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12
제211화
진천이 풀밭의 갈라진 틈에서 빠져나오자 권왕이 그에게서 나는 악취에 코를 잡는 시늉을 하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끝났느냐? 일 각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최소한 반 시진은 걸릴 거라 하지 않았더냐?”
엄밀히 말하자면 반 시진 후에도 나오지 않을 경우 기다리지 말고 장왕에게 돌아가라고 했을 뿐이었으니 권왕의 말은 틀린 것이었다. 하지만 진천은 늙은 의형의 왜곡을 바로잡지 않고 넘어갔다.
“지난번에 큰형님께서 늪과 수로들에 관해 상세하게 알려주신 덕분에 수색이 수월했습니다.”
권왕이 주름투성이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담았다.
“흠, 그럴 줄 알았다. 사실 전날 하도 그놈의 늪을 샅샅이 뒤져서 아직도 눈을 감고도 단박에 그 수로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구나. 오십 년이나 지났는데 말이다.”
권왕의 과장스러운 언사에 진천은 쓰게 웃었다.
“어떻더냐? 쓸 만하더냐?”
애매한 질문이었으나 진천은 뜻을 파악했다.
“그럭저럭 시간을 벌 수 있을 듯싶습니다.”
웬일인지 권왕의 일자 눈이 일그러졌다.
“너무 박하구나, 아우야. 그 정도가 아닐 텐데. 추적자가 누구든 그 비로(秘路)를 모르고 들어가면 한참 헤맬 게 틀림없다. 나와 막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 썩은 물이 새어나가거나 바깥의 물이 흘러들어오는 게 아니니 사방의 벽을 일일이 더듬어보지 않으면 절대로 발견할 수 없지 않겠느냐.”
진천은 권왕의 말에 동의했다. 수로라고 하지만 물길을 연결하는 길은 아니었다. 늪에서 위로 올라갔다가 수평으로 이동한 후 다시 아래쪽으로 비스듬히 떨어지는 구조였기에 시냇물과 늪의 독수는 서로를 침범하지 못했다.
“그러니 나와 막가가 바로 따라 들어갔음에도 그를 놓쳤지. 그는 정말로 이해불가의 능력을 가진 사내였다. 어떻게 저 무저갱 속에 그런 기가 막힌 탈출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진천은 권왕의 말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미리 조사했을 리 만무하니 무황도 권왕과 장왕만큼이나 늪의 내부에 무지했을 터였다. 기적적으로 시내로 통하는 수로를 발견했을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추격해온 두 사람과의 시차를 고려할 때 극히 희박했으리라고 보아야 했다.
진천은 무황이 그가 마왕에게 쫓기며 흑사천에 들어갔을 때 썼던 수법을 택했으리라 보았다. 즉, 그는 늪 바닥이나 벽을 뚫고 들어가 귀식대법을 펼쳤을 것이었다. 위험부담이 상당했겠지만 그로서는 달리 묘책이 없었으리라.
진천은 무황의 생존이 행운의 결과였으리라고 추측했다.
만약 정신없이 늪을 뒤지던 권왕과 장왕이 여섯 개의 수로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거기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무황은 추격자들에게 발각되었을 공산이 컸다.
하다못해 두 무왕이 수로들의 상태를 꼼꼼히 살펴보기만 했더라도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없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면 그들은 늪 자체에 대한 탐색에 집중했을 터이고 그랬다면 무황의 은신처를 찾아내 공포의 원천을 제거할 수 있었을 터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아우야?”
“아닙니다, 큰 형님.”
“아니긴, 이 녀석아. 네 처진 눈이 게슴츠레 해지는 건 네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 나오는 표정이 아니더냐? 어서 이실직고하렷다.”
“실은 무황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권왕은 진천의 말을 오해했다.
“그렇더냐? 그럴 만도 하지. 육백 년 전의 안중(安重) 이후 처음으로 무림의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인물이니. 뭐, 남들이 주었다기보다는 자칭한 구석이 크다만, 어쨌거나 그는 무황이라 불려 손색이 없는 절대무존(絶對武尊)이었다. 지금이야 그를 우리 팔대무왕보다 떨어진다고 평가절하하는 사가들이 대부분이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일대(一代) 무황을 능가하는 족적을 남겼을 게다. 천무대제나 천마에 비견되기는 어려웠을 테지만 무림사의 누구도 그보다 위에 서지 못했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무황 나중강에 대한 권왕의 경외심을 잘 알기에 진천은 잠자코 있었다.
“너는 그를 본 적이 없으니 실감이 안 갈 게다. 마흔둘에야 강호에 나왔고, 첫 번째 비무 상대였던 백야수 장천도 당시 사파칠대고수에 속하긴 했어도 기껏해야 초절정의 초입 언저리로 추정되고 있으니 강자들이 넘쳐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별로 대단할 게 없어 보일 테지. 하지만 세인들이 잘 모르는 게 있다. 그게 뭔지 아느냐?”
평소와 달리 진천에게 질문놀이를 하지 않고 권왕이 자답했다.
“그의 두뇌다. 나는 그의 진정한 능력이 몸뚱이가 아니라 머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우야. 그는 천재였다. 그냥 천재가 아니라 가히 불세출의 천재였지. 너와는 결이 다른데, 문리(文理)가 아니라 무리(武理)의 귀재라고나 할까. 믿기 힘든 일이지만 그는 서른이 넘어서야 무공 수련을 시작했다더구나. 더욱 믿기 어려운 건 그가 익힌 무공들이 무공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잡술이었다는 게다. 그는 흑도의 종자들이나 탐을 낼 그 잡술들을 바탕으로 번듯한 절학을 만들어냈다. 누더기를 기워 비단옷을 만든 셈이지.”
“대단하군요.”
진천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렇고말고. 그야말로 진정한 대종사라고 할 수 있다. 강호초출 이후 삼 년 간 비무행을 하며 그는 나날이 강해졌다. 너도 알겠지만 당시 그의 별호는 십전객(十全客)이었다. 상대방의 특기로 맞불을 놓아 이기면서 얻은 별호였지. 사람들은 모든 방면에 능통한 그를 두고 이미 준비를 마친 무인이라고 여겼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는 비무를 통해서 상대의 장기를 흡수해 간 게다. 그래서 삼십삼 승을 거두는 동안 쉬운 승부는 한 번도 없었다. 마침내 정파제일검이자 난세십군의 좌장이라 할 사평 팽가의 오행검군을 누르고 천하제일인에 등극했을 때도 무황은 아직 미완성의 무인이었다. 그래서 일통무련을 창립한 후 우리 네 사람에게 전권을 위임하고는 폐관수련에 든 게다. 초인시대 이후 아무도 오르지 못했다는 절대지경을 체현하기 위해.”
진천은 무황의 무재에 대한 권왕의 찬사가 조금도 지나치지 않음을 인정했다.
“나를 비롯한 네 사람이 괜히 그의 부활을 두려워 한 게 아니다. 그는 우리와 손을 섞으면서도 끊임없이 우리의 장점을 제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자신의 심득을 아낌없이 나눠주더구나. 그는 소 형처럼 까다로운 이도 기꺼이 그의 품에 들도록 만들만큼 포용력을 가진 대인이었다. 세상을 구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그런 이를 배신했으니 나는 지금까지도 죄책감을 떨칠 수가 없구나.”
회한에 젖은 권왕의 음성에 진천은 위로의 말을 찾았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권왕이 마무리를 지었다.
“이제 그만하자꾸나. 다 지난 일인 것을. 한바탕 꿈이었던 것을.”
협곡으로 신형을 날리는 권왕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진천은 무저갱으로 들어가는 틈을 일별한 후 그를 쫓았다.
진천의 옷에 배인 냄새로 그가 호야곡 아래의 늪에 들어갔다 나왔음을 알아차렸을 터임에도 장왕은 그에 관해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무황을 입에 담는 것 자체를 꺼리는 기색이었다.
장왕의 태도를 보며 진천은 호련사성이 각기 다른 이유로 무황의 휘하에 들었다던 권왕의 말이 떠올랐다. 장왕은 단지 무황의 위명에 이끌려 수하가 되기를 자처한 경우였다. 그는 전형적으로 강자에게 굽실거리고 약자에겐 위세를 부리는 부류였다.
호야곡 인근의 들판에서 한나절을 보낸 진천 일행은 일몰 후 남하를 재개했다.
주안에서 호야곡에 오기까지 끊임없이 언쟁을 벌이던 권왕과 장왕은 벽력도문까지 가는 동안에는 줄곧 침묵했다. 결전을 앞두고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호야곡이 연상시키는 인물에 대한 상념에 빠진 것이었다.
그들을 보며 진천은 문득 자신의 친인들도 먼 훗날까지 자신을 생각할는지 궁금해졌다. 쓰게 웃은 진천은 굳이 답을 찾지 않고 경신의 속도를 올렸다. 감상(感想)은 감상(感傷)이 될 뿐이었다.
멀리 절벽이 보였다.
진천은 지상으로 하강했다. 그러고는 수목이 우거진 숲을 이용해 은밀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십여 장 높이의 절벽 위에는 사파 무림의 최강 방파로 군림하는 벽력도문이 자리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들은 삼면에 철통같은 감시망을 두르고 있을 것이다.
사방이 아니라 삼면이라고 한 까닭은 천지인봉(天地人峰)의 특이한 구조 때문이었다. 거대한 삼각기둥 형태의 천지인봉은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세모꼴의 평원이었다. 벽력도문은 이만 평에 달하는 그 삼각형의 중앙에 위치했다.
절벽에 붙은 진천은 위를 올려다보며 높이를 가늠했다. 그러고는 그의 양쪽에 선 권왕과 장왕에게 신호를 주고서 수직으로 치솟아 올랐다. 단숨에 정상에 오른 진천은 두 무왕이 합세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벽력도문을 향해 질주했다.
반의반 각도 지나지 않아 벽력도문에 이른 진천은 내기를 갈무리하고 안으로 잠입했다. 벽력도문의 내부를 암기하고 있었기에 목적지를 찾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진천은 금와(金瓦)를 얹어 휘황찬란한 주변의 전각들과는 달리 곤옥(崑玉)으로 지어져 칙칙한 묵빛을 뿜어내는 삼층 석조건물에 이르렀다. 문주인 남천도왕의 거처이자 집무실이 있는 현천각이었다.
현천각에서 사오 장 떨어진 커다란 느티나무에 몸을 감춘 진천은 기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사벌의 주인이지만 남천도왕은 대부분의 시간을 벽력도문에 머무는 걸로 유명했다. 삼보장을 떠나기 전 진천은 여러 경로를 통해 남천도왕이 현재도 벽력도문에 거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 정보가 틀릴 수도 있었고 이틀 새 남천도왕이 벽력도문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진천은 그럴 가능성이 낮다고 보았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후속 계획이 마련되어 있었다.
현천각을 향해 기감을 촉수처럼 뻗어가던 진천이 일순 처진 눈을 치떴다.
기감의 방향을 좌측으로 튼 진천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쥐새끼처럼 숨어있지 말고 나오너라.”
쓴웃음을 지은 진천은 거목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현천각 전면의 마당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현천각이 호위병처럼 두른 석탑들 사이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빠져나왔다. 아직 거리가 상당했지만 진천은 바로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뱀눈의 노인은 남천도왕 곽경이었고, 팔순에 이른 나이가 무색하게 치렁치렁한 흑발을 휘날리는 이는 마왕 권상명이었다.
사마 무림의 제왕들은 곧바로 진천을 공격하려 들지 않고 그와 오륙 장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의 합공을 대비하며 진천은 암암리에 공력을 왼손에 주입했다.
남천도왕의 찢어진 눈이 더 가늘어졌다.
“이 야심한 시각에 여긴 어인 일이냐?”
진천은 심한 위화감을 느꼈다. 심야의 불청객에게 응당 던져야 할 질문이었으나, 기실 무의미한 응수타진이었다. 그의 방문 목적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예상대로 마왕까지 불러온 걸 보면 남천도왕은 오늘의 기습에 대비하고 있었음에 분명했다. 그렇다면 권왕과 장왕이 그의 뒤에 도사리고 있을 것임도 알 터였다. 남천도왕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나타나기 전에 마왕과 힘을 합쳐 목전의 먹잇감을 덮치는 게 나았을 텐데 한가롭게 말이나 섞는 건 사뭇 이상했다.
진천이 속셈을 헤아릴 겨를을 주지 않고 남천도왕이 그의 후방을 향해 소리쳤다.
“거기 있는 걸 아오. 나오시지들.”
진천은 조금 안도했다. 여유를 가장했으나 남천도왕의 음성엔 물엿처럼 진득한 긴장감이 서려있었다. 그가 설사 도처에 은신 중인 벽력도문의 도호(刀豪)들을 총동원한다고 해도 오늘의 일전은 승산이 충분했다.
진천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뒤쪽 어둠에서 권왕과 장왕이 차례로 튀어나왔다. 권왕은 진천의 옆으로 왔지만 장왕은 그에게서 칠팔 보 떨어진 곳에 섰다. 장왕의 시선이 맹렬한 적개심을 발하는 마왕의 안광을 피해 허공을 배회했다.
남천도왕과 말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진천은 선공을 가해 급전을 꾀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가 절멸비를 날리려는 순간 예기치 않았던 변수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