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03
제202화
곽건은 조부의 처소에 들어섰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조부와 마주 보고 앉은 면사여인을 본 순간 곽건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저 여자가 여긴 어쩐 일이란 말인가.
독후에게 눈길을 준 채 멍하니 서있는 곽건에게 곽경이 역정을 냈다.
“뭐 하는 게냐? 어서 독후께 인사 올리지 않고.”
조부의 음성에 배인 조바심을 인지한 곽건은 포권을 취하며 등이 바닥과 수평이 되도록 허리를 접었다.
“벽력도문 곽가의 건이 독후 어르신께 인사드립니다.”
곽경이 손자를 불렀다.
“이리 오너라.”
곽건은 조부의 의자 옆으로 가서 섰다. 양편에 의자가 두 개 비어있었지만 조부가 착석을 권하지 않았기에 감히 엉덩이를 댈 수가 없었다.
양손을 배꼽 아래에 모으고 자세를 낮춘 곽건은 아무 말도 없는 독후를 힐끔거렸다. 그러다 그녀의 녹색 동공이 그를 응시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얼른 시선을 떨구었다.
“나를 봐라.”
독후의 명에 곽건은 고개를 들었다. 독후와 눈이 마주친 곽건은 침을 삼켰다.
제길. 입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욕설이 곽건의 목구멍에 걸렸다. 폐인이 된 지금도 심장이 벌렁거리다니.
독후를 본 건 이번이 세 번째였다. 처음 본 날은 다섯 살 때였다.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지금도 어제 일처럼 기억에 생생했다. 기실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이는 독후가 아니라 조부였다. 하늘보다 높은 존재라 여겼던 조부가 한낱 인간을, 그것도 여자를 어려워하는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날의 독후는 단지 면사로 얼굴을 가린 괴인으로만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십 년 후에 독후를 다시 만났다.
곽건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해였다. 왜냐하면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해이기 때문이었다. 그해 그는 마침내 형을 따라잡았었다. 아니, 추월했었다. 처음 칼을 잡았던 날 세웠던 목표를 달성한 시기였고, 앞으로 온 세상이 내 앞에 무릎을 꿇을 거라 확신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구름에 닿은 성취감과 터질 듯한 자신감으로 무장된 열다섯의 소년에게 면사를 쓴 녹안의 여인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조부의 집무실에 들렀다 나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독후에게 곽건은 무장해제를 당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눈 밑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신비롭게 빛나는 녹안만으로 심혼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독후를 본 순간 곽건의 뱃속에서 불덩이가 올라왔다. 열정이나 숭배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날 것 그대로의 정복욕이었다.
곽건은 장차 무림지존이 되었을 때 반드시 취해야 할 전리품이 있음을 알았다.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는 당연히 천하제일인의 차지가 되어야 했다.
일 갑자가 넘는 나이 차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녀가 그를 기다려 줄 수 있는지 여부였다. 그가 천하를 일통한 황제가 되기 전에 그녀의 미모가 시들기라도 하면 만사휴의였다.
그날 이후 독후는 채찍이 되었다.
그녀는 일곱 달 전 하남신룡이라는 원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자극이었다.
전날 삼보장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절세미녀를 보긴 했지만 그가 보기엔 독후의 발바닥에도 미치지 못했다. 삼보장주의 여식도 경국지색으로 손색이 없을 미색을 뽐냈지만 독후에겐 어림도 없었다. 독후의 미와 자태는 지상이 아니라 천상의 것이었다.
곽건은 속이 쓰렸다. 쓰리다 못해 문드러질 지경이었다.
독후의 면사를 벗기고, 옷을 벗기고, 마음도 벗기리라 작심했던 바는 실현 불가능한 망상이 되어버렸다. 죽었다 깨어나도 알몸의 그녀를 내리누르며 심신에서 우러나는 봉사를 명할 수 없을 것이었다.
열흘 전 양자호에서 자신이 잃은 것이 무공과 미래만이 아님을 깨달은 곽건은 비참함으로 인해 심장이 녹아버렸다.
독후의 면사 속에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미소였지만 기쁨이 아니라 실망감의 표시였다. 월척을 낚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왔는데 목전의 고기는 피라미도 아니고 숫제 죽은 생선이었다.
독후는 오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남천도왕과의 면담이 끝난 후 현천각(玄天閣)을 나오다 통로에서 마주친 햇병아리의 생사의 결정을 두고 갈등했었다. 겁도 없이 그녀를 직시하며 그런 발칙한 눈빛을 보이는 자는 백이면 백, 한 줌의 독수로 만들었으나 결국 살려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그녀는 남천도왕이 부릴 난리가 귀찮았다. 그가 두렵지는 않았지만 그의 후계자임이 분명한 아이를 녹여버리면 꽤 성가시게 굴 터였다.
그렇더라도 뱀눈 소년의 목숨을 취하지 않은 건 다른 이유가 더 컸다. 그 아이는 그녀에게 ‘그’를 상기시켰다. 천하일통의 대업을 코앞에 두고서 그녀의 배신으로 뜻이 꺾였던 그 사내가 뿜어내던 특유의 자신감을, 소년은 가지고 있었다. 외모도 완전 딴판이었고 혈연이든 무연(武緣)이든 일 푼의 연관성도 없었지만 찰나지간 그녀는 ‘그’가 환생한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순간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독후는 ‘그’의 요청을 받자마자 오 년 전 벽력도문에서 스치듯 지나간 그 아이를 뇌리에 소환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목전의 청년은 그때의 소년이 아니었다. 저자는 단지 움직이는 시체에 불과했다. 그래서는 아무짝에도 쓸모도 없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던 독후의 발목을 잡은 것은 기대감과 간절함이 혼재된 곽경의 목소리였다.
“내 손자에게 어떻게 새로운 힘을 줄 참이오, 독후?”
곽경의 질문에 반응한 이는 독후가 아니라 곽건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게 새로운 힘을 주시다니요?”
암울함으로 물들어있던 곽건의 눈빛에 생기가 감돌았다.
독후가 그를 응시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면사에서는 옥음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곽경이 손자의 마음을 대변했다.
“어서 말해 주구려, 독후. 이 곽모, 독후가 허언을 내뱉을 분이 아님을 아오. 무엇이든 받아들이겠소. 이 아이가 다시 무력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독인이 되어도 아무 상관없소. 설사 그 과정에서 명이 끊긴다 해도 독후를 원망하지 않겠소.”
눈치 빠른 곽건이 잽싸게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할아버님 말씀처럼 어떤 결과도 감내하겠습니다. 독공을 익히다 죽어도 괜찮습니다. 부디 제게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만약 제가 회복된다면 어르신의 종이 되어 평생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제발 저에게…….”
독후가 곽건의 간청을 중단시켰다.
“그만.”
입을 다문 곽건을 내려다보며 독후가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곽건은 독후의 명에 따랐다. 그의 눈을 본 독후의 녹안에 이채가 스쳤다.
“조금 낫군.”
곽건은 독후의 감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불길한 징조는 아니었기에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조부의 말마따나 독인이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하남신룡을 죽일 힘만 얻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몇 년 전에 너를 본 적이 있다.”
독후의 말에 곽건의 동체가 굳었다. 지금 이 얘기가 왜 나오는 걸까.
“이 전각 안에서였지. 기억하느냐?”
곽건의 안면에 경련이 일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에겐 운명과도 같았던 만남을. 분발의 분발을 촉구했던 계기를.
“네.”
심중의 격동을 감추기 위해 곽건은 짤막하게 답변했다. 그럼에도 그의 음성은 버들피리에서 나오는 것처럼 떨렸다.
“그날 네 눈은 사뭇 인상적이었다. 무엇이든 부숴버리겠다는 패기가 그득하더구나. 마치 활화산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오늘 보니 썩은 동태눈이 되었어.”
곽건은 실의에 빠졌다.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는 이제 공력을 송두리째 잃은 폐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천하를 발아래 두겠다는 패기를 부릴 형편이 안 됩니다.”
곽경의 침중한 음성이 곽건의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독후에게 부탁하는 게 아니오? 이 아이에게 새로운 힘을 주겠다고 한 이는 독후였잖소?”
곽경은 말에 책임을 지라는 뒷말을 마저 뱉을 만큼 어리석은 위인이 아니었다.
독후의 녹안에 청광이 번득였다.
“공력 따윈 문제가 안 돼.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오로지 독기다. 육신과 정신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도 버텨내는 독심. 만약 네게 그러한 결기가 있다면 너는 단숨에 나를 비롯한 팔대무왕을 능가하는 무력을 얻게 될 것이다. 단순히 능가하는 정도가 아니라 압도하는 무력을. 하지만…….”
독후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곽건이 외쳤다.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고통도 견뎌낼 자신이 있습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곽경의 안구가 튀어나올 듯했다.
“정말이오, 독후? 정말 건이가 우리를 뛰어넘는 무인, 아니 독인이 될 수 있다는 게요? 그렇게만 된다면 이 곽모, 독후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소.”
곽경은 곽건처럼 무릎이라도 꿇을 태세였다. 흥분하는 조손에게 독후가 찬물을 끼얹었다.
“미리 설치지 마. 시험에 통과할 확률은 만분지일도 되지 않을 테니까.”
곽건이 부르짖었다.
“괜찮습니다. 만분지일이 아니라 억분지일이라도 가능성만 있다면 저를 써 주십시오. 제발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독후가 선뜻 수락의 의사를 밝히지 않고 뜸을 들이자 곽경-곽건 조손은 애가 탔다.
같은 시각 벽력도문에서 동북 방면으로 오천 리 가까이 떨어진 정맹에서는 또 다른 조손간의 비무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수백 초가 지났지만 아직도 형세는 팽팽했다. 가히 용호상박이었다.
일만여 군중은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광장의 군중 가운데엔 이십 년 전 맹주전의 인공호수 위에서 벌어졌던 권왕과 북천도왕의 경천동지할 대결을 관전했던 이들이 칠팔 천에 달했지만 그들이 보기엔 오늘의 일전은 단연 그때 이상이었다.
북천도왕의 무위가 당시보다 한층 상승했음은 명명백백했다. 그의 쌍도가 일으키는 강기폭풍은 하늘마저 찢어발길 위력을 발산했다. 그러나 북천도왕이 천공에 펼쳐놓은 도강의 그물은 절대천룡을 어쩌지 못했다. 잡아야 쪼개든 자르든 할 것이 아닌가. 어지러이 공중을 수놓은 강기의 선(線)들은 신출귀몰한 절대천룡을 범하지 못하고 번번이 그가 남겨놓은 환영만 갈랐다.
절대천룡은 단지 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좌수에서 돋아난 백강은 북천도왕의 쌍도와 충돌하고도 밀리지 않는 힘을 과시했다. 절대천룡의 공격에 북천도왕도 칼로만 맞불을 놓지 못하고 현란한 신법을 발해야 했다.
천외천의 무존들이 펼치는 신공절학의 향연에 넋을 빼앗기면서도 정맹의 무인들은 반백년 동안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지속되었던 당금 무림의 지배구조에 균열이 일어났음을 알았다.
단순한 균열이 아니었다. 오늘의 비무는 구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머지않아 천하는 절대천룡이라는 희대의 괴물에 의해 평정될 것이었다. 누가 있어 저 젊디젊은 초인의 진군을 막을 수 있겠는가.
일만 군중의 머릿속은 각기 다른 생각들로 복잡했지만 그들이 심중에 떠올린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하나로 모아졌다. 향후 이삼 년, 아니 일이 년만 지나면 천하의 누구도 절대천룡의 적수가 되지 못하리라.
진천은 외조부가 드디어 분천일획을 구사할 것임을 예감했다.
적당한 시기였다. 그도 단전에 남아있는 내력을 모조리 쏟아 부어 마지막으로 양단을 발할 참이었다.
천둥 벼락이 쉴 새 없이 내리치던 광장에 일순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더니 번쩍, 두 개의 선이 허공에 나타났다. 선들은 서로 엇갈렸다. 그 순간 일만 개의 눈은 천공이 네 조각으로 갈라지는 기변을 목도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무림사에 영원히 기록될 비무가 종결되었다.
군중은 하늘에서 눈송이처럼 서서히 떨어져 내리는 노소를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누가 승자인지를 구별하려는 것은 무의미했다. 천신만이 그들의 우열을 가릴 수 있을 터였다.
일만이 넘는 군중이 모여 있음에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광장에 내려선 두 사람이 처음 비무를 시작할 때처럼 오륙 장의 거리를 격하고 서서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노인의 치뜬 눈에서는 아직도 가시지 않은 충격이 일렁인 반면 젊은이의 처진 눈은 그저 담담함을 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