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13
제212화
그것은 현천각에서 흘러나온 나른한 목소리였다.
“오랜만이네들.”
꿀처럼 감미로웠고 꽃처럼 화사했으나, 진천은 그 음성의 주인공이 묘령의 여인이 아니라 아흔이 넘은 노파임을 알고 있었다.
진천은 쓰게 웃었다. 독후의 등장은 그가 상정한 최악의 상황들 중 하나였다. 기실 기습을 서둘렀던 까닭도 남천도왕이 독후를 끌어들일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진천은 독후가 개입하기 전에 벽력도문을 치고 싶었다. 남천도왕은 최우선적으로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강력한 무력과 강대한 세력을 지닌 데다 목적달성을 위해서라면 어떤 비열한 술수도 마다하지 않을 위인이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자책했다. 결코 남천도왕을 경시하지 않았지만 그가 독후라는 패를 준비해두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았다. 그는 물론 이른 시일 내의 침입을 예상하긴 했을 터였다.
장왕의 배신을 듣고도, 그리고 정맹 발 급보를 받고도 대책 없이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진천은 그가 벽력도문으로 마왕을 부를 거라 확신했다. 필시 독마와 도마 등도 현천각 주위 어딘가에 대기하고 있을 터였다. 마련의 마두들을 우군으로 삼은들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로서는 다른 대안을 찾기 어려웠을 터였다.
하지만 진천은 남천도왕이 독후를 포섭하기는 어려울 거라 보았다. 포섭은커녕 그가 그녀에게 연락을 취할 수단이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독후는 검왕처럼 은둔형이 아니었기에 그녀의 오랜 잠적은 그녀에게 변고가 발생했거나, 강호를 등져야 할 특별한 사정이 있음을 방증했다.
남천도왕으로서는 독후의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을 터이지만 그녀는 바란다고 딸 수 있는 과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권왕과 장왕에게 보냈음이 확실한 말투는 그녀가 독후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현재 벽력도문에 들어있음을 입증하고 있었다.
어쩌면 독후의 존재는 우연의 소산이었을지도 몰랐다. 진천은 그녀가 남천도왕의 의사와 무관하게 벽력도문을 방문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했다. 만약 그랬다면 남천도왕으로서는 복운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격이었으리라.
진천은 평정심을 잃지 않도록 애썼다. 독후의 출현이 남천도왕이 마련한 판이든 아니면 우연의 결과이든 기정사실이 되었으니 지금의 조건에서 최선의 수를 선택해야 했다.
진천의 결정은 결전이었다. 사천 리가 넘는 먼 길을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오기의 발로가 아니었다. 기실 진천은 이미 이러한 상황이 펼쳐졌을 때의 형세판단을 마친 상태였다.
독후가 적들에게 가담한다는 전제하에 전력은 백중열세였다. 권왕과 장왕은 각각 남천도왕과 마왕을 버거워 할 터이지만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진천은 독후를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물론 진천은 벽력도문의 도호들과 마련의 마두들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접전의 국면에서 초절정의 무위를 지닌 적의 방수들이 상당한 위협이 될 것임은 불문가지였다.
하지만 진천에게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진천은 외조부와 검후에게 거사일과 시각을 알리며 동참을 호소했다. 둘 다 확답을 주지는 않았으나 진천은 그들이 천지인봉 어딘가에 은신하고 있을 거라 추측했다. 둘 다 왔으리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둘 중 한 명은 응했을 터였다. 외면하기에는 이 승부에 걸린 판돈이 너무나 컸다. 오늘의 판돈은 천하 그 자체였다.
외조부든 검후든 나오기만 한다면 대번에 판을 뒤집을 수 있는 패였다. 사벌과 마련의 고수들을 쓸어버리는 수준을 넘어 무왕들 간의 대결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가세한다면 승산은 칠 할에 달했다.
독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결단을 내린 진천은 애초에 작심했던 대로 남천도왕에게 절멸비를 날리려고 했다. 가급적 변수를 없애야 했다. 일단 난전이 벌어지면 누구도 흐름을 되돌리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진천이 개전을 강제하려는 찰나 권왕이 그의 좌수를 잡았다. 진천은 의형의 손이 전하는 확고한 의지에 결행을 보류해야 했다.
진천을 묶은 권왕이 현천각을 향해 걸걸한 음성을 날렸다.
“여기서 뭐하는 건가, 진진?”
진천은 좀 더 두고 보기로 했다. 결정적인 시기도 놓쳤거니와 권왕의 의도를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보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지만 의형을 말릴 수는 없었다.
“진광이야말로 여긴 웬일이야?”
반문과 함께 하얀 그림자가 현천각 삼층 창문에서 나비처럼 날아내렸다. 백영(白影)은 역시 독후 연진진이었다.
전면의 남천도왕과 마왕을 주시하면서도 진천은 독후를 흘깃 쳐다보았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면사 위에 초록색으로 빛나는 동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진천은 하마터면 신음성을 흘릴 뻔했다. 독후가 발하는 염기(艶氣)는 인세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악독한 무리를 처단하러 왔다, 진진.”
권왕의 대답에 독후가 소녀처럼 깔깔거렸다.
“진광답네. 잘 해봐.”
진천의 낯빛이 밝아졌다. 독후의 응답은 권왕의 시도가 성공했다는 징조였다. 그녀는 대전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좋아하기엔 일렀다.
“그런데 넌 뭐야?”
엉거주춤 선 장왕에게 시선을 옮긴 독후가 아미를 찡그렸다. 죄를 추궁당하는 사람처럼 장왕이 비대한 체구를 웅크렸다. 그러더니 몸집과 어울리지 않는 가냘픈 음성을 토해냈다.
“나, 나는 태 형을 따라왔소, 진진.”
독후의 봉목이 가늘어졌다.
“어휴, 듣기 싫어, 그 목소리. 그런데 너는 마련에 붙어있지 않았나? 진광이야 원래 그런 사람이니 그렇다고 쳐도 넌 왜 같잖은 협객 놀이를 하려는 건데? 아니, 졸개 노릇인가?”
독후의 빈정거림에 살로 터질 듯한 장왕의 면상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적 없소.”
독후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자 장왕이 부르짖었다.
“나는 저들의 편이 아니오. 증명해 보이겠소.”
상황은 급전직하했다.
불길한 예감에 진천이 독후와 장왕의 대화에 개입하기도 전에 장왕의 장공이 그와 권왕을 덮쳤다.
진천은 장왕에게 반격할 겨를이 없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남천도왕과 마왕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장내는 다섯 초인이 뒤얽혀 살수를 주고받는 난장판이 되었다.
사달의 단초를 제공한 독후는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멀찌감치 떨어져 관전자의 자세를 취했다. 그녀의 눈길은 주로 진천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했다.
장왕의 돌변을 대비했던 진천과는 달리 넋 놓고 있던 권왕은 그의 암습에 속절없이 당할 뻔했다. 진천이 그를 안고 비환을 발하지 않았더라면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터였다. 진천의 품에서 놓여난 권왕은 장왕과 격돌했다. 장왕은 분기탱천한 권왕의 공세에 위축되었다.
하지만 권왕은 장왕을 밀어붙이지 못했다.
독후가 지켜보고 있음을 의식한 장왕이 힘을 낸 탓이었다. 이틀 전의 비무를 통해 자신의 무력이 권왕보다 우위에 있음을 확인했던 장왕은 거듭 그의 양보를 받아냄으로써 실전에서도 권왕을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나 자신감의 절반은 그의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권왕의 수세는 무력의 열세로 인한 것이 아니라 홀로 두 명의 무왕을 감당하느라 위급지경에 처한 진천을 돕는데 힘과 신경을 할애해야 했던 탓이었다. 장왕에게 몰리면서도 권왕은 수시로 권강을 진천의 전권에 돌려 마왕과 남천도왕을 견제했다. 그 덕분에 진천은 수차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확연한 열세에 처했지만 진천과 권왕은 의외로 잘 버텨냈다. 몇 가지 요인이 이를 가능케 했다.
무엇보다 두 의형제의 연수는 단순히 두 사람의 무력을 합친 것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 진천과 권왕은 서로의 수단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뿐더러 절대적으로 서로를 신뢰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의형과 의제를 위해 몸을 날렸기에 각자의 보신을 우선시하는 삼왕(三王)은 그들을 어쩌지 못했다.
특히 진천에게 공포심을 갖고 있는 장왕은 절멸비가 날아올 때마다 심하게 움츠러들며 다 잡은 권왕을 놓아주곤 했다. 남천도왕과 마왕 또한 결정타를 상대에게 미루었다. 진천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그들도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터인데, 그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적의 적은 동지이기에 손을 잡았지만 적이 사라진 후에는 하시라도 서로의 뒤통수를 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암담했다.
기적적으로 큰 부상 없이 버티곤 있지만 시간은 그와 권왕의 편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간 이십 초 이내에 운신불능의 치명상을 입을 터였다. 집요하게 그를 노리던 남천도왕과 마왕이 권왕에게 눈독을 들이는 순간 진천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사자후를 터뜨렸다.
“나오십시오!”
유감스럽게도 그의 요청에 대한 반응은 없었다. 그의 말에 담긴 함의를 파악하고는 일순 긴장했던 남천도왕과 마왕이 공세를 재개했다.
진천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 남은 패는 하나밖에 없었다. 도주였다. 진천은 권왕에게 사전에 약속한 신호를 보냈다. 그의 손짓을 본 권왕은 진천이 절멸삭을 휘둘러 벌어준 공간으로 몸을 옮겼다. 의형제의 의도를 파악한 남천도왕이 소리쳤다.
“권왕을 쳐라!”
명령조에 불쾌한 기색이었지만 마왕과 장왕은 남천도왕을 따라 지체 없이 권왕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진천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법이 약한 권왕은 대번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일시적으로 삼왕의 공세가 권왕에게 집중된 탓에 빠져나갈 기회가 생겼으나, 진천은 차마 의형을 두고 갈 수 없었다. 남천도왕이 계산했던 대로였다.
약한 고리인 장왕을 공략한 진천은 권왕에게 숨통을 터주었다. 하지만 마왕의 팔선조강(八線爪剛)과 남천도왕의 십전섬뢰의 일부에 적중 당한 권왕은 호신강기가 깨지고 복부와 허벅지, 그리고 종아리가 찢어지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진천은 현저하게 무력이 떨어져 삼왕의 후속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된 의형을 간발의 차이로 구해냈다.
“가라, 아우야!”
피를 토하며 권왕이 외쳤다. 그러고는 진천의 등에 쏟아지는 남천도왕의 강기를 혼신의 힘을 다한 권강으로 막아냈다. 남천도왕은 격퇴했으나 마왕이 남아있었다. 권왕은 장왕을 쫓아내느라 일순지간 공백이 생긴 진천을 보호하기 위해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원천지기까지 쥐어짠 권왕은 마왕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으나, 남천도왕이 원거리에서 날린 도강에 가슴을 격타 당했다.
입에서 선혈을 뿜으며 날아가는 권왕의 동체를 장왕의 적운신장(赤雲神掌)이 휘감았다. 숨 돌릴 틈 없이 몰아쳐오는 마왕과 남천도왕의 합공을 무영으로 견뎌낸 진천은 의형이 붉은 구름에 한 줌의 혈수가 되기 전에 간신히 구출했다.
기식이 엄엄한 권왕의 허리를 오른팔로 안아든 진천은 장왕에게 짓쳐들었다. 퇴로는 그곳뿐이었다.
반의반 각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의 격전이었지만 워낙 막강한 적들인지라 네 군데의 외상과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진천은 반격을 자제하고 도주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장왕은 기껏해야 두어 자루의 절멸비만 쏘아낼 수 있는 그의 허장성세에 넘어갈 것이었다.
진천의 기대와 예상대로 장왕은 절멸비를 날리며 달려드는 그를 가로막지 못하고, 허둥지둥 길을 터주었다. 진천의 등 뒤로 남천도왕과 마왕이 따라붙었다. 그들이 쏟아 붓는 강기의 폭풍을 온전히 뿌리칠 수 없었던 진천은 몸을 돌려야 했다. 무작정 달아나다간 그대로 묵사발이 될 판이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도주를 위해서는 적어도 칠팔 장의 거리가 필요했다.
궁지에 몰린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세상과 친인들을 위해 남천도왕만큼은 저승길의 동반자로 만들 참이었다. 옥쇄를 각오한 진천이 방어를 도외시하고 남천도왕을 겨냥해 최후의 필살기를 발하려는 찰나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