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0
제19화
하수린이 무림에 첫선을 보인 것은 이 년 전이었다.
팔십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포성(葡城) 무림 대회에 묘령의 여인이 나타났을 때 많은 이들이 그녀를 주목했다. 그러나 그녀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 까닭은 무공이 아니라 이국적인 미모였다. 하지만 곧 무인으로서의 그녀의 진가가 드러났다.
출신 내력을 밝히지 않고 예선전부터 참가한 하수린이 연전연승하며 서른두 명이 겨루는 본선에 진출하자 그녀는 단연 최고의 화제로 떠올랐다. 오연승(五連勝)을 달리는 동안 그녀는 매번 십 초 안팎에 승부를 매조지하곤 했다. 그녀에 관한 소문이 포성 전역에 퍼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젊고 강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활약상을 지켜보기 위해, 그녀의 본선 첫 번째 대결이 펼쳐지는 장소엔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하수린은 그녀를 일방적으로 응원하는 군중의 기대에 부응했다. 예선 때와 마찬가지로 단 팔 초 만에 공지(空池) 정무관(正武館)의 중견 강호 주유섭(周有燮)을 비무대 밖으로 날려 버린 것이었다. 주유섭이 우승 후보 중 한 명이었기에 그날의 결과는 큰 충격을 안겼다.
포성 백성들과 외지의 방문객들은 벌써부터 스무 살 어림에 불과한 신진 고수의 우승을 점치며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이틀 후 열린 십육강전(十六强戰)에서는 대회 사상 최대로 추산되는 관중이 비무대 주변에 모여들었다. 비공식적인 추산이지만 관전자들이 사만에 달했다는 설이 나돌 정도였다.
하수린의 상대는 명문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우운검문(雨雲劍門)의 신예 초지량(草地量)이었다. 우운검문이 자랑하는 후기지수는 겨우 육 초밖에 버티지 못하고 검을 떨어뜨리는 굴욕을 당했다. 초지량에게 쾌승을 거둠으로써 하수린은 설마 하던 수준을 넘어 실질적이면서 강력한 우승 후보로 떠올랐다.
팔강. 사강. 그리고 결승.
연이어 관중 동원 기록을 갱신하며 하수린은 깔끔하게 삼 연승에 성공했다. 그녀가 세 번을 이기는 동안 펼친 초식은 합해서 이십 초에 불과했다. 실로 압도적인 무위였다.
우승 직후 하수린이 비로소 자신의 신분을 밝혔을 때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들 그녀가 월교(月敎)가 비밀리에 키운 병기이거나 최소한 전대에 크게 무명(武名)을 떨친 은거기인의 제자일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작 팔정파의 후인이라니. 비록 하남칠강의 일익으로 꼽힌다지만 그래 봤자 변방 무림의 승냥이 떼에 지나지 않는 팔정파에서 중원 무림의 영재들을 초라하게 보이도록 만든 초신성을 배출하다니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수린의 무위는 오대세가(五大勢家)나 사파칠문(邪派七門), 마도사류(魔道四流)의 후계자들에 비견되었다. 혹자는 그녀와 또래인 약관 전후의 무리만 놓고 보자면 하수린이 오히려 그들을 능가할 거라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단지 그녀가 포성 무림 대회에서 우승해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과시한 다른 수준의 무력 때문이었다. 그녀의 무위에 관한 소수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하수린은 포성 무림 대회가 끝난 지 석 달도 지나지 않아 만천하에 입증했다.
긴 설명으로 목이 말랐는지 수통을 꺼내 입을 축인 노덕이 말을 이었다.
“재작년 오월 경으로 기억나는구먼. 그 무렵 그녀가 흑창(黑槍) 동이승(董理承)에게 이겼다는 풍문에 온 강호가 떠들썩했다네. 흑창이 누군지 아는가? 그는 천하사패(天下四覇)의 일익인 사벌(邪閥)의 강호라네. 사령(邪領)이기도 하지. 사벌의 사령은 흔히 정맹의 용호와 비견되곤 하니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걸세.
아무튼 그녀는 팔정포까지 그녀를 찾아간 흑창과 공개 비무를 벌여 수백 초의 접전 끝에 그의 독문 병기를 빼앗는 기염을 토했다네. 흑창은 사파지만 거두답게도 싹싹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갔다네.
그 일전으로 하남편봉의 명성은 한 단계 더 상승했다네. 그도 그럴 것이 사령에 속한 강자를 꺾었으니 그녀가 수십만을 헤아린다는 무인들 중 적어도 삼백 위 이내에 드는 고수라는 의미가 아닌가. 당시 그녀의 나이가 고작 스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네.
사패를 통틀어도 그 나이에 용호나 사령을 꺾을 만큼 강한 후예는 없으리라는 것이 정설이네. 그렇다면 그녀가 당금 무림에서 동년배 가운데 최강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지. 하남 무림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천하십대고수로 인정받았던 하남쾌검(河南快劍) 장청(張靑)의 영광을 그녀가 이백 년 만에 재현하리라 기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세. 자네가 오늘 항복 선언을 받아 낸 여인은 그런 유명 인사라네.”
진천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진천의 싱거운 반응에 노덕은 오늘 그의 승리가 앞으로 강호에 얼마나 큰 파장을 낳을지에 관해 다시 장광설을 늘어놓으려다 단념했다. 주인공은 덤덤한데 옆에서 호들갑을 떨자니 민망한 노릇이었다. 노덕은 대신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의 채찍을 떨어뜨렸는가? 사실 나는 아까 자네가 목이 뚫리는 줄 알고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네. 한데 도리어 그녀가 채찍을 놓고는 자기가 졌다고 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네.”
소매를 뒤집은 진천이 무언가 꺼냈다. 콩알 크기의 새카만 구슬들이었다.
“창인을 떠날 때 배 아저씨들에게 부탁해 몇 개 준비했습니다. 허 노야나 장 아저씨 등이 하도 강호가 험난하다고 겁을 줘서요.”
노덕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걸 날려 그녀의 손을 친 것이로구먼.”
“그렇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녀가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던 탓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진천의 말은 겸양지사가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마지막 장면을 복기하자 진천은 간담이 서늘했다. 하수린의 청사편이 그의 목을 노리고 날아왔을 때 진천은 위기임을 깨달았다. 피하는 순간 오히려 적중될 것임을 직감해서였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려는 몸을 의지로써 제지하고 진천은 정중동의 묘를 발휘했다. 금석도 쪼갤 위력을 담은 편두는 머리카락 두세 올의 차이를 두고 그의 목을 빗겨 갔다. 피하려 했다면 당했을 것이었다.
하수린의 살초가 나오자마자 진천도 지체 없이 철구를 날렸다. 이 사부의 최강 절기이자 구명절초인 섬표(閃鏢)를 변형한 수법이었다.
그의 쇠구슬에 손목이 으스러진 하수린이 채찍을 놓쳤을 때 진천은 갈등했다. 그녀에겐 편술(鞭術) 말고 다른 비기도 있음에 분명했다. 하여 그녀가 승부를 포기하지 않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기회를 잡았을 때 끝을 보는 게 나았다. 그녀는 진천에게 여유를 허락할 만큼 약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다행스럽게도 하수린은 일시지간 넋이 나간 듯했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진천의 좌수가 쏘아 보낸 음험한 암기(暗氣)가 그녀의 요혈에 닿은 후였다. 그의 의도를 파악한 하수린이 순순히 패배를 인정함으로써 비무가 종결된 것이었다.
“아, 정말 굉장하군요.”
진천의 입에서 탄성이 터지자 노덕은 남하(南河)가 마치 자기 것인 양 흐뭇했다. 폭이 백 장에 달하는 거대한 강이 무한대의 물을 싣고서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느니만 못하다더니 한 치의 틀림도 없는 말이군요. 남하에 대해서는 숱하게 들었지만 이렇게 장관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북강(北江)과 더불어 대륙에서 가장 길고 큰 강이니 그럴 만도 하지. 넓이만 따지면 여기는 아무것도 아닐세. 하류로 가면 다섯 배나 된다네.”
“강이 이럴진대 바다는 얼마나 넓을까요? 소싯적에 해적 노릇을 했다던 푸줏간 성 아저씨 말로는 몇 날 며칠을 가도 사방에 보이는 건 수평선밖에 없다던데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나도 젊은 날 상단에 몸담고 있을 때 안 가 본 데가 없지만 해양은 경험하지 못했다네.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아쉽구먼.”
“바다는 제가 개인적으로 두 번째로 보고 싶은 곳입니다. 언젠가 꼭 가 볼까 합니다.”
“그러길 바라네. 그런데 바다가 두 번째라면 첫 번째는 어디인가?”
“구체적인 장소라기보다는 광경입니다. 예전에 빙원에서 살았다는 공 할아버지께서 ‘백설이 만건곤하다’는 절경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리곤 했습니다. 하늘도 땅도 온통 흰 눈으로 가득한 백색의 세상이라니 참으로 신비롭지 않습니까? 차갑지만 포근하다는 눈도 마음껏 만져 보고 싶습니다.”
“지금이 이월이니 서두르면 눈은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먼. 이천 리만 더 올라가면 거기는 아직 겨울일 테니. 물론 백설이 만건곤한 풍경은 그보다 훨씬 더 위로 가야만 나온다네.”
“알겠습니다.”
강변을 따라가며 대화를 나누던 노소는 크고 작은 선박 삼십여 척이 정박해있는 포구에 이르렀다. 진천과 노덕은 도하만 전문으로 하는 나룻배를 탈 계획이었다. 남하를 건너면 드디어 중원이었다.
* * *
진천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바로 옆자리에서 그를 안줏거리 삼아 사인(四人)의 취객이 신나게 떠들어 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문이 날개 달린 새만큼이나 빠르게 날아다닌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이미 얼큰하게 취한 술꾼들은 벌써 여러 날 전에 하남신룡(河南新龍)에 대한 정보를 취득했다고 경쟁적으로 자랑하고 있었다.
기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열흘 전 남하를 건너 이곳 오창(烏昌)까지 오는 내내 지나는 시진마다 팔정파의 하남편봉을 꺾고 혜성같이 등장한 신성에 관한 사담이 흘러넘쳤다. 객잔이나 저자는 물론이고 정자나 빨래터처럼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어김없이 ‘하남신룡 진천’을 화제로 이야기꽃이 만발했다.
그의 이름이 조만간 대륙의 끝까지 날아갈 거라던 노덕의 호언장담이 틀리지 않을 것임을 절감한 진천은 난감할 따름이었다.
“여기도 온통 자네 얘기뿐이구먼.”
행여나 누가 들을세라 노덕이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천이 쓰게 웃었다.
“소문이라는 게 참으로 못 믿을 요물이로군요. 이러다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덕도 고소를 머금었다.
“그러게 말일세. 다들 현장에 있었던 나보다 훨씬 세세하게 알고 있으니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씁쓸하구먼. 원래 직접 본 사람과 소문만 접한 사람이 한판 붙으면 후자의 주장이 외려 더 그럴듯하게 들리는 경우가 다반사이긴 하나 저렇게들 자신 있게 묘사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조차도 헷갈릴 지경일세. 어디를 봐서 자네가 호목(虎目)이며 매부리코며 주걱턱인가. 뺨을 가로지른 검상(劍傷)은 또 뭐고. 덩치도 곰하고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그리고 쇠사슬이라니. 아마도 자네가 팔에 감았던 칡넝쿨이 와전된 모양인데 이러다 나중에는 뿔까지 달릴지도 모르겠구먼. 자네 말마따나 머리 세 개에 팔이 여섯 개나 달린 괴물로 우뚝 설 날도 머지않았을 성싶으이.”
농담으로만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진천이 미간을 찡그렸다. 노덕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허허, 신경 쓰지 말게나.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니. 얼마 가지 않아 자네의 온전한 모습이 제대로 알려질 걸세. 빈털터리지만 내 전 재산을 걸어도 무방하이.”
“제 생김새에 대한 왜곡보다 무위의 과장이나 그녀를 폄하하는 소리들이 부담스럽습니다.”
“그 또한 시간이 알아서 바로잡아 줄 걸세. 그러니 저런 입방아들일랑 괘념치 말고 요리나 즐기게나. 오랜만에 누리는 사치가 아닌가.”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방향을 다시 정해야 하네만 어느 쪽이 좋겠는가? 오륜산맥을 끼고 좌우로 갈라지는데 총 거리는 비슷하다네.”
“저는 차이를 알지 못하니 대인께서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노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렸다.
“그래도 되겠는가?”
진천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인.”
그로써 또 다른 필생의 인연과 조우하게 될 것임을 진천은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