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10
제209화
초저녁에 시작된 회의는 자정이 지나서야 끝났다.
이슥한 밤, 모두가 각자의 처소를 찾아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하수린이 진천에게 독대를 청했다. 명을 노덕에게 맡긴 진천은 그녀를 따라 삼층으로 올라갔다. 진천이 방에 들어서자 문에 걸쇠를 내린 하수린이 의자를 가리켰다. 진천은 조용히 그녀가 지정한 자리에 가서 앉았다. 소담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착석한 하수린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고소를 지은 진천이 물었다.
“왜 보자고 했소, 하 소저?”
하수린이 반문했다.
“왜 보자고 했을 것 같아요?”
짐작하는 바가 있었지만 진천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소.”
하수린이 웃었다.
“당신은 정말 똑똑한 사람이지만 거짓말에는 재주가 없네요. 그렇게 다 표가 나는데 시치미를 떼다니, 민망하지 않나요?”
“…….”
“맞춰 봐요. 당신 특기잖아요?”
진천은 하수린의 부담을 덜어주기로 했다. 그녀로서도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혹시 하 소저와 나, 그리고 소 형에 관해 할 말이 있어서 불렀소?”
하수린이 감탄했다.
“역시! 당신은 정말 모르는 게 없군요. 내가 무슨 말을 할지도 당연히 알 테죠?”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는 하수린을 직시하며 진천이 응답했다.
“그런 것 같소.”
하수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잘 됐네요. 속 편하게 털어놓을 게요. 나는 결정했어요. 오늘부로 당신에 대한 내 연정을 거두기로. 그리고 소중걸이란 사내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진천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심히 하수린다웠다. 너무나 직설적인 선언에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웃음 짓는 진천을 노려보며 하수린이 가늘지만 짙은 눈썹을 찡그려 갈매기 두 마리를 만들었다.
“조금도 아쉽지 않은 모양이죠? 아니, 귀찮은 여자가 알아서 떨어져나가 줘서 기쁜 건가요?”
웃음기를 지운 진천이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하 소저도 좋아하고 소 형도 좋아하오. 두 사람은 고 형과 차 소저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오. 진심으로 두 사람의 앞길을 축복하오.”
하수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더니 눈망울이 축축해졌다.
하수린이 표정을 수습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일 푼의 가식도 없음을 알기에 속상하네요. 당신이 나를 헤픈 여자라 욕하지 않으리라는 걸 믿지만 나 자신을 변명하고 싶어요. 나는 당신을 여전히 사랑해요. 하지만 그 사내에게 끌린 것도 부인할 수 없어요. 둘 다 가지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럴 순 없겠죠? 몇날 며칠 고민했어요. 나를 위해서도, 당신들을 위해서도 가급적 빨리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아까 마음을 굳혔어요. 당신을 놓아주기로. 그리고 그를 안아주기로.”
‘잘 했소.’라고 맞장구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진천은 가만히 있었다.
“마련과 사벌의 수괴들을 제거한 후 무림을 떠날 때 당신은 나의 동행을 허락하지 않을 테죠?”
답변을 요하는 질문이 아님을 알기에 진천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당신이 나를 뿌리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나는 아마 아직까지도 갈등하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젠 알아요. 아무리 내가 용을 써도 당신의 짝이 될 수 없음을. 설사 당신과 함께 떠날 수 있을 거라고 해도 나는 진심으로 내키진 않았을 거예요. 나에겐 여기서 이루고 싶은 일들이 있고 그건 당신 못지않게 중요하니까요.”
“…….”
“엿새 전 당신이 명을 데리고 열락궁으로 떠난 직후 미현이하고 후원의 너럭바위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어요. 당신의 미래에 관한 우리 두 여자의 의견이 일치하더군요. 뭔지 궁금하지 않나요?”
“…….”
“당신이 검왕 어르신과 동류라는 것이었어요. 당신은 평생 독신으로 지낼 거예요. 수많은 여인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
진천은 쓰게 웃었다.
“따지 못하는 감을 두고 남들도 먹지 못하도록 썩으라며 저주를 퍼붓는 게 아니에요. 미현이나 나나 당신을 원망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어요. 우리는 단지 누구도 당신을 충족시키지 못할 거라는 점을 공감했을 뿐이에요. 당신은 바다와 같아요. 모든 강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고 보듬을 수 있죠. 하지만 자신에게로 오는 물줄기 하나하나에 집착하지는 않죠. 그렇죠?”
시인하기도, 그렇다고 부인하기도 어려울 때는 묵묵부답이 최선이었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는 진천을 응시하던 하수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안해요. 이런 넋두리나 쏟아내려고 하려던 게 아닌데.”
진천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괜찮소, 하 소저. 그리고 나도 미안하오.”
진천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하수린은 뭐가 미안한지 세세히 늘어놓으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오. 강호에 나오자마자 하 소저를 필두로 훌륭한 벗들을 사귀게 됐으니. 내 바람은 단지 하늘의 안배로 이곳 삼보장에 모인 소중한 이들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뿐이오. 그리고 우리가 누린 행복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길 바랄 따름이오. 그것으로 족하오.”
하수린의 뺨으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알아요. 알고말고요. 그게 당신이죠. 그래서 당신에게 마음을 주었던 거고요. 하지만 좀 전에 말했듯 이젠 단념하겠어요. 당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저 문을 나가는 순간 나는 심장에서 돋아나는 칼로 당신에게로 뻗었던 연심을 가차 없이 끊어버릴 거예요. 벗으로서 변함없이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하겠지만 한 여인으로서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겠어요. 약속해요.”
진천은 손을 뻗어 하수린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일어서서 문으로 걸어갔다. 방을 나가면서 진천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흐린 달빛을 타고 산새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날아왔다.
청와옥을 나온 진천은 희미한 월광이 깔린 마당을 가로질러 백와옥으로 향했다. 밤이 이슥했지만 그의 예상대로 고량-차소영 부부와 노미현은 잠자리에 들지 않고 일층의 화초실(花草室)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진천은 불빛과 화향(花香)이 흘러나오는 별실로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갔다.
진천이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주렴을 걷고 불쑥 들어서자 세 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여긴 어쩐 일이냐, 천?”
고량의 물음에 진천이 처진 눈을 치떴다.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소? 무슨 모의를 하고 있었기에 이리들 당황하는 거요?”
고량이 웃었다.
“오늘따라 농담이 잦구나. 어서 와라. 너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차소영도 미소를 지으며 진천을 반겼다.
“차를 내올까요, 진 공자?”
“아닙니다. 노 소저와 할 얘기가 있어서 들렀습니다.”
차소영과 얼굴을 마주본 고량이 피식거렸다.
“결국 우리더러 자리를 비켜달라는 소리구나. 기꺼이 꺼져주마.”
삼보장의 공인된 연인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화초실을 나갔다. 그들이 이층으로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침소에 들었는지 이내 조용해졌다. 진천은 고량이 앉아있던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와 눈높이가 같아지자 노미현의 선홍빛 입술이 벌어졌다.
“무슨 일이죠?”
옥구슬이 은쟁반을 구르듯 청아했지만 냉랭함이 서린 음성이었다. 진천은 단도직입했다.
“노 소저에게 부탁할 게 있소.”
노미현이 침묵으로써 진천의 뒷말을 재촉했다.
“내가 무림을 떠난 후 노 소저가 명을 돌봐주었으면 하오.”
진천을 주시하는 노미현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진천은 자기도 모르게 들숨을 멈췄다. 껍질에 미혹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가르친 이는 나무족의 디안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있는 이는 평정심을 유지하기엔 너무나 아찔한 껍질이었다.
노미현이 초상화를 전문으로 하는 화공이 심혈을 기울여 그린 듯한 아미를 찌푸렸다. 그 모습마저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진천은 목전의 절세미녀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질문들 중 어느 것을 먼저 꺼낼지를 두고 고심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아이가 아니잖아요? 스무 살이 넘었다면서요? 그리고 청로나 검선도 당하지 못할 만큼 강하다면서요? 아무 힘도 없는 내가 어떻게 그녀를 감당할 수 있겠어요? 무슨 일로든 비위가 상한 그녀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나 같은 여자는 횡액을 면치 못할 텐데.”
“나이는 적지 않지만 그녀는 예닐곱 살 아이와 다름없소. 그것도 산골에서 자라 사람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는 아이라고 보면 되오. 그리고 불상사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싶소. 그녀는 적의와 투기에만 반응하오. 이점은 가린과 비슷하오. 악의를 가지고 자극하지 않으면 명은 순한 양이나 다름없소.”
“왜 나죠? 내가 제일, 아니 유일하게 한가하기 때문인가요?”
“전혀 그렇지 않소. 명에 관한 한 노 소저가 가장 듬직하기 때문이오. 실은 노 소저 말고는 안심하고 명을 부탁할 사람이 없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요.”
“방금 말한 대로 명은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소. 하지만 극도로 예민한 어린아이이기도 하오. 앞으로 그녀가 형성하게 될 심성이 세상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오. 그만큼 중요한 문제요.”
“…….”
“명은 형태를 갖춰나가고 있는 도자기이자 이미 심하게 깨진 적이 있는 도자기라오. 상처를 잘못 건드리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날 수 있는. 그녀가 부서지면 세상도 함께 깨질지도 모르오. 하여 나는 그녀가 단단해지기 전까지 노 소저가 그녀를 돌보았으면 하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정을 가르치면서.”
“…….”
“아직도 혼란스럽군요. 다시 한번 물을 게요. 둘러 가지말고 핵심을 말해 줘요. 왜 나죠?”
“노 소저는 상처의 깊이와 무게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오.”
“……!”
“어린 시절부터 아이보다 더 아이 같은 모친을 돌보았잖소? 그녀가 쏟아내는 원한의 언어들을 고스란히 감내하면서. 그럼에도 고결한 영혼을 상실하지 않고…….”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대단한 여자가 아니에요. 지금도 여전히 아프고 슬프고 두려워요. 지금도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심장이 녹는 것 같아요. 몸도 마음도 연역한 내가 다른 이를 돌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녀에게 필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소영 언니처럼 강인하고 포용력 있는 사람이에요.”
“내 생각은 다르오. 좀 전에 했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소. 오직 노 소저만이 명을 품고 다듬을 수 있소. 절대적으로 확신하오.”
“……설령 내가 당신의 청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녀가 동의할까요? 나는 아직 그녀와 한 마디도 나눠본 적이 없어요.”
“애당초 노 소저를 원한 건 내가 아니라 명이었소.”
“……?”
“내가 떠나고 나면 누구하고 함께 지내고 싶은지 명에게 물어봤소. 나는 그녀가 누구를 지목하든 노 소저로 바꾸도록 설득할 참이었소. 그런데 뜻밖에도 명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노 소저를 택했소.”
“이유가 뭔가요?”
“……노 소저에게서 좋은 느낌이 난다고 하더군요. 이곳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노 소저가 나에게 가장 진한 공기를 보내고 있다며. ‘진한 공기’는 그녀의 표현이었소.”
“…….”
“노 소저도 눈치 챘을 테지만 그녀는 나를 아버지처럼 여기고 있소. 부디 그녀에게 어머니가 되어 주오. 간곡히 부탁하오.”
노미현은 오랫동안 말없이 진천을 바라보았다. 진천은 복잡한 감정이 담긴 그녀의 시선을 담담히 맞받았다. 노미현이 처음에 제기하고자 했던 의문을 마지막에 꺼내놓았다.
“어째서 그녀를 데려가지 않나요? 그녀도 당신처럼 무림의 패권 따위에는 아무 욕심도 없을 텐데.”
진천은 노미현의 목소리에 담긴 불안을 감지했다. 그렇기에 솔직히 답하기로 마음먹었다. 적당한 말로 그녀를 기만하는 것은 그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돌볼 수 없소. 이승에서 내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오.”
진천의 답변을 예감했던 듯 노미현은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녀의 봉목에서는 두 줄기 옥루가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진천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눈물을 훔쳐 주고 싶었지만 자제했다.
잠시 후 슬픔을 꾹꾹 눌러 담은 노미현의 옥음이 무거운 정적을 깨뜨렸다.
“당신이 떠난 후 내가 그녀를 돌볼게요.”
진천이 밝게 웃었다.
“고맙소, 노 소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