히 사흘하고도 반나절 동안 비무 수련을 한 셈이었다.
청와옥에 들어간 진천은 소중걸을 불러냈다. 그러고는 그에게 후원으로 가자고 청했다. 별채를 지난 진천은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소중걸은 묵묵히 그를 쫓았다. 천년노송에 이른 진천은 너럭바위에 앉으며 소중걸에게도 착석을 권했다. 소중걸은 진천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두 사내는 잠시 만월이 되어가는 천공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진천이 입을 열었다.
“오늘 밤에 열락궁에 가려하오.”
“…….”
진천은 고개를 돌려 대꾸도 없고 시선도 내리지 않는 소중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매부리코와 사각 턱이 그리는 윤곽이 사뭇 인상적이었다. 미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사내다운 생김새였다.
“하 소저와는 잘 되어가오?”
허를 찔린 소중걸이 움찔했다.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건가?”
소중걸의 말문을 여는 데 성공한 진천이 슬쩍 눙쳤다.
“소 형의 분투는 근래 삼보장 최고의 관심사 중 하나가 아니오? 내가 지하연무장에 들어가 있는 동안 진전이 있었는지 궁금했소. 모두들 소 형을 응원하고 있으니 성과가 있을 거라 보는데, 어떻소?”
농담만은 아니었다. 소중걸은 의외의 친화력을 과시하며 빠른 속도로 세평회에 녹아들었다.
여전히 과묵했지만 모두를 격의 없이 대하며 잘 어울렸다. 반 년 전 진천에게 패한 후 얼마 간 삼보장에 머물렀을 때하고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소중걸은 하수린에 대한 연심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적극적으로 구애공세를 펼쳤다. 그는 금성 혈사에서 중상을 당해 거동이 어려운 하수린의 시종 노릇을 자처하면서도 비굴하게 보이지 않는 묘한 매력을 풍겼다. 세평회 인사들은 그런 그에게 호감을 표했다. 내밀한 감정을 눈썹과 목소리에 그대로 담는 하수린도 그가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소중걸의 대답에 진천은 미소를 머금었다.
“소 형의 노력이 보상을 받기를 기원하겠소.”
대화 주제가 부담스러운지 소중걸이 진천이 애초에 꺼냈던 화제로 돌아갔다.
“일전에 말했듯 권왕과 네가 ‘그’를 죽이든 말든 상관없다. 그러니 굳이 나에게 알릴 필요 없다.”
“계획이 바뀌었소. 장왕을 처치하지 않을 거요.”
소중걸이 진천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냐?”
진천에게서 즉답이 나오지 않자 소중걸의 고리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면 왜 열락궁에 가려는 게냐?”
“그에게 속죄의 기회를 줄 참이오.”
“……?”
“그는 기벽을 채우기 위해 지난 수십 년 간 수천 명의 무고한 인명을 독살했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이나…….”
“말을 돌리지 마라. 그를 끌어들이겠다는 말이 아니더냐?”
진천은 단도직입하기로 했다. 소중걸은 말수가 적되 우둔한 이는 아니었다.
“그렇소. 그를 설득해 사마의 무리를 타도하는 데 동참시킬 작정이오.”
“…….”
“성사 가능성은 반반이나 만약 일이 내 의도대로 풀린다면 장왕은 곧 이곳에 오게 될 거요.”
“…….”
진천은 소중걸의 침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소중걸은 입을 여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천이 그의 소매를 잡았다.
“소 형이 반대하면…….”
소중걸이 진천의 말을 막았다.
“나는 객에 불과하다. 네가 누구를 데리고 오든 왈가왈부할 입장이 아니다.”
“그렇지 않소. 여기 모두가 소 형을 이미 한 식구로 생각하고 있소. 소 형도 알잖소? 금성에서 소 형에게 구명지은을 입어서만이 아니라…….”
“됐다. 그만 해라.”
진천은 소중걸에게 시간을 주었다. 장왕은 그에게 애증이 섞인 존재이나 애정보다는 증오가 훨씬 크고 깊었다. 그러니 그로서는 장왕의 도래가 달가울 리 없었다.
소중걸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네 행사를 방해할 생각이 없으니 뜻대로 해라.”
진천의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소중걸이 발걸음을 옮겼다. 진천은 그의 등에 대고 사과했다.
“미안하오, 소 형. 나도 내키지 않지만 사벌과도 대치하게 된 지금의 국면에서 다른 묘책이 없구려.”
소중걸은 계속 걸음으로써 진천과 더 이상의 얘기를 나눌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진천의 이어진 말에 발길을 멈추어야 했다.
“권왕 어르신은 나와 함께 열락궁에 가지 않으실 거요.”
소중걸이 몸을 돌렸다.
“무슨 말이냐?”
“권왕 어르신이 같이 가시면 장왕을 설득하기 어렵소. 그분을 보자마자 불문곡직 달아나려 들 테니까.”
“그럼 너 혼자 가겠다는 건가?”
“아니오. 한 사람이 동행할 거요.”
숯 검댕이 같은 소중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나를 불러낸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나는 너를 존중하고 기꺼이 네 명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이건 따를 수 없다. 싫어서가 아니라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를 모른다. 내가 아들이라고 그가 사정을 봐 줄 거라 여긴다면 오산이다. 내가 아무리 말려도 너를 일장에 쳐 죽이려 들 거다. 가지 마라. 갈 거면 반드시 권왕과 함께 가라. 양자호의 일로 사벌과 척을 지는 바람에 어려워진 걸 안다. 내가 힘을 보태마. 그보다는 못하겠지만…….”
진천은 간신히 끼어들었다.
“잠깐, 몇 가지 오해를 바로잡아야겠소.”
소중걸의 입에서 쏟아지던 폭포수가 뚝 그쳤다.
“우선 나는 소 형에게 명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오. 우리는 어디까지나 동등한 동지일 뿐이오. 그리고 나와 열락궁에 동행할 이는 소 형이 아니라 명이오.”
혼자 설레발을 친 것이 민망했던지 소중걸의 면상이 붉어졌다. 하지만 심중의 의구심을 목구멍에 가둬두지는 않았다.
“그녀와 너, 둘이서 그를 대적할 수 있단 말이냐?”
“우리는 싸우러 가는 게 아니오.”
“…….”
“물론 장왕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힘을 보여줘야 할 거요. 그렇더라도 명은 나서지 않을 거요. 그녀의 역할은 따로 있소.”
소중걸의 각진 턱에 세로 주름이 잡혔다.
“설마 너 혼자 그를 감당할 수 있다는 건가?”
“쉽진 않겠지만 시도해 볼 참이오.”
말문이 막힌 소중걸에게 진천이 뒤늦은 감사인사를 던졌다.
“우리와 함께 하기로 결정해 주어서 고맙소.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오. 진심이오.”
“…….”
“이제 들어갑시다. 다른 이들에게도 출정을 알려야 하니.”
명은 신이 났다.
평생 처음 장을 구경하러 나선 아이처럼 들뜬 그녀를 보며 세평회 인사들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이번 출행의 무게와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었기에 불안감도 감추지 못했다.
기실 불안의 원천은 명이 아니라 진천이었다.
권왕이 같이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친인들은 극력 진천을 말렸다. 그들을 안심시켜 줄 수 있는 이는 권왕 뿐이었으나, 그는 시치미를 뚝 떼고 ‘무모한 짓거리’ 운운하며 중인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진천은 여러 차례 무사귀환을 장담함으로써 겨우 친인들을 진정시켰다. 친인들의 염려 속에 진천과 명은 술시(戌時) 말에 삼보장을 떠났다. 열락궁이 있는 정진까지는 이천사백 리 길이었지만 다음 날 아침까지는 당도할 수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