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99
제198화
장왕이 불쾌함을 드러내건 말건 진천은 할 말을 했다.
“처음에 얘기했듯이 우리는 당신에게 그간 지었던 태산 같은 죄업을 조금이라도 씻을 기회를 주려 하는 것이오. 이점, 명심하길 바라오. 사마의 무리를 소탕한 후에도 당신이 얻을 전리품은 없소. 좀 전에 열락궁을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말 그대로 정리하는 게 좋을 거요.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을 테니까. 사마와의 전쟁이 끝난 후 당신은 자유요. 하지만 권력을 쥘 수도 없을뿐더러 다시는 이전과 같은 악습을 되풀이할 수 없소. 가두어두지는 않겠지만 중원의 어디에 있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죄과를 참회하며 당신의 악행에 희생된 분들의 넋에 용서를 빌어야 할 거요.”
장왕이 진천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진천의 준엄한 눈빛에 슬그머니 시선을 떨어뜨렸다.
“마지막으로 경고하건대 오늘의 약속을 어기고 달아나면 기필코 쫓아가 당신의 명줄을 자르겠소. 설사 당신이 지난번처럼 서역(西域)에 잠입한다고 해도…….”
살에 파묻힌 눈을 크게 뜬 장왕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헉!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제대로 짚었음을 확인한 진천은 하마터면 미소를 지을 뻔했다.
장왕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독후처럼 행방이 묘연했었다. 거의 이 년 전 고화산에서 모습을 드러내고는 소재가 오리무중이었다. 그러고는 전날 느닷없이 오양에 나타난 것이었다.
고화산은 산서 무림의 서단에 위치한 험산이었다. 진천은 고화산의 위치로부터 장왕의 행선지가 서역이었을 거라 추정했다. 바다만큼 넓다는 거대사막을 건너고 높이가 수천 장에 이른다는 대산맥을 넘으면 나온다는 이역엔 그가 원하는 녹안의 미녀들이 즐비할 터였다. 서역을 왕래하는 상인들로부터 장왕으로 보이는 괴인이 그곳에 출몰해 소동을 일으켰다는 정보가 흘러나오지는 않았지만 장왕 같은 절대고수에겐 코끼리만한 몸을 가지고도 생쥐처럼 범인의 눈에 띄지 않고 다니는 정도는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었다.
진천이 마무리를 지었다.
“서역이든 어디든 나는 당신을 찾아낼 수 있소. 그러니 딴 생각 말고 우리의 합의를 충실히 이행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요. 그러면 적어도 천수는 누릴 수 있을 터이니.”
진천은 그의 협박에 반발하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장왕을 응시한 후 명에게 눈을 돌렸다.
“볼 일을 마쳤으니 그만 갑시다, 명.”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입을 벌리지 않는 명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답을 대신했다.
진천은 장왕을 일별한 후 몸을 날렸다. 명이 지체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장왕은 푸들거리는 눈을 들어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그림자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난제를 해결한 진천은 홀가분해졌다.
정진의 평야를 벗어나자 명이 장왕을 본 감상을 밝혔다.
진천은 고소를 지었다.
“간절한 욕구가 해소되지 않으면 먹는 걸로 위안을 삼는 이들이 있소. 그도 아마 그런 부류일 거요.”
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진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기실 장왕은 그가 쳐둔 덫에 걸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시라도 승부를 중단할 수 있는 비무라는 안전망을 깐 후 진천은 실제로 그와 겨루면서는 생사투에 임하는 마음가짐으로 맹공을 퍼부었었다. 무력이 아니라 그의 기세에 눌린 장왕은 냉정하고도 정확한 형세판단을 하지 못하고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백기를 든 것이었다.
“그는 힘은 강하나 마음은 그만큼 강하지 못한 위인이오. 그를 무찌르겠다는 내 결의가 단단함을 느끼고는 투지를 잃었을 게요. 물론 물러날 구석이 있었기에 그랬던 부분도 상당하오. 강적과 대면했을 시 불퇴전의 의지는 필수요. 제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겁을 먹으면 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법이니.”
진천의 설명을 듣던 명이 반 토막 눈썹을 찡그렸다. 진천은 그녀가 검후를 떠올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가 발작하면 곤란했기에 진천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서두릅시다. 나는 모레 오전까지 일신이란 곳에 가보아야 하오. 아주 먼 곳이라 지금부터 쉬지 않고 달려야 제때 도착할 수 있을 거요. 명을 삼보장에 데려다준 후…….”
명이 진천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진천은 갈등했다. 명이 계속 졸랐다. 검후의 반응이 신경 쓰였지만 진천은 명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럽시다. 대신 누가 이유 없이 공격하는 것 같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무력을 써서는 안 되오. 우리는 정파 무림의 큰 잔치에 초대받아 가는 것이니 손님답게 얌전히 있다가 와야 하오.”
신이 난 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천은 명이 어디서 그런 표현을 배웠는지 궁금했다.
고암 설가가 장악한 웅성(熊城)에 들러 삼보장에 전서구를 띄운 진천은 일신으로 직행했다. 명에게 했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원래는 여유 있는 일정이었으나, 그녀의 혼절과 삼마의 출현으로 인해 이틀 가까이 날려버렸기에 그야말로 쉼 없이 달려야 했다. 열락궁이 있는 정진에서 정맹이 자리한 일신까지는 직선거리로만 오천 리가 넘는 길이었다. 인적이 없는 산야를 골라 이동해야 했기에 실제 거리는 그 두 배에 달할 터였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의 소유자였으나 전속력으로 꼬박 하루를 달리자 명은 탈진지경에 이르렀다. 예전에 중립지대와 정맹의 경계선 역할을 하던 보경산맥을 넘은 직후였다. 진천은 명에게 휴식을 권하지 않고 그녀를 안아들었다. 자존심이 상한 듯했으나 명은 순순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명을 안은 진천은 속도를 올렸다. 절반 이상을 오긴 했지만 아직도 수천 리를 더 가야했다.
호젓한 달빛 아래 하나로 포개진 두 사람 뒤로 풍경이 주마등처럼 휙휙 지나갔다. 밤을 새워 경신을 전개한 진천은 새벽녘에 일신 외곽의 주악산에 이르렀다. 삼백오십 장 높이의 산정에 오르고서야 진천은 아우성을 치는 그의 육신에 안식의 시간을 허락했다.
해가 떴다.
산을 내려온 진천은 일신에 들어섰다. 외조부가 지정한 오시(午時)까지는 여유가 있었기에 정맹에 들기 전에 명에게 일신의 명물 중 하나인 대화로(大華路)를 구경시켜주고 싶었다.
폭이 이십 장에 달하는 대로(大路) 양편에 수십 층 높이의 고층거각을 거느린 거리는 마차와 인파로 그득했다. 명은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연신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기감에 하늘까지 솟아있는 전각들은 수직의 기괴한 형상을 한 작은 산봉우리처럼 느껴질 터였다. 그 산봉우리 안에 개미굴의 개미처럼 사람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으니 그녀로서는 사뭇 신기할 것이었다. 진천은 명을 데려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의 손을 잡고 이끄는 와중에도 진천은 혹시 그를 알아보는 이들이 없을지 주위를 살폈다. 죽립 따위로 얼굴을 가리지 않았으니 눈 밝은 이라면 그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일백만의 인구를 자랑하는 일신 곳곳엔 강호에서 활동하는 정보조직의 점들이 숱하게 깔려있을 터였다.
하지만 전날과 마찬가지로 행색이 남루한 그를 눈여겨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꾀죄죄한 몰골의 명까지 붙어있으니 남들의 눈에 거지남매쯤으로 보일 공산이 다분했다. 실제로 터줏대감 행세를 하는 걸인 패거리가 그들이 지나칠 때마다 외지에서 흘러들어온 신참으로 오해하고는 사나운 눈길을 쏘아 보내곤 했다.
진천은 괜한 눈싸움을 피하고 조신하게 거리를 통과했다. 반 시진가량 걷자 일신을 동서로 나누는 동강이 나왔다. 진천은 전날과 달리 평민들이 이용하는 삼정교로 가지 않고 계양교(桂陽橋)로 향했다. 계양교는 정맹의 인사들만 오갈 수 있는 다리였다.
계양교는 경비가 삼엄했다.
기합이 바짝 든 무사들이 마차에 탄 이들의 신패를 확인하고 그들을 다리에 들여보내고 있었다. 진천은 무사들에게 다가갔다. 그와 명의 접근을 주시하고 있던 무사들 중 상관으로 보이는 이가 나섰다.
“여기가 어딘지 알고 오는 건가?”
낮은 목소리였으나 내공이 실려 있었기에 평범한 민초라면 고막이 파열되었을 것이었다.
진천은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무인에게 포권을 취하며 신분을 밝혔다.
“세평회의 진천이라고 합니다.”
눈이 화등잔 만해진 무인이 헛바람을 들이키더니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절대천룡(絶對天龍). 저는 정맹 호맹단(護盟團) 제이경비대주(第二警備隊主) 정철(鄭喆)입니다. 제가 맹까지 모시겠습니다.”
무인의 입에서 나온 별호에 소요가 일었다. 경비무사들은 물론이고 입교 대기 중이던 마차 안에서도 웅성거림이 일었다. 마차의 창문 너머로 엿보는 눈들이 솟아올랐다.
진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절대천룡? 검마의 일이 알려진 탓에 새로 생긴 별호일 터이지만 너무 거창했다. 하지만 진천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부담스러운 별호를 갖게 될 것임을 아직 알지 못했다.
“고맙습니다.”
진천의 인사에 정철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정철의 지시에 따라 경비무사들이 다리 입구에 줄 지어 선 마차들을 뒤로 물렀다. 모두들 싹싹하게 길을 터주었다. 무사 하나가 우측 차체에 금색 깃발을 꽂은 마차를 끌고 왔다. 진천은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직접 마부석에 오른 정철이 능숙한 솜씨로 말을 몰았다. 진천과 명을 태운 마차는 계양교를 건너고도 멈추지 않고 대로를 질주했다. 가는 내내 호각 소리가 난무하며 그들의 앞길을 막은 장애물들을 치운 덕분에 마차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정맹까지 곧장 내달았다.
진천과 명은 정맹의 서대문에서 마차를 내렸다. 그들을 거기까지 데려왔던 정철은 정맹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작별을 고했다.
정철에게서 특급귀빈을 인계받은 이는 정맹 제삼총관(第三總官) 신명식(申明植)이었다. 배꼽까지 내려오는 탐스러운 수염을 기른 육십 대 중반의 신명식은 진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펴지 않고 그를 상전 대하듯 했다. 그의 미염이 땅바닥에 닿을 지경이었다.
진천은 신명식과 함께 그가 준비해 둔 사륜마차에 올랐다.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는지 수많은 시선이 마차에 달라붙었다.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을 인지한 명이 진천의 귀에 무슨 일이냐고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천은 민망했지만 자신이 유명인사이기 때문에 주목을 받고 있을 거라는 솔직한 답을 주었다.
서대문을 출발한 마차는 일 각 후 선휴각에 이르렀다. 선휴각은 최고의 귀빈들만이 들 수 있는 명소였다. 마차에서 내려 선휴각 앞에 선 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건물의 구조를 파악하고는 기이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선휴각은 보는 각도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는 것으로 유명한 전각이었다.
출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선휴각주 백삼봉(白三奉)이 진천을 맞이했다. 신명식과 마찬가지로 깍듯하다 못해 저자세로 보일 정도로 공손한 태도였다. 진천은 그에게 쏟아지는 친절이 불편할 따름이었다.
백삼봉은 진천과 명을 가장 전망이 좋은 칠층의 만경실로 안내했다. 계단을 오를 수고도 필요치 않았다. 일층의 목실에서 기관 장치를 작동시키자 방이 통째로 칠층까지 올라갔다.
오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기에 진천은 수욕할 물과 갈아입을 옷을 부탁했다. 조건이 허락하는데 굳이 부랑자 같은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설 까닭이 없었다.
명에게 먼저 몸을 씻고 새 옷을 입도록 조치한 진천은 그의 수욕과 환복을 거들겠다며 들어온 시비들을 내보내고 홀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통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에 지난 며칠간의 강행군으로 인한 피로가 봄눈 녹듯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진천은 수욕을 느긋하게 즐기지 못했다. 아래에서 그와 관련된 소란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