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97
제196화
진천은 전날 지하연무장에서 명이 검후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명은 지나칠 정도로 검후를 두려워했다. 어린 시절 그녀에게 당한 무자비한 공격으로 심혼에 공포가 새겨진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명은 겁쟁이가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누구보다도 호전적인 성정이었다. 공 노인은 인간과의 합일로 후세의 배출이 유일하게 가능한 아리우족이 수많은 요괴들 중 최강의 전투종족이라고 했었다. 천무대제 이강이 그랬듯 아리우족은 타고난 전사들이었다.
진천은 단순한 심상 외에 다른 원인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명은 자신의 과거를 제대로 구성하지 못했다. 대부분 파편적인 기억들이었고, 그나마도 검왕에게 오기 이전의 시절은 시커먼 암흑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동굴 밖의 여인이 누군지, 그녀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단박에 알았다. 이는 기이한 일이었다.
검후가 명을 선뜻 포기하고 월교로 돌아간 것도 석연치 않았다. 진천은 그녀가 양보하지 않을 가능성이 오 할을 넘으리라 보았다. 그래서 내심 일전불사까지 각오했었다. 완고한 태도를 견지하던 검후가 물러선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진천은 그녀에게 무언가 확실한 담보가 있지 않았을까 추정했다. 하시라도 마음만 먹으면 명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굳이 고집을 부릴 까닭이 없었을 터였다.
그게 무엇일까. 명이 검후에게 지닌 공포심만은 아님에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명은 이미 두려움을 무릅쓰고 그녀를 거역했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명이 명에 응하지 않고 그와 함께 있을 거라고 부르짖었을 때, 검후가 보였던 반응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녀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면사가 떨어질 정도로 놀라움을 드러냈었다. 그러고는 원초적인 노여움을 담아 그에게 윽박질렀다.
‘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곱씹을수록 미묘한 말이었다. 그날 진천은 검후에게 되묻고 싶었다. 명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고.
목소리.
주문(呪文).
진천은 언뜻 영환문(靈幻門)을 떠올렸다. 현재는 사벌에 속하는 영환문은 기실 정사마로 분류하기 어려운 잡파(雜派)였다. 문(門)이라곤 하나 영술(靈術)을 익힌 자들을 뭉뚱그려서 부르는 이름일 뿐이었다. 성세도 보잘것없었다. 영환문의 위세는 어지간한 중소방파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전통으로만 따지면 영환문은 강호의 어떤 방파에도 뒤지지 않는 명문이었다. 그들의 기원은 무림 태동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무림 초창기엔 무공을 익힌 영환문의 술사(術士)들이 고수 대접을 받으며 득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영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이술(異術)에 대한 파훼법이 속속 등장한 데다 절정의 무인들에겐 어떤 술법도 통하지 않음이 증명된 탓이었다.
무공에 재능이 부족하나 인간의 한계를 넘는 이력(異力)에 대한 욕심만큼은 차고 넘치는 자들이 어느 시대에나 있었기에 영환문은 쇠락일로를 걷는 와중에도 소멸되지 않고 명맥을 유지했다. 오늘날에도 무림과 흑도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발을 걸치고서 미약하나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천은 생각했다.
검후는 영환문 계열의 술법을 익히지 않았을까. 반세기 전의 월교는 이런 저런 연유로 정사마를 등진 군상이 판을 치는 복마전이었다. 강호에서 천덕꾸러기로 취급받는 영환문의 술사들이 월교로 흘러들어왔을 거라고 해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검후는 아수라마검 장일청의 제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의 출신이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녀는 혹시 월교에 똬리를 튼 술사들 중 누군가와 인연을 맺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때 배운 술법을 명에게 써 먹은 것은 아닐까.
영환문의 술사들은 피시전자의 이지를 흐린 후 사이한 주문으로써 그들의 심혼을 제압하고 통제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내공을 지닌 무인들에겐 무용지물이지만 범인들에겐 여전히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사술이었다.
명이 단전에 내공을 쌓지 못하는 반인반괴임을 안 순간 검후는 그 사술을 시험해보지 않았을까. 그녀로서는 밑져야 본전일 테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으리라. 그런데 망외의 성과를 거두어 횡재한 기분이 아니었을까.
명의 질문에 정신을 차린 진천은 쓰게 웃었다.
억측일 뿐이었다. 어째서 ‘목소리’라는 단어 하나에 황당한 상상을 펼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오, 명. 조금도 화나지 않았소. 내가 그럴 리가 없잖소?”
진천의 부드러운 음성에 안심이 된 듯 명이 삐뚠 입술을 실룩거렸다. 미소였다.
“이제 갈 수 있겠소? 힘들면 내가 안고 달리리다.”
언제 까무러쳤냐는 듯 씩씩하게 몸을 일으키는 명을 보며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장왕에게 집중해야 할 때였다.
정진은 수백만 평 넓이의 평야였다.
열락궁은 그 평야의 중앙에 혹처럼 불룩 솟아있었다. 이국적인 둥근 지붕 아래 팔면의 금벽(金壁)을 두른 거대한 궁전은 월교 황금대궐의 해체 이후 천하에서 가장 화려한 건축물로 손꼽혔다. 열락궁을 치장하는 데 들어간 보석으로 중원 대륙의 절반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우스갯소리도 나돌았다.
열락궁은 ‘미인들의 무덤’이라는 별칭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지난 사오십 년 간 열락궁에 들어간 미녀의 수는 물경 오천을 헤아렸으나, 밖으로 나온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아무도 열락궁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미지는 두려움을 낳는 법이었다. 열락궁의 주인인 장왕은 세인들의 뇌리에 하늘 아래 으뜸가는 악마로 자리 잡았다.
새벽녘에 정진에 이른 진천은 열락궁으로 직행하지 않고 들판 가장자리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암습이 목표가 아니었기에 환한 햇빛 아래서 모습을 드러낼 참이었다.
대기가 지루한지 명이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연신 부스럭거렸다. 진천은 그녀를 내버려두었다. 주위에 인기척도 없거니와 설사 은신을 들킨다 해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미명이 터오더니 동산에 해가 떠올랐다. 진천은 일어서서 옷에 묻은 흙을 털었다.
“이제 갑시…….”
진천은 말을 맺지 못했다. 명이 갑자기 그의 팔을 잡아당겼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의도를 이해한 진천이 얼른 엎드렸다. 무릎 높이의 수풀이 그와 명을 가렸다.
잠시 후 진천의 기감에도 빠르게 접근하는 기운들이 잡혔다. 진천은 다시 한번 명의 청력에 감탄했다. 그녀는 수백 장 너머의 나무에서 낙엽이 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진천과 명이 숨은 곳에서 좌측으로 이삼십 장 떨어진 방면에 세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엄청난 속도로 경신을 전개하며 순식간에 열락궁으로 멀어졌지만 진천은 그들의 정체를 쉬이 파악했다. 적어도 둘은 확실히 알았다.
맨 왼쪽에 있던 칠 척 장신의 괴인은 전날 장왕과 함께 지하연무장으로 쳐들어왔던 화염장 기상길이었다. 장마라는 별호를 소중걸에게 빼앗겼지만 그는 사실상 장마류 최강의 마인이었다.
중앙의 외팔이는 독마(毒魔) 연지강임에 틀림없었다. 좌수가 없다는 신체적인 특징에 더해 양안에 일렁이는 녹광(綠光)이라면 그 말고는 떠올리기 어려웠다.
우측에서 달리던 자는 도마(刀魔) 단리중(段里重)일 공산이 컸다. 진천이 그렇게 추측하는 근거는 화연장과 독마에 비해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경공과 기세였다. 그리고 등 위로 삐쭉 튀어나온 대도(大刀)였다.
삼인의 정체를 가늠한 진천은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의 절멸비에 의해 단전이 깨지고 오른팔이 잘린 검마 나오권을 제외한 마련 사마류의 일인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열락궁을 찾은 연유는 불문가지였다. 필시 장왕에게 마련에의 합류를 요구하기 위한 방문일 터였다.
진천은 난감했다. 만약 장왕이 남천도왕의 가세를 들먹이며 그를 꼬드길 그들의 설득에 넘어간다면 애써 궁리했던 계획이 시작부터 틀어지게 될 판이었다. 장왕의 비중은 실로 컸다. 그 자신이 판세를 좌지우지할 변수가 될 수 있을뿐더러 검후까지 걸려있기 때문이었다.
명이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진천은 절로 쓴웃음이 났다. 예정대로 어제 아침에 왔으면 벌써 장왕의 일을 처리하고 지금쯤 삼보장으로 귀환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명의 발작과 혼절에는 그의 책임도 작지 않았기에 그녀를 탓할 수는 없었다.
“일단 추이를 지켜봅시다.”
진천은 행동을 유보했다. 지금 열락궁의 문을 두드리는 건 무모한 처사였다. 명은 삼마(三魔) 중 누구와도 해 볼만 했지만 둘은 역불급이었다. 그들의 진영에 장왕이 포함된다면 대전(對戰)은 필패였다.
노란 해가 푸른 하늘을 느릿느릿 기어올랐다.
좀이 쑤시는지 명이 끊임없이 꿈틀거렸다. 진천은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다독였다. 그러면서도 간간이 엄한 눈빛으로 명의 돌발행동을 견제했다. 명은 기다림을 배워야 했다. 인내심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해가 서녘으로 기울며 천공에 노을이 번지기 시작하자 진천도 조바심이 생겼다. 더 늦어지면 권왕이 그의 변고를 가정하고는 움직일 공산이 컸다.
진천은 한 시진가량 더 기다려보고 진퇴를 결정하기로 했다. 인내심은 보답을 받았다. 광휘를 거두고 붉은 색만 남긴 태양이 지평선에 닿으려는 찰나 열락궁에서 삼인이 빠져나왔다. 너무 멀어 표정을 살필 수 없었기에 그들이 목적을 달성했을지 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장왕이 같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설득에 실패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이제 장왕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기에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장왕이 삼마와 동행했다면 만사휴의였을 터였다.
진천은 삼마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동안 기다렸다. 그러고는 해를 밀어낸 어둠이 들판을 가득 메우고서야 풀숲에서 일어섰다. 명은 진천을 따라서 열락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월광을 받아 더욱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는 열락궁에 이른 진천은 황금대문 앞에 가만히 서있었다.
그의 옆에 선 명이 소곤거렸다.
진천도 열락궁 내부의 소란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의 별호인 하남신룡이 도처에서 들렸다.
일다경의 시간이 지난 후 진천은 고개를 들었다. 대문 위의 벽이 갈라지더니 보름달 같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눈부신 백금의(白錦衣)를 걸친 장왕 막우천이었다.
진천을 내려다보며 장왕이 물었다.
“뭐 하자는 수작이냐?”
마치 어린아이가 내뱉은 것처럼 얇고 높은 음성이 고막을 찌르자 명이 인상을 썼다.
“당신과 할 얘기가 있어서 왔소.”
진천의 대답이 해석난망인지 장왕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어디 있느냐?”
진천은 실소했다.
“내 의형께선 오시지 않았소. 이미 확인했을 거 아니오?”
장왕이 바로 불청객을 맞으러 나오지 않고 시간을 끈 것은 열락궁 지하에 사방으로 뻗은 비로(秘路)에서 권왕의 은신을 탐지하느라 그랬던 것이었다. 장왕은 열락궁을 중심으로 반경 수백 장을 샅샅이 훑어보았을 터였다.
“웃기지 마라. 틀림없이 벌판 저쪽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을 테지, 음흉한 늙은이.”
“그렇지 않소. 당신을 치러 왔다면 뭐 때문에 그런 복잡한 수를 쓰겠소? 아무도 모르게 잠입한 연후 기습을 노리는 게 백번 낫지. 안 그렇소?”
“나더러 네놈이 혼자 왔다는 것을 믿으라고?”
“무슨 소리요? 보다시피 나에겐 일행이 있잖소.”
“……그 흉측한 쥐방울은 뭐냐?”
진천은 장왕에게 튀어 오르려는 명의 어깨를 잡았다. 급전은 바람직한 전개가 아니었다.
“이 여인은 명이오. 명은 검후 어르신의 제자이자 검왕 어르신의 전인이오.”
“뭣이!”
오륙 장 높이의 난간 끝에 선 장왕의 비대한 체구가 추락할 듯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