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07
제206화
성대진이 통나무 같은 굵직한 목에 얹힌 넙데데한 면상을 모로 기울였다.
“감사인사라니? 그 아이의 정체를 물어본 것 말고 또 내가 자네에게 감사를 받을 일이 있었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성대진을 보며 진천이 대답했다.
“전날 마령 문가의 풍뢰도를 통해 청한 사안을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해결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단주께 감사의 뜻을 담은 서찰을 보내려고 했으나 제 외조부께서 오늘 정맹에 오라고 하셔서 가는 김에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성대진이 무릎을 쳤다.
“아, 난 또 뭐라고. 그에 관해서라면 내가 자네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지. 자네의 고언 덕분에 중립지대 접수 이후 해이해졌던 맹의 기강이 잡혔으니 말일세.”
한 달 전 진천은 충동적인 결정으로 도화각의 금봉황을 삼보장에 데려왔던 문상현에게 평민들에 대한 무사들의 즉결 처분권을 강력히 제한하는 조치를 취해줄 것을 골자로 하는 건의안을 집법단에 전해주도록 했었다.
문상현에게서 진천의 요구사항을 들은 성대진은 정맹 산하의 삼백여 문파와 가문들에게 율령의 준수를 촉구하는 공문을 발송함과 동시에 대대적인 조사 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일천 명이 넘는 하급무사들이 권한을 남용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대부분은 엄중한 경고로 끝났지만 아무 잘못도 없는 민초들을 조그만 의혹을 빌미로 괴롭히다가 살해하는 등 횡포의 정도가 심했던 일부는 무사하지 못했다. 예순두 명이 공개적으로 참수 당했고 팔십여 명이 태형을 받고는 뇌옥에 갇혔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인 격이라 불만의 아우성이 벌떼처럼 일었지만 떠드는 주둥이들도 뭉개버리겠다는 성대진의 서슬에 이내 잠잠해졌다.
정맹에서는 염왕과 동급으로 통하는 집법단주 성대진의 광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윗물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성대진은 오대세가의 혈족들에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감찰단주(監察團主) 설국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패악을 저지른 악종들을 색출한 성대진은 그들을 무광뢰에 쳐 넣었다. 한 점의 빛도 들지 않는 무광뢰는 의지가 굳건한 이들도 몇 달만 갇혀있으면 이지를 상실한다는 악명을 지닌 뇌옥이었다.
집법단의 전횡과 폭주에 그 자신의 성주 성가를 비롯한 오대세가 명숙들의 항의가 빗발쳤으나 성대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 사안은 최고 의결 기구인 정심원까지 올라갔다. 갑론을박 끝에 원로들은 성대진에게 신중한 법 집행을 당부하고 월권에 대해 주의를 주는 정도로 넘어갔다. 그의 퇴진과 원상회복을 외쳤던 이들의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지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맹주인 북천도왕이 성대진의 편을 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군소리들은 쏙 들어갔다. 절대 권력을 쥔 맹주가 두둔하는 이상 성대진의 실각은 기대난망이었다. 오대세가는 맹주를 등에 업은 성대진의 칼춤에 식솔들이 걸릴까봐 내부 단속을 철저히 하는 방식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진천이 다시금 성대진을 치하했다.
“단주님의 결단과 실행력 덕분에 정파 무림이 한결 정화된 듯합니다. 삼보장에서 단주님과 집법단의 활약상을 전해 들으며 통쾌함을 금치 못했습니다.”
진천이 은근슬쩍 ‘님’을 도로 붙였으나 의식하지 못한 성대진이 그답지 않게 쑥스러워했다.
“활약이라니 당치 않네. 주어진 소임을 다했을 뿐, 칭찬받을 일이 아닐세. 기실 그동안 임무를 방기한 셈이니 오히려 질책을 들어야 마땅하네.”
성대진의 겸양에 진천은 빙긋이 웃었다. 앞으로도 변함없는 활약을 기대하겠다는 사족을 달 필요가 없었다.
어인 일인지 성대진의 미간에 그들이 드리웠다.
“사실 나는 이번 집법단의 행사에 걸려든 자들을 처벌할 자격이 없는 위인일세. 자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젊은 시절 씻지 못할 죄를 지었다네. 술에 취해 세 명의 목숨을 빼앗고 네 사람을 불구로 만들었네. 모두들 무고한 이들이었지. 참으로 참람할 따름일세. 나는 그날 이후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네. 이 설삼주에도 주정은 한 방울도 들어있지 않다네.”
진천은 아직도 내용물이 그대로 있는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도 시선을 술잔에 두며 성대진이 말을 이었다.
“내가 이번에 잡혀 들어왔던 자들에게 들이댔던 잣대를 나 자신에게 적용한다면 나는 목이 잘리거나 최소한 무광뢰에서 십 년을 썩어야 했을 걸세. 자네는 자네가 저지르지도 않은 사부들의 과오를 속죄하겠다며 선업을 쌓고 있는데, 이 늙은이는 알량한 직책 뒤에 숨어 남에게만 엄격한 치죄를 실행했으니 실로 후안무치한 작자가 아닐 수 없네.”
진천은 탁자 위에 놓인 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좋군요. 다음에 삼보장에 오시면 저도 근사한 차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성대진이 물었다.
“나를 용서하겠는가?”
“제겐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그렇구먼. 실언이었네. 자네 말마따나 내 악행에 희생당한 이들에게 평생을 빌고 저승에 넘어가서도 빌어야 할 테지. 그래도 내 죄업이 씻기지 않을 것임을 아네. 죄인의 가슴팍에 한 번 찍힌 화인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듯이.”
고개를 숙인 성대진을 지그시 바라보며 진천이 나직이 말했다.
“제 고향 근처의 숲에 제가 스승으로 섬기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 말씀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다더군요.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라며, 중요한 것은 그 실수를 반성하고 되풀이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된 언행으로 인해 몸과 마음을 다친 이들에게 진심을 다해 사과한 연후 할 수 있는 모든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제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주님은 최선을 다하셨다고 믿습니다. 제 의형이신 권왕 어르신께서는 단주님을 매우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비록 어린 날 끔찍한 죄를 저질렀지만 소인배들과 위선자들이 판을 치는 정파 무림에서는 드물게 오랫동안 올곧은 길을 걸어온 분이라더군요. 저도 제 의형의 평가에 동의합니다. 단주님께서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기록이 그 사람의 내면과 심성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이 수십 년 간 남긴 족적은 그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법입니다. 저는 단주님께서 앞으로도 변함없으시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입니다.”
묵묵히 귀를 기울이던 성대진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자신의 반응이 민망스러웠지 성대진이 급히 변명했다.
“미안하네. 마치 평생을 기다려온 지음을 만난 듯해 주책을 부렸구먼.”
진천은 따뜻한 미소로 성대진을 위무했다.
“이렇게 가다간 내 바닥을 다 드러내겠구먼. 일 얘기나 하세. 수 년 내로 무림지존이 될 존귀한 자네가 이 하잘것없는 늙은이에게 무슨 부탁을 하겠다는 건가? 말만 하게나. 내 애첩의 속곳을 달라고 해도 들어줌세.”
진천은 고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단주님.”
반 시진 후 진천은 추상전에 딸린 옥청관을 나섰다.
성대진은 배웅 정도가 아니라 길잡이를 자처했다. 진천은 그의 친절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정맹의 지도를 머릿속에 담아두었기에 혼자서도 목적지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성대진과 함께 다니는 것이 훨씬 편했다. 성대진이 앞장을 서자 사람들은 호랑이를 본 사슴 떼처럼 흩어졌다.
진천은 정파제일검으로 불리는 유운검군 팽자방을 방문하는 것으로 순회를 시작했다.
팽자방은 진천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사평 팽가의 가주이기도 한 팽자방은 조카딸인 팽하연이 가문의 만류를 뿌리치고 세평회에 든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며 진솔한 속내를 내비쳤다. 진천은 내년이면 아흔 줄의 들어서는 백발검사와의 대화를 즐겼다.
다음 방문지는 고암 설가가 똬리를 튼 만복전이었다. 설가의 가주인 설국전도 팽자방 못지않게 진천을 반겼다. 그와의 담소자리엔 전날 소화원에서 진천에게 공격적인 언사를 퍼부었던 설국환도 참석했다. 설국환은 기세등등했던 한 달 전과는 달리 진천과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그러다 시종여일 겸손하고 온화한 진천의 태도에 마음이 놓였는지 나중에는 격의 없는 친우처럼 굴어 좌중을 실소케 했다.
진천은 마령 문가와 고암 설가도 잊지 않고 찾았다. 문가의 백도전(百刀殿)에선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다른 정심원의 원로들에 비해 창천도군 문찬경과는 인연이 특별히 깊었기에 할 얘기도 많았다.
원주 강가를 마지막으로 오대세가 방문을 마무리 지었을 때는 벌써 자시(子時)에 가까웠다. 진천은 그때까지 그림자인 양 붙어 다녔던 성대진과 집보각(輯報閣) 앞에서 작별을 고했다. 성대진은 재회를 약속하며 발길을 돌렸다.
집보각에 들어선 진천은 늦은 시각의 방문부터 사과했다.
맹주전으로부터 통보를 받고 초저녁부터 대기하고 있던 집보각주 문중석(文重石)은 진천의 사과를 심드렁하게 받아들였다. 진천은 굽실거리는 느낌이 전혀 없는 그의 당당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문중석은 이름과는 달리 버드나무가지처럼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거라는 표현이 더 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가냘픈 몸이었다. 기실 문씨이나 문중석은 마령 문가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고 정맹 서열 칠십팔 위의 고위직이되 무인도 아니었다. 그는 정맹의 으뜸가는 정보통이자 책사였다.
문중석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지만 진천은 아쉽게도 그와 사담을 나누며 친분을 쌓을 여유가 없었다. 보아야 할 정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문중석이 꺼내오는 두루마기와 첩지들을 차례로 살펴본 진천은 새삼스럽게 정맹의 저력을 실감했다. 북운상단도 상운 내에서 최상위의 거점 중 하나로 인정받는 곳이지만, 보유한 정보의 질과 양에서 정맹과는 비교조차 되지 못했다. 문자 그대로 달빛과 반딧불의 차이였다.
진천은 새벽이 올 때까지 특급에서 오륙 급까지 분류된 강호인명록을 훑어보았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명은 어느새 밀실의 구석에 가서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동이 틀 무렵 진천은 그의 요구사항에 응하느라 하룻밤 사이에 큰 병을 앓은 이처럼 진이 빠진 문중석에게 그가 추린 문건들의 필사를 부탁했다. 방대한 양이었지만 이제야 시중 노릇에서 해방되었다고 여긴 문중석은 생기를 되찾았다. 진천은 그가 특급 정보만 직접 처리하고 나머지는 아랫사람들에게 맡길 것임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선휴각으로 돌아가 쉴 생각을 접은 진천은 집보각에 남아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부담스러운 귀빈을 빨리 내보내고 싶었던 듯 문중석은 역량을 과시하며 속전속결로 해치웠다.
그 결과 진천의 예상보다 한 시진이나 이른 오시 말에 결과물이 나왔다. 진천은 두 시진 이상 내용을 옮겨 적느라 오른팔에 쥐가 나도록 고생한 문중석과 문사들에게 일일이 감사를 표한 후 집보각을 나섰다.
진천은 명과 함께 집보각 밖에 대기 중이던 마차에 올라탔다. 황금 깃발을 꽂은 마차는 정맹에서 일신 외곽의 주악산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의 정체도 없이 쭉 내달렸다. 대로를 벗어나 돌밭에 들어서자 진천은 마차를 세웠다. 마차에서 내린 진천은 마부의 손을 잡고 그의 수고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오십 대 마부는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네 필의 준마도 한 번씩 쓰다듬은 진천은 산정을 향해 몸을 날렸다. 명이 그의 뒤를 따랐다. 맹인소녀의 엄청난 신법에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만큼 놀란 마부는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