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00
제199화
몸에 걸치기 부담스러운 눈부신 백의를 입은 진천은 서둘러 아래로 내려갔다.
호화로운 침상에 걸터앉아 자신에게 주어진 비단옷을 이리저리 문지르며 촉감을 즐기고 있던 명이 어미닭을 쫓는 병아리처럼 그를 따라왔다.
오 층에서 진천은 선휴각주 백삼봉의 만류를 뿌리쳐가며 막무가내로 올라오고 있던 강민과 마주쳤다. 진천을 본 강민의 양안에서 광기인지 살기인지 모를 기광(奇光)이 폭사되었다. 범인은 그 눈빛만으로도 즉사했을 터였다.
진천을 쏘아보며 강민이 으르렁거렸다.
“신수가 훤하구나. 나가자.”
진천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무슨 일이오?”
강민의 안광이 한층 강렬해졌다.
“잘나신 절대천룡에게 한 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
“그 눈은 뭐냐? 내게 그만한 자격이 없다고 업신여기는 게냐?”
“그렇지 않소. 그보다 이렇게 왔으니 위에 올라가서 차나…….”
“닥쳐라! 네놈과 차를 마실 이유 따윈 없다. 나가기 싫으면 여기도 좋다.”
금방이라도 칼을 뽑을 기세인 강민을 응시하며 진천은 그의 비무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았다. 강민의 결의는 진짜였다. 그는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을 터였다. 어차피 수용해야 한다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공간에서 하는 게 나았다.
“나갑시다.”
진천의 말에 강민이 등을 돌렸다.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보던 백삼봉이 허둥지둥 그를 쫓았다.
기분이 언짢은지 명이 입술을 찌그러뜨리며 물었다.
“내 지인이오. 그와 비무를 하게 될 것 같은데 명은 지켜만 보구려. 혹시 내가 위험해 보여도 끼어들지 말길 바라오. 괜찮을 테니.”
진천의 당부에 명이 응답하기도 전에 벌써 아래층으로 내려간 강민이 소리 질렀다.
“뭐 하느냐?”
쓴웃음을 지은 진천은 명의 손을 잡고 계단으로 향했다.
선휴각 바깥으로 나가자 소동을 전해 듣고 달려온 이들이 벌써부터 진을 치고 있었다. 족히 삼사백은 될 듯했다. 그들의 눈마다 서린 기대감에 진천은 씁쓸했다. 승패에 대한 관심보다는 절대천룡이 어떤 방식으로 섬전도를 농락하는 지 구경하겠다는 심사들임에 분명했다.
관전자들은 지면 대이변이자 망신이고 이겨도 본전이라 여길 테지만 진천의 머릿속에는 그런 유치한 손익계산이 전혀 없었다.
그로서는 그저 내키지 않는 일전일 뿐이었다. 강민과는 초면부터 잘못 꼬여 악연이 되었지만 이렇게까지 나빠질 관계는 아니었다. 진천은 어떤 식으로든 그와 화해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기를 바랐다. 기실 강민과의 관계 개선은 진천이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로 설정했던 중대사였다.
강민은 그가 떠난 후의 세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인물이었다. 이삼십 년만 지나면 그는 정파 무림은 물론이고 천하를 통틀어도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절대강자가 되어있을 터였다. 다소 편협하고 오만한 구석은 있으나 진천은 그가 정파 무림의 태두인 원주 강가의 후손답게 선을 넘지는 않으리라 보았다.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곽건 같은 자와 비교하면 강민은 선량하였다.
강민이 세평회의 인사들과 교류하고 친분을 쌓게 된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는 명과 하수린, 그리고 대웅, 소중걸과 더불어 무왕들의 시대가 저문 후 세상을 이끌어가게 될 것이었다. 그들이 합심하여 삼백 년 전 무성(武聖) 소구(小狗)가 펼쳤던 태평성대를 삼십 년 후의 미래에 재현하기를 진천은 간절히 빌었다.
진천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를 노려보는 강민의 동공엔 독기가 가득했다.
그에게 진천은 마땅히 그가 누려야 할 모든 것들을 빼앗아 간 원수였다. 진천으로 인해 그는 명예를 잃었고 여인도 잃었다. 불과 반 년 전까지만 해도 이제 곧 온 세상이 그를 우러러 볼 거라는 확신에 차 있었으나 지금은 하찮은 종자들에게도 조롱받고 멸시받는 처지임을 자각해야만 했다.
비참했다. 한 없이 비참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목전에서 강탈당했을 때는 치욕과 분함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를 뺏기고도 바로 찾으러 가지 못한 스스로의 무능력과 비겁함에 치가 떨렸다.
하지만 오늘 빚을 갚아줄 참이었다. 이날을 위해 얼마나 절치부심했던가.
강민은 가차 없이 그를 내동댕이쳤던 하늘이 다시 그의 편으로 돌아섰음을 직감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렇게 완벽한 기회를 주지는 않았을 터였다. 원수가 나타나기 직전에 극적으로 오랫동안 막혀있던 벽이 뚫렸다. 원수는 그가 새로이 갖춘 무기를 결코 감당하지 못할 것이었다.
강민은 아쉬웠다. 그녀가 여기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통쾌하게 전날의 패배를 설욕하고 다시 무림 최고의 초신성으로 우뚝 서는 모습을 본다면 그녀의 마음을 채웠던 실망감이 황홀경으로 바뀌리라.
보다 많은 군중을 두르고 공식적으로 대결하지 못한다는 점도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완고한 조부가 결코 원수와의 설욕전을 허락하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강민은 이를 갈았다. 기필코 원수를 쓰러뜨려 조부에게 진정한 후계자가 누구인지 증명할 것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조부를 넘어서는 날 그에게 안긴 설움을 고스란히 되갚아줄 것이었다. 조부는 지난날의 오판을 뼈저리게 후회하리라.
강민은 쌍칼을 뽑아들었다.
비무 개시 선언은 불필요했다. 격식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로지 승리만이 중요했다.
사오 장 떨어진 곳에서 자세도 갖추지 않고 여유를 부리는 진천을 향해 불문곡직 선공을 가하려던 강민이 멈칫했다. 군중 속에서 사십 대 후반의 중년인이 뛰쳐나와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안 된다, 민아.”
중년인이 강민에게 매달렸다.
“비키십시오, 아버님.”
중년인은 강민의 부친이자 진천의 외숙인 강명이었다. 형인 폭풍도(暴風刀) 강선의 그늘에 가려 평생 변변한 무명(武名) 한 번 떨쳐보지 못한 비운의 도객이기도 했다.
“제발 이러지 마라. 아직 저 아이를 상대하기엔 무리…….”
강민의 눈에서 솟구친 불길이 강명의 말을 막았다. 매정하게 강명을 떠밀며 강민이 분기를 억누른 음성을 토해내었다.
“이젠 아버님마저 저를 무시하는 겁니까?”
아들의 노화를 감당하지 못한 강명이 힘없이 물러났다.
다시 진천에게 시선을 박은 강민이 심호흡을 했다. 진천은 그가 준비를 마쳤음을 알았다.
강민의 첫 수는 진천의 예상대로 광섬(光閃)이었다.
그에게 섬전도라는 별호를 안겨 준 절학으로 선공을 가한 강민은 그가 쏘아낸 빛살이 진천의 신형에 꽂히기도 전에 후속타를 날렸다. 그의 좌수에 든 귀두도와 우수의 협도에서 두 줄기의 강선이 뻗어 나와 환영으로 화한 진천을 찔러갔다.
진천은 비환으로 강민의 공격을 흘러내었다. 다음 순간 진천은 미간을 모았다. 강민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파즉살!
전날 절벽에서 떨어질 때 큰 외숙이 구사했던 절기였다.
진천은 강민이 전날 삼보장에서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 작심임을 알았다. 광섬과 쌍전은 미끼에 불과했다. 파즉살을 시전하기에 앞서 진천의 발을 묶어놓기 위한 용도였다. 강민은 삼보장에서처럼 칼을 깨뜨리기도 전에 진천의 손에 당하는 참사를 막을 요량이었다.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파즉살은 위험했다. 불완전한 파즉살은 더욱 위험했다. 그가 아니라 관전하는 군중에게.
파즉살을 피해내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그리 되면 그의 후방에 늘어선 관전자들이 수백 개의 도편(刀片)에 노출될 것이었다. 순식간에 일백 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대처방안을 고민할 겨를이 없었기에 진천은 직관적으로 결단을 내렸다. 파편에 길을 내어줄 수는 없으니 그가 받아내어야 했다.
산산조각 난 귀두도가 칠팔백 개의 파편이 되어 소낙비처럼 진천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칼 조각들은 진천의 동체를 범하지 못했다. 그의 좌수에서 흘러나온 강기의 밧줄이 원형의 방패를 만든 덕분이었다. 월광을 받은 물비늘처럼 번쩍이는 파편들이 기이한 방어막에 튕겨나가는 광경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임기응변으로 강민의 필살기를 무위로 돌린 진천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헛”
그와 동시에 군중 속에서 누군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악!”
명이 내지른 소리였다.
진천은 강민의 진정한 노림수를 비로소 알아차렸다.
분천일획!
원주 강가 사대무학의 정점을 차지하는 신공절학이었다. 강가 역사 상 북천도왕 강운만이 시현해 낸 비학이기도 했다.
강민은 파즉살로 현혹하고 분천일획으로 결정타를 날릴 심산이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암수로 쓰인 분천일획을 예상치 못한 진천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절체절명의 순간 진천을 구한 건 무영이었다. 그가 의식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분천일획에 대응한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강민의 분천일획이 완전했다면 부상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둘째, 진천의 몸이 두 쪽으로 갈리자 쾌재를 불렀던 강민은 곧바로 눈이 뒤집어졌다. 진천이 원래의 자리에서 이 장 떨어진 곳에 멀쩡히 나타난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셋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군중이 어리둥절해 하는 가운데 강명이 달려 나와 입에 거품을 물고 혼절한 강민을 안아들었다. 그의 비통한 음성이 중인의 귀를 때렸다.
“어쩌자고, 대체 어쩌자고 이랬단 말이냐.”
강민의 몸뚱이가 제멋대로 비틀렸다. 칠공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주화입마에 든 것이었다.
진천에게 고개를 돌린 강명이 원독에 찬 음성을 쏟아냈다.
“민이가 네놈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리도 잔인하게 군단 말이다. 누가 그 독한 년의 자식이 아니랄까 봐…….”
강명은 악다구니를 멈추어야 했다. 군중 속에서 빠져나온 두 노인이 그를 제압했기 때문이었다. 등에 쌍도를 매단 것으로 보아 원주 강가의 도호(刀豪)임에 분명한 노인들은 강명-강민 부자를 안고서 군중을 파고들며 갯벌의 게처럼 사라졌다.
군중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비무가 개시된 지 반 호흡도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승부가 종결되어 버린 데다 강명이 마지막에 보인 태도가 이해난망이어서였다. 그는 어째서 아무 잘못도 없는 절대천룡을 비난했을까.
누가 보아도 절대천룡이 억울할 법했다. 그는 단지 이름값이 한참 떨어지는 상대가 부리는 억지에 응해주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일절 반격하지 않고 회피와 방어에만 치중하지 않았던가. 섬전도가 제 풀에 쓰러졌음은 명약관화했다.
한편 많은 이들은 강명의 말에서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꼬투리를 잡았다. ‘독한 년의 자식’이라니. 강명은 절대천룡의 모친을 안단 말인가.
절대천룡의 사문에 관해서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보기 드문 정심의 소유자로 정평이 난 그가 전대의 악명 높은 잔살광마와 귀도마의의 제자라는 사실은 당금 강호 최고의 불가사의로 꼽힐 정도였다. 문자 그대로 시궁창에서 용이 태어난 격이었다.
여하튼 사문과는 달리 절대천룡의 가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무했다. 그의 부모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 온갖 억측이 떠돌았지만 정확한 정보를 제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강명은 그의 모친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헛소리로만 치부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아들에게 일어난 비극에 망연자실했으되 실성한 상태는 아니었다.
대다수의 군중은 강명의 말을 막은 노인들을 속으로 욕했다. 그들이 조금만 늦게 개입했더라면 절대천룡의 또 다른 비밀이 백일하에 드러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떠난 배였다.
수백 쌍의 눈길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선휴각으로 돌아가는 진천의 뒷모습에 모였다. 그와 섬전도 간의 이차전은 우열을 따지기도 우스울 만큼 싱겁게 끝났지만 내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일정 수준 이상의 안목을 가진 무인들은 섬전도 강민이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대단한 절기들을 쏟아냈는지 알고 있었다. 상대가 천상의 신법을 지닌 절대천룡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무사하지 못했을 터였다. 특히 섬전도가 최후에 발한 초식은 일견 절대천룡은 물론이고 그가 들어있던 공간 전체가 두 쪽으로 쪼개진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장면을 목도하고도 전율이 일지 않은 이는 무공을 알지 못하는 범부들뿐이었다.
군중은 하남 무림이 배출한 기린아가 그의 시비로 보이는 맹인소녀와 함께 선휴각에 들어갈 때까지 숨죽인 채 그를 지켜보았다. 근간에 그에게 새로 붙은 절대천룡은 조금도 과한 별호가 아니었다. 검마를 일수에 격퇴했다는 놀라운 소문에 다소 과장이 섞여 있더라도 절대천룡이 방금 전 현시한 무위는 그가 정당한 이름을 얻었음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절대천룡은 가히 불세출의 기재(奇才)였다. 하지만 어느새 오백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은 한 시진 후면 이러한 평가마저도 무색해질 것임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