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11
제210화
월교에서 북운상단에 보낸 전서구는 다음 날 신시(申時) 말에야 도착했다.
진천이 예상했던 것보다 서너 시진이나 늦은 시간이었다. 그보다 실망스러운 건 서신의 내용이었다. 검후는 고작 여섯 줄밖에 안 되는 답신에서 애매한 표현으로 일관했다. 오독의 여지가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있는 내용은 진천이 그녀의 허락 없이 명의 신분을 만천하에 노출시킨 것에 대한 분노와 항의뿐이었다.
진천은 검후가 여전히 간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어부지리를 노릴 작심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진천은 그녀가 자신의 청에 응할 가능성이 절반을 넘으리라 보았다.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기 때문이었다. 성공하기만 하면 그녀는 향후의 논공행상에서 상당한 지분을 주장할 수 있을 터였다.
검후와 상관없이 진천은 예정했던 거사를 치르기로 결심했다. 쇠뿔은 단 김에 빼야 했다. 장왕이 열락궁을 떠나 세평회에 가세했음을 마왕과 남천도왕이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이 대비책을 세우기 전에 치는 게 상책이었다.
전날 장왕과의 비무에서 권왕이 입은 내상이 마음에 걸렸으나 진천은 전투에 아무런 지장도 없을 거라는 그의 확언에 따라 염두에 두었던 일정을 강행하기로 했다. 시일이 흐를수록 그가 염려하는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질 터이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어떻게든 독후라는 변수가 개입하기 전에 사벌과 마련의 우두머리들을 제거하고 싶었다.
사위에 땅거미가 내려앉자 진천은 두 명의 무왕과 더불어 삼보장을 출발했다.
기이한 일행이었다. 권왕은 너무나 왜소했고 장왕은 지나치게 비대했다. 진천은 그의 좌우에서 따라붙는 그림자들의 부조화로 경신의 균형을 잃을 지경이었다.
권왕과 장왕은 가는 동안 쉴 새 없이 다투었다. 장왕이 그가 삼보장에서 받은 푸대접에 대해 구시렁거리면 권왕이 면박을 주고, 그러면 또 장왕이 받아치는 악순환이 삼천리가 넘는 여정 내내 반복되었다. 지상 십여 장의 상공에서 떠들어 세인들의 귀에 걸릴 우려가 없는 데다 이동의 속도를 늦추는 것도 아니었기에 진천은 중재에 나서지 않고 두 노인이 싸우도록 내버려 두었다. 장왕은 처음에는 진천의 눈치를 보았으나 그가 끼어들 기미가 없자 마음껏 권왕과 입씨름을 벌였다.
천공을 가르는 야조들을 깜짝 놀래키며 남행한 일소이노(一少二老)는 새벽녘에 진천이 경유지로 삼았던 곳에 이르렀다. 협곡에 내린 두 노인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여긴…….”
장왕이 뒷말을 잇지 않고 진천을 쳐다보았다. 권왕도 진천에게 눈을 돌리며 장왕이 못 다한 말을 이었다.
“호야곡이 아니더냐?”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큰 형님.”
장왕은 안절부절못했다. 권왕이 일자 눈을 부릅떴다.
“왜 하필이면 이리로 온 게냐?”
“몇 가지 이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근역은 아직 중립지대에 속해 있기에 사벌의 감시망에 걸려들 위험성이 적습니다. 그리고 호야곡 일대는 범인들이 접근을 꺼리는 험지라…….”
권왕이 진천의 말을 잘랐다.
“표면적인 거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야지, 이 녀석아. 아니, 가만있어 봐라. 내가 맞춰보마. 필시 천하의 운명을 바꾸었던 역사의 현장을 네 눈으로 보고 싶었던 게지. 어떠냐?”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큰 형님.”
진천이 선선히 시인하자 권왕이 우쭐거렸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이왕 왔으니 안내하마.”
“고맙습니다, 큰 형님.”
장왕은 발을 뺐다.
“나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둘이 다녀오구려.”
권왕은 못마땅한지 눈살을 찌푸렸으나 진천은 내심 장왕의 불참을 반겼다. 권왕이 장왕에게 동행을 강권하기 전에 진천이 선수를 쳤다.
“그러시오. 혹시 모르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이런 데 누가 올 거라고 그러는 게냐? 네 입으로 방금 전에 범인이 접근을…….”
불쾌감을 드러내던 장왕은 진천이 유순한 눈매를 찡그리자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권왕은 고양이 앞의 쥐 꼴을 한 장왕의 처지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가자, 아우야.”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권왕이 협곡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장왕을 일별한 진천이 그의 뒤를 쫓았다.
폭이 일이 장에 불과한 골짜기를 이백여 장 들어가자 호리병의 불룩한 부분처럼 널찍한 타원형의 공간이 나왔다. 전날 백도방과 오인결을 치렀던 무연곡과 비슷한 지형이었다.
“여기다. 이곳에서 그를 끝장냈더랬지.”
권왕이 사오백 평 넓이의 공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감회보다는 회한이 더 깊이 서린 목소리였다.
“아니다. 끝장을 내지는 못했구나. 팔을 자르고 턱을 박살내고 배를 터뜨렸지만 결국 놓쳐버렸으니.”
진천은 공터 중앙으로 걸어갔다. 오십 년 전 이 자리에서 있었을 용호들의 쟁투는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세월의 비바람에 깎인 탓이었다.
공터의 중심에서 소용돌이의 반대방향으로 돌면서 진천은 바닥을 살폈다. 하지만 연인에게 중독된 상태에서 수하들의 협공에 만신창이가 된 풍운아가 피신했다는 구멍을 찾지 못했다. 결국 진천은 권왕에게 물어야만 했다.
“무황이 빠져들었다는 틈이 어디쯤에 있는지요?”
권왕이 찝찝한 기색을 내비쳤다.
“글쎄, 저기 어림일 듯싶은데.”
진천은 권왕의 검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자그마한 바위까지 들춰가며 주위를 꼼꼼히 뒤진 진천은 풀밭에서 지층이 균일하지 않은 곳을 발견했다. 무릎을 굻고 앉은 진천이 두더지처럼 땅을 파자 멀리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권왕이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 뭐 하는 게냐, 아우야?”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요.”
권왕이 짧은 눈썹을 좁은 이마로 휙 올렸다.
“구태여 확인할 것까진 없지 않으냐? 설마 그가 그 밑 어딘가에 숨어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지?”
권왕의 진지한 음성에 진천은 쓰게 웃었다.
“아닙니다, 큰 형님. 저는 단지 무저갱 아래의 늪과 그 속에 있다는 수로를 알아두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제야 진천의 의도를 이해한 권왕이 일자 눈을 크게 떴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탈출로를 봐 두려는 것이구나. 전날의 만상석굴처럼.”
“그렇습니다, 큰 형님.”
“하지만 우리가 위기에 처할 일은 없지 않겠느냐? 강 맹주나 검후가 확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네 권고에 따를 확률이 오 할 이상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러면 둘 중 하나는 나타날 터. 설사 그들이 둘 다 동참하지 않는다고 해도 막가가 있으니 우리는 여전히 압도적인 전력이 아니더냐? 이 노형이 보기엔 과도한 조심성인 것 같다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큰 형님. 하지만 일을 도모하기에 앞서 가급적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 대안을 마련하라던 고향 어른의 가르침을 따라도 손해 볼 것은 없겠지요. 어차피 가는 길이니 온 김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퇴로와 도피처를 확보해두어서 나쁠 게 없을 듯싶습니다.”
말을 하던 도중에 흙에 덮여있던 무저갱의 입구를 찾은 진천은 몸을 일으켰다. 진천의 눈길을 받은 권왕이 손사래를 쳤다.
“나는 됐다. 벌써 오십 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저 아래서 몇날 며칠을 고생했던 일이 내 기억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구나. 꼭 유난을 떨고 싶거들랑 나를 끌어들이지 말고 너 혼자 갔다 오려무나.”
“알겠습니다, 큰 형님. 의외로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반 시진 내로 제가 올라오지 않으면 장왕에게 돌아가십시오. 그에게는 제가 주변을 탐색하러 나갔다고 해주십시오.”
“오냐. 썩은 내가 진동을 하는 곳이니 미리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게다. 들어갔다 나오면 살도 문드러질지도 모른다.”
쓰게 웃은 진천은 시커먼 구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무저갱이라고 했지만 구멍에서 바닥까지의 높이는 기껏해야 삼십 장 정도였다. 그렇더라도 진천은 늪에 닿을 때까지 한참을 떨어져 내려야 했다.
권왕의 경고는 과장이 아니었다. 늪에 들기도 전에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지독한 악취가 진천의 코를 덮쳤다. 진천은 늪이 일종의 시호(屍湖)임을 알았다. 현재의 호야곡은 사람은 물론이고 들짐승도 발을 들여놓지 않는 오지이니 아마도 오래 전 동물들이 일시에 떼죽음을 당했던 장소일 터였다.
호흡을 닫은 진천은 엿물처럼 끈적끈적한 늪 속으로 잠영해 들어갔다. 시력을 사용할 수 없는 조건이었기에 진천은 기감을 활용했다. 늪은 넓었으나 권왕에게 들었던 것만큼 깊지는 않았다. 진천은 오십 년의 세월 동안 늪이 서서히 줄어들었으리라 추측했다. 그렇다면 원래는 훨씬 더 큰 죽음의 연못이었을 터였다.
진천은 시간낭비를 하지 않고 권왕이 일러주었던 여섯 개의 수로들 중 외부의 시내와 통해있다는 두 곳에 집중했다. 전날 자세히 들었었기에 별로 힘들이지 않고 위치를 찾아 낸 진천은 둘 모두를 점검했다. 하나는 실개천으로 이어졌고 다른 하나는 제법 넓은 하천과 연결되었다. 두 번째 것은 오십 년 전 무황을 뒤쫓던 권왕과 장왕을 좌절시켰던 경로였다.
하지만 진천은 무황이 강의 흐름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는 않았으리라 추정했다. 그랬다면 십중팔구 집요하고도 광범위한 수색작업을 펼쳤던 추적자들에게 걸렸을 것이었다. 무황은 늪 가장자리의 토벽 너머에 은신하고 있었을 공산이 컸다. 무학은 물론이고 이술(異術)이나 잡기에도 달통했다는 무황이라면 단순한 귀식대법이 아니라 심장박동 자체를 멈춘 시체로 화해 수일을 버틸 수도 있었을 터였다.
호련사성이 강줄기 일대만 이 잡듯이 훑을 것이 아니라 늪의 사방을 철저히 뒤졌다면 대어를 낚았을 공산이 컸다. 그랬다면 그들은 무황의 부활 가능성을 두고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되었을 터이고 무림의 역사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었다.
시내로 이어진 수로들을 조사한 후 늪으로 돌아온 진천은 공중으로 치솟아 오르며 공상을 털어내었다. 그의 추론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무의미한 놀음이었다. 무황 나중강은 오십 년 전 이곳에서 구사일생했을지는 모르나, 그리고 그때는 천하 전체와 맞먹는 비중을 지녔을 터이나 지금은 생존해 있을 리도 만무하거니와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깃털만큼의 무게감도 없었다. 반백년은 그의 무력화를 증명하기에 충분한 세월이었다.
무저갱을 수직으로 치솟아 오른 진천은 월광이 스며들어 암흑에 난 빛의 생채기 같은 구멍으로 빠져나왔다. 이제 사파 무림의 지존을 잡으러 가야할 시간이었다. 운이 따른다면 마도의 제왕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