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
제1화
노덕(盧德)은 손수건을 꺼내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를 닦았다.
중원은 지금쯤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고 있을 테지만 이곳은 한여름이었다. 봄과 여름밖에 없다는 하남 무림(河南武林)에 들어선 지 한 달 가까이 지났음에도 노덕은 여전히 더위가 낯설었다.
“빌어먹을, 정월에 웬 찜통이야.”
고량(高良)이 투덜거렸다.
전신에 철갑을 방불케 하는 근육을 외투처럼 두른 역사(力士)를 힐끗거리며 노덕이 그를 달랬다.
“이제 다 왔네. 저 고개만 넘으면 창인(昌仁)이 나올 걸세.”
고량은 대꾸 없이 노덕의 검지가 가리키는 얕은 봉우리를 마치 철천지원수인 양 노려보았다.
노숙은 고량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두 달여에 걸친 여정에 피곤하기도 할 것이었다. 후한 보상을 약속했으나 기실 고량이 대륙의 남단까지 동행해 준 건 의리의 발로였다. 그러니 그가 다소 무례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노덕으로서는 탓하기 어려웠다.
고량이 풀 한 포기 보기 힘든 민둥산을 향해 성큼성큼 앞서갔다. 무릎이 시원치 않아 그와 보조를 맞추기 버거웠지만 노덕은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부지런히 불퉁스러운 일행의 뒤를 쫓았다.
반 시진가량 걸은 후 산등성이에 올라서자 두 사람의 시야에 창인의 전경이 들어왔다.
산 아래 마을을 내려다보는 고량의 부리부리한 눈이 가늘어졌다. 노덕도 입을 벌려 놀라움을 나타냈다.
“저기가 창인이오, 노숙(盧叔)?”
“그럴 걸세.”
추궁하는 듯한 고량의 질문에 노덕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노덕 자신도 어리둥절했다.
일명 ‘도망자들의 땅’으로 불리는 창인은 북해나 사막, 그리고 밀림 등과 더불어 강호에 더 이상 발을 붙일 수 없게 된 자들이 마지막으로 달아나는 곳 중 하나였다. 창인의 지하에 거미줄처럼 깔린 암굴은 들어가는 이들을 미아로 만들어 버리는 미로로 악명이 자자했다. 제아무리 뛰어난 포차(捕叉)들이라도 창인에 이르러서는 추적을 단념해야 했다.
수백 개의 구멍이 난 허허벌판을 예상했던 노덕은 번듯한 도로와 집들을 바라보며 입 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가 보세나. 길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으니 창인이 맞을 게야. 혹여 아니더라도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걸세.”
고량이 미간을 찌푸렸다.
“노숙도 늙었군. 예전엔 이렇게 어설프지 않았는데. 그러니 망했을 테지만.”
중얼거림을 가장한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에 울화가 치밀었으나 노덕은 참았다. 칼자루를 쥔 쪽은 그가 아니라 고량이었다. 일이 성사될 때까지는 어떻게든 비위를 맞춰 주어야 했다.
“허허, 그러게 말일세. 하지만 이번에 기필코 다시 일어설 게야. 그렇게 되면 자네의 은덕은 결코 잊지 않겠네.”
노기를 드러내는 대신 노덕이 노련하게 상인(商人)의 미소를 머금었다.
사나운 눈빛으로 노덕을 쏘아본 고량이 그를 배려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하산을 시작했다. 허겁지겁 고량을 쫓으며 노덕은 아래의 고을이 창인이기를 빌고 또 빌었다. 창인이 아닐 시 고량이 퍼부을 비난은 그가 감당할 수위를 넘을 게 뻔했다.
해가 기울고 있었지만 대지에 깔린 열기는 그대로였다.
노덕은 연신 손수건의 물기를 쥐어짜며 목덜미에 흘러내리는 땀을 훔쳤다. 마치 달군 철판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그와 고량 모두 소나기를 맞은 사람들처럼 흠뻑 젖은 상태였다.
거리에는 한 명의 행인도 보이지 않았으나, 노덕은 그와 고량에게 달라붙는 수많은 시선들을 감지했다. 모두들 숨어서 이방인을 지켜보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노덕과 고량의 눈길이 한 곳으로 모였다.
“허어, 객잔까지 있다니. 어쨌거나 잘됐구먼. 저기서 요기도 하고 주인장에게 얘기도 들어봄세.”
노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량은 이미 ‘대왕객잔’이라는 거창한 현판을 내단 이 층 건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노덕이 부랴부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객잔에 거의 이르렀을 즈음 골목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누런 단삼을 걸친 청년이었다. 노덕과 고량이 멈춰 서자 청년이 절뚝거리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노덕의 눈이 재빨리 청년을 훑었다.
나이는 스물 어림일까. 하지만 앳된 구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어릴 가능성도 상당했다.
그다지 인상적인 용모는 아니었다. 거리에서 지나치면 다시 기억하기 어려운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나마 특징을 꼽으라면 눈초리가 처졌다는 정도였다. 왼팔이 부러졌는지 팔뚝에 부목을 대고 붕대 대신 칡넝쿨을 감고 있었다.
“하하하, 어디서 오신 분들입니까?”
맥락 없이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며 청년이 물었다.
노덕은 반문했다.
“자네는 누군가?”
허를 찔린 사람처럼 청년이 눈을 크게 떴다.
“아, 미안합니다. 외지 분들을 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예의를 잊었네요. 저는 진천(秦天)입니다. 창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노덕이 반색했다. 제대로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러나 만사 불여튼튼인지라 확인이 필요했다.
“이곳이 분명 창인인가?”
진천이라는 이름을 밝힌 청년이 싱긋 웃었다.
“그렇습니다. 달리 그 이름을 쓰는 고을이 또 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는 창인이 맞습니다. 두 분은 어디서 오신 뉘신지요?”
“우리는 주안(宙安)에서 왔다네. 나는 노덕이고 이 친구는 고량일세.”
미소로 화답하며 노덕이 자기소개를 했다.
고량은 그들의 본향과 본명을 밝히는 노덕의 경솔한 언사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역정을 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진천이 들뜬 음성으로 물었다.
“주안이라면 중원의 대도(大都)가 아닙니까?”
“대도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작은 마을은 아닐세.”
“이런, 귀빈들이시군요.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객잔에 들어가서 담소를 나누는 게 어떻습니까? 장(張) 아저씨의 국수는 일품입니다. 면발이 탱탱하면서도 부드럽거든요. 먼 곳에서 오신 분들이니 제가 창인을 대표해 대접하고 싶습니다.”
싱글벙글한 진천의 표정에 노덕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목전의 애송이는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었다. 어리바리한 너구리에게 뜯어먹히기엔 노덕은 너무나 노련했고 고량은 너무나 강했다. 애송이도 이제 곧 알게 될 터였다.
객잔은 의외로 넓었다.
양옆에 네 개의 의자를 거느린 탁자가 이십여 개에 달했다. 꽉 차면 일백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라선지 손님은 여섯에 불과했다. 좌측 창가와 중앙에 각각 세 명의 사내가 반주를 겸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술병에서 빠져나온 주향(酒香)이 실내를 안개처럼 떠돌았다.
하나같이 험상궂은 낯짝을 가진 객잔의 육인(六人)은 문을 열고 들어선 세 사람을 슬쩍 쳐다보고는 바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노덕은 그러한 무관심이 위장임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들이 진천이라는 자의 방수(帮手)임은 불문가지였다.
노덕으로서는 익숙한 상황이었다. 육천 리 장도를 지나는 동안 노덕과 고량은 녹림도와 네 번 조우했고, 흑도와는 무려 열일곱 번이나 마주쳤다. 그나마 눈썰미가 좋은 자들은 고량이 풍기는 흉험한 기운을 가늠하고 알아서 물러났지만, 둔한 무리들은 제 무덤을 파곤 했다.
노덕은 진천을 비롯한 대왕객잔의 패거리에게 그들의 목을 닭 모가지 비틀듯 꺾어 버릴 고수를 알아볼 안목이 있을는지 궁금했다.
노덕과 고량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려는 수작인지 진천은 그의 동료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오른쪽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더니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국수 세 그릇하고 탁주 한 병 주세요, 장 아저씨.”
두 사람의 의견을 묻지 않고 제멋대로 주문을 한 진천이 뒤늦게 양해를 구했다.
“여기는 먹을 게 국수하고 염소고기밖에 없습니다. 국수는 끝내주지만 염소고기는 질겨서 어지간한 위장이 아니면 소화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술도 한 종류입니다. 저는 솔직히 맛을 잘 모르지만 마을의 주당들은 꽤 괜찮다고들 하더군요.”
진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털보 장한이 음식을 내왔다. 미리 준비해 놓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속도였다.
쟁반도 없이 쭉 뻗은 팔에 사발 세 개를 얹고 한 손에는 술병을 든 사십 대 초반의 털보가 식탁으로 다가오더니 떨어뜨리듯 음식을 내려놓았다.
노덕은 흠칫했다. 털보의 거친 동작 때문이 아니라 고량의 반응 때문이었다. 그가 허리를 곧추세운다는 것은 털보를 신경 쓰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덩치가 크긴 하지만 일개 범부에 불과한 털보를 의식하는 고량의 태도에 노덕도 덩달아 긴장했다.
탁자 위에 사발과 술병을 아무렇게나 차려 놓으며 털보는 고량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고량 또한 기합이 담긴 안광을 발하며 털보를 응시했다. 둘 사이의 공기가 잡아당긴 밧줄인 양 팽팽해졌다.
“잘 먹을게요, 장 아저씨.”
진천이 털보의 팔을 툭 쳤다. 그러자 마법처럼 일순지간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어깨를 으쓱거린 털보가 고량을 일견하고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일촉즉발의 사태까지 각오하고 있던 노덕은 맥이 풀렸다.
“자, 드십시오. 이곳의 전통에 따라 탁주는 제가 먼저 마시겠습니다.”
진천이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꿀꺽.
진천의 목젖이 위로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노덕은 고소를 지었다.
술에 아무것도 타지 않았음을 보여 주기 위한 행위일 테지만 무의미한 짓이었다. 어린 너구리는 필시 사전에 미약(迷藥)이나 독의 해약을 복용했을 것이었다.
노덕과 고량 둘 다 술병에 손을 뻗지 않자 진천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여기서는 잔을 따로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술병에 입을 대는 게 내키지 않으신다면…….”
노덕이 진천의 말을 막았다.
“그럴 것 없네. 술은 됐으니 얘기나 나눔세.”
“알겠습니다. 그러면 국수라도 드시지요.”
진천이 손가락을 젓가락 삼아 면을 들어 올렸다. 이미 객잔의 다른 이들이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 것을 보았기에 노덕은 놀라지 않았다.
“미개한 놈들 같으니.”
내내 닫혀 있던 고량의 입이 험한 언사를 토해 내었다.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귀가 밝은 듯 객잔의 여섯 사내가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진천의 눈짓을 받고는 다시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다.
“하하, 저희가 이렇게 삽니다.”
진천이 넉살 좋게 고량의 말을 받았다.
노덕은 그가 고량의 강함을 인지해서 불쾌함을 표출하지 않고 자중하는지 아니면 언제든 처리할 수 있다고 자신해서 여유를 부리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진천은 단순한 바람잡이나 아니라 그들의 패거리에서 제법 비중 있는 인물일 것이었다.
“그나저나 중원 분들이 이 오지까진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더 이상의 탐색전은 불필요하다고 여겼는지 진천이 단도직입적으로 치고 나왔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노덕으로서도 환영이었다.
“물건을 찾으러 왔네만.”
‘무슨 물건이요?’로 시작될 진천의 질문이 이어지기 전에 노덕이 선수를 쳤다.
“그것과 관련해서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네만.”
“부탁이요? 말씀만 하십시오. 살인이나 도적질 같은 나쁜 짓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허어, 첫눈에 알아보았지만 자넨 참으로 친절한 사람이구먼. 혹시 창인 이남의 밀림 지대를 잘 아는 이를 구할 수 있겠는가?”
“밀림 지대요? 찾으신다는 물건이 거기에 있습니까?”
“그렇다네. 안내인을 물색해 준다면 고맙겠네만.”
“이거 기가 막힌 우연이군요. 제가 바로 적임자입니다. 밀림은 제 안마당과도 같습니다.”
“정말인가?”
“물론이지요. 구체적으로 밀림 어디를 가고 싶으십니까? 밀림이라고 하지만 면적이 어마어마합니다.”
“이족들이 ‘보옹’이라고 부르는 곳을 아는가?”
“알다마다요. 하지만 거기는 밀림이 아니라 그 너머 초지에…….”
“됐네. 자네만 믿음세.”
황급히 진천의 말을 끊은 노덕은 표정 관리를 했다. 운이 좋았다. 창인에 들어서자마자 길을 아는 자를 만나다니.
노소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고량의 기세가 변한 것은 그때였다. 그가 돌연 몸을 일으키자 객잔에 있던 여섯 사내 역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