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01
제200화
진천은 착잡했다.
강민에게 일어난 불행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파국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강민은 처음부터 미완성의 분천일획을 쓰기로 작심하고 나왔음에 틀림없었다. 그의 주화입마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고도 상대를 쓰러뜨리지 못한 데서 온 충격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직 설익은 절기를 실전에 무리하게 운용한 대가였다. 한마디로 과욕이 화를 부른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진천은 자책감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비무 청을 거절했으면 비극을 예방할 수 있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진천은 알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강민이 준비한 수를 강행했으리라는 것을.
진천은 속이 쓰렸다. 강민은 그에게 모친을 연상시켰다. 지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승부욕. 포기를 모르는 근성. 애달픈 독기. 한 핏줄이기에 그런 특징을 공유하는 걸까.
명이 상념에 잠긴 진천에게 말을 걸었다.
진천은 쓰게 웃었다. 명은 눈이 없지만 수백의 관전자들 중 분천일획의 흉험함을 유일하게 알아본 이였다. 당시 그녀가 지른 비명이 이를 입증하고 있었다.
“잘 참았소, 명. 그랬으면 아주 난처할 뻔했소. 앞으로도 힘을 쓰기에 앞서 신중하고 또 신중하길 바라오.”
침묵에 잠겨 있던 진천이 입을 열자 명은 기쁜 모양이었다.
“대체 그 말은 누구에게 들었소?”
이제야 의문이 풀린 진천은 고소를 지었다. 명이 말하는 ‘키 작은 여자’는 하수린일 터였다.
진천은 잠시 머릿속으로 명과 강민의 대결을 그려보았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명이 이겼을 거요. 그가 마지막에 발한 수법에 다치긴 하겠지만 그의 칼은 명을 벨 수 없소.”
안심한 듯 조그맣게 한숨을 토해내는 명을 보며 진천이 초를 쳤다.
“하지만 그의 공력이 배가되면 명의 승리는 물론이고 무사함도 장담할 수 없소.”
명은 금세 풀이 죽었다. 진천은 그녀의 기운을 북돋았다.
“그러니 무공 수련에 더욱더 매진하기 바라오. 명은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소. 꾸준히 정진한다면 팔대무왕이 떠난 세상에서 최강의 무인이 될 터이고 그러면 내가 부탁했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소.”
거짓말로 명을 기만할 수도 있었지만 진천은 솔직히 답했다.
“아마도 현재의 내 무력까지가 명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일 듯싶소.”
명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진천은 퍼뜩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강민과 곽건. 그로 인해 날개가 꺾이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의문의 여지없이 수십 년 후 천하제일인의 권좌를 놓고 다투었을 것이었다. 본의 아니게 정사 무림의 미래들을 제거한 격이 된 진천은 기분이 묘했다.
“천재들은 많지만 명을 능가할 이는 없소. 삼사십 년 후쯤엔 내가 소 형이라고 부르는 이가 명에게 필적할는지는 모르겠소. 대웅이나 하 소저도 명의 어깨 어림까지는 올라올 거요. 그들에게 따라잡히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검왕 어르신의 검공을 체득해야 하고 내 팔영보를 익혀야 하오. 명이 게으름을 부리지 않는 한 내 예언은 그대로 실현될 거요.”
굳었던 명의 얼굴이 풀렸다.
“고맙소, 명. 정말 고맙소.”
진천은 명을 부드럽게 안고서 등을 토닥였다. 그의 손길을 즐기던 명이 그에게서 떨어졌다.
진천은 실소했다. 그러고 보니 그도 갑자기 허기가 졌다. 사흘하고도 반나절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시장할 만도 했다.
“내려가서 생고기를 좀 찾아보겠소. 금방 갔다 올 테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구려.”
방을 나온 진천은 화연으로 몸을 감추고 주방에 잠입했다.
명은 채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익힌 고기도 싫어했다. 식재료를 저장해 둔 곳에서 싱싱한 활어들을 발견한 진천은 한 마리를 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명은 별미인 양 맛있게 먹었다.
오시를 알리는 징소리가 일곱 번 울려 퍼졌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 중천에 뜬 해가 태평전 경내를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메운 일만 여 군중의 머리에 따사로운 햇살을 내려 보냈다.
전각 전면에 설치된 직방형의 단상 위에는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앙의 태사의에서는 물경 사십 년이나 정파 무림의 지존으로 군림해 온 북천도왕 강운이 정맹의 무인들을 굽어보고 있었고, 그의 좌우로는 정심원의 원로들이 앉아있었다.
진천은 그들 대부분이 낯익었다. 창천도군 문찬경이 그와 눈인사를 나누었다. 그 외에도 사평 팽가의 가주인 유운검군 팽자방과 전날 소화원에서 그에게 공격적인 언사를 내뱉었던 고암설가의 이인자 설국환 등이 진천에게 눈짓으로 알은체를 했다.
기실 그들만이 아니라 장내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은연 중 진천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스물 네 명의 단주(團主)들과 더불어 단상에게 가장 가까운 자리에 착석해 있던 진천은 뒤통수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모두들 북천도왕의 눈치를 살폈다. 한 시진 전 선휴각 앞에서 원주 강가의 보물에게 일어난 참사는 이미 정맹 내에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가문의 미래가 하루아침에 폐인이 되어버렸으니 북천도왕의 심사가 편할 리 만무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북천도왕의 안색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어둡기는커녕 화색이 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했다. 진천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씁쓸할 따름이었다.
외조부가 그에 관한 정보를 만천하에 퍼뜨리고 정파 무림 최고의 행사에 그를 부른 까닭은 불 보듯 뻔했다. 외조부는 이 자리에서 그의 출신을 밝히고 그가 강가의 일원임을 선언하려는 것이었다. 정맹과의 연합이 불가피해졌기에 진천은 외조부의 의도에 따르기로 했다. 모친을 위한 작은 선물이기도 했다.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킨 북천도왕이 군중 앞에 섰다.
화려한 백룡포(白龍袍)를 걸친 팔순의 무존(武尊)이 뿜어내는 태산 같은 위압감에 일만 군중은 숨을 죽였다. 위엄을 과시한 북천도왕이 심후한 내력이 깃든 중후한 음성을 토해내었다.
“개회사를 풀기에 앞서 모두에게 소개해 줄 이가 있다.”
호기심의 안개가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올라오거라.”
외조부의 명에 진천은 옆자리에 앉은 명의 손등을 슬쩍 건드린 후 의자에서 일어났다. 일만 쌍의 시선이 단상으로 올라가는 진천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외조부 옆에 선 진천이 군중을 향해 포권하며 허리를 숙였다.
“세평회의 진천이 무림의 동도들께 인사 올립니다.”
일순 북천도왕의 백미가 이마로 솟구쳤다. 세평회를 앞세운 진천의 언사가 언짢다는 심사의 표출이었다.
“이 아이는 나의 핏줄이다.”
북천도왕의 폭탄선언에 장내가 크게 술렁거렸다. 그의 뒤편에 있던 십삼인의 원로들이 모조리 기립했다. 충격이 가라앉기를 기다리지 않고 북천도왕이 말을 이었다.
“과거 본가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내 딸 아이를 내보내어야 했다. 이 아이는 내 여식의 아들이다. 어쩌다 보니 강호의 무뢰배들과 연을 맺어 그들을 사승으로 두게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강가의 혈족이다. 나는 이 아이에게 그자들의 죄업을 씻을 기회를 주었다.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강호초출 이후 이 아이가 보인 행보는 무뢰배들이 저지른 죄과를 어느 정도 만회했음을 인정할 만하다. 하여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이 아이를 거두기로 했음을 알리고자 한다.”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너무 놀라면 차라리 조용해지는 법이었다.
중인은 비로소 원주 강가의 미래를 이끌어갈 손자의 변고에도 불구하고 북천도왕의 표정이 밝았던 연유를 알았다. 꿩 대신 닭이 아니라 봉황을 얻은 격이니 죽상을 하고 있을 까닭이 없었으리라.
아무도 사사로운 일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다룬 북천도왕의 처사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사적인 사안으로 치부하기엔 절대천룡이 당금 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팔대무왕에 준하는 위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가 실질적인 무위로도 팔대무왕을 따라잡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였다.
정심원 원로들의 가슴은 예외 없이 암울함으로 물들었다. 태평전에 나오기 직전까지도 강가가 기르던 호랑이 새끼가 일찌감치 이빨이 뽑히고 발톱이 잘렸다는 소식에 희희낙락했는데 이건 새끼 범 대신에 숫제 용이 등장한 꼴이었다. 섬전도만 해도 버거웠거늘 절대천룡을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아직 약관에도 이르지 않은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정파 무림은 향후 최소한 일 갑자는 원주 강가의 지배를 받아야 할 것이었다.
사대세가 가주들의 절망감을 모를 리 없는 북천도왕이 쐐기를 박고자 했다.
“근자에 이 아이의 활약을 두고 여러 말들이 떠돌고 있음을 안다. 나 역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위인지 궁금하다. 이 아이가 검마를 꺾었다는 소문의 진위를 이 아이의 무공을 통해 확인하고 싶지 않은가들?”
북천도왕의 말뜻을 알아들은 군중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북천도왕이 그들의 기대를 채워주었다.
“이에 나는 오늘 친히 이 아이의 성취를 시험해 볼 것이다. 어떤가?”
일만여 군중은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북천도왕의 물음에 답했다.
외조부를 제지할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수레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굴러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던 진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진천이 예기치 않았던 외조부와의 대결을 목전에 둔 그 시각 정맹에서 남서로 사천팔백 리 떨어진 벽력도문에는 하얀 면사를 쓴 녹안(綠眼)의 여인이 들어서고 있었다.
사파 무림의 지존 남천도왕 곽경은 의관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로 달려 나와 그녀를 맞았다. 그녀가 독후 연진진이기 때문이었다.
향후 온 대륙을 들썩이게 할 절대천룡과 북천도왕의 비무에 비하면 너무도 사소하게 보였지만 후대의 사가들은 이날 독후의 방문이 천하의 운명을 바꿀 엄청난 중대사였음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