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14
제213화
엄밀히 말하자면 빛은 한 줄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강기의 소낙비였다.
진천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드디어 원군이 당도한 것이었다. 예기치 않았던 기습에 대경실색한 두 무왕은 그물에 들어온 진천을 놓아주고 피신해야 했다.
성명절기 중 하나인 만검폭우로 진천의 활로를 터 준 검후가 그의 지척에 떨어져 내렸다. 진천은 그녀에게 후방을 맡기고 그의 좌우에서 달려드는 장왕과 마왕을 상대했다. 고작 한 자루의 절멸비에 지레 겁을 먹고 후퇴한 장왕을 내버려두고, 절멸참을 뽑아 마왕의 조강(爪剛)에 맞서려던 진천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섬뜩한 느낌에 전율했다.
이지가 이상 기감의 원인을 분석하기도 전에 본능이 그의 몸을 움직였다. 무영(無影)을 발한 진천의 동체가 공간에서 사라졌다. 그가 있던 자리에 벽력이 작열했다. 진천은 그것이 남천도왕이 날린 격격쇄가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필시 검후의 필살기인 풍함뢰(風含雷)일 터였다.
전날 지하연무장에서 그를 쓰러뜨렸던 음험하면서도 무지막지한 검기를 육신이 기억한 덕분에 기적적으로 검후의 암습을 피해냈지만, 진천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풍함뢰의 여파에 휩쓸린 데다 권왕을 안고 있었던 탓에 제대로 무영을 펼치지 못한 그의 신형은 금방 적들의 시야에 노출되었다.
좌견이 으스러지는 부상을 입은 진천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일순지간 사라졌던 그의 신형이 불과 오륙 보 떨어진 곳에 나타나자 가일수를 하려던 검후는 우측에서 날아오는 가공스러운 경기에 검을 돌려야 했다. 그녀를 공격한 이는 독후였다. 강 건너의 불인 양 느긋하게 관망하던 독후가 전격적으로 전장에 뛰어들자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두 면사여인이 격돌하자 눈치를 보던 장왕이 독후를 거들기 시작했다. 검후는 대번에 비세에 몰렸다.
마왕과 남천도왕은 느닷없이 벌어진 별개의 싸움판을 무시했다. 그들의 관심사는 검후와 독후가 드러낸 이해불가의 행태가 아니라 진천과 권왕의 생사였다.
특히 진천의 죽음이 중요했다. 두 무왕 모두 오늘 어린 천룡을 끝장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발을 뻗고 잠을 잘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궤를 거스르는 그의 발전 속도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진천에게 보다 가까운 이는 마왕이었다. 추풍에 휩쓸린 낙엽처럼 돌바닥을 굴러가는 진천에게 여덟 줄기의 강선을 쏘아내려던 마왕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쐐에엑.
공기를 찢어발기는 기음과 함께 수백 개의 도편(刀片)이 그의 등짝에 쏟아지자 마왕은 분기를 터뜨렸다. 그를 덮친 것은 벽력도문의 삼대절기 중 하나인 파도천망이었다.
남천도왕이 뒤통수를 쳤다고 여긴 마왕은 다음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엉뚱한 방향에서 진천에게 쇄도하고 있는 남천도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남천도왕의 우수에 들린 대도는 조금도 깨어지지 않고 멀쩡했다.
마왕은 그를 방해한 자가 남천도왕이 아니라 석탑에서 굴러떨어진 해골 청년임을 알아차렸다. 당장 조강을 쏘아 그의 머리통을 박살내려던 마왕은 살의를 억제하고 진천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혼절한 해골에게 손찌검을 하는 것보다는 달아나는 천룡을 잡는 게 훨씬 중차대한 사안이었다.
진천은 가슴이 뭉클했다.
또 한 번 대웅에게 구명지은을 입은 것이었다. 대웅은 올해 들어서 네 번이나 파도천망을 구사했다. 그 가운데 조금 전에 펼친 파도천망이 단연 으뜸이었다. 공력이 뒷받침되었더라면 마왕의 발을 묶는 정도를 넘어 그에게 피해를 입혔을 만큼 완벽한 솜씨였다.
자신이 풍전등화의 처지에 있으면서도 진천은 친우의 상세가 심히 염려스러웠다. 내상이 완전히 아물지 않은 대웅이 파도천망을 감행했다는 것은 목숨을 걸었다는 뜻이었다. 설사 명줄을 보전하더라도 내공을 상실할 우려가 컸다.
진천은 턱이 부서져라 이를 악물었다. 친우의 희생을 헛되이 만들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그런 연후 사마(邪魔)의 수괴(首魁)들을 지상에서 지워 그와 자신이 꿈꾸던 세상의 주춧돌을 놓아야 했다.
대웅이 벌어준 찰나지간의 공백을 틈타 진천은 장내를 빠져나갔다.
남천도왕과는 오륙 장의 거리였고, 곧바로 추격에 가세한 마왕은 칠팔 장 떨어 져있었다. 사마를 대표하는 두 무왕은 필사적으로 도주하는 진천만큼이나 악착같이 그를 뒤쫓았다.
진천의 등을 향해 십전섬뢰를 쏘아내던 남천도왕은 진천이 현묘한 신법을 발하며 도강을 흘려내자 공격을 멈추고 거리를 좁히는 데 주력했다. 삼사 장 이내에 들기만 하면 결정타를 날릴 수 있을 것이었다.
삼각형을 이룬 세 개의 그림자가 천지인봉의 삼각고원을 질주했다. 뾰족한 꼭짓점에서 달리던 진천은 낭패감에 젖었다. 하나도 버거운데 둘을 떨쳐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모든 조건이 그에게 불리했다. 사마의 제왕들은 그에 비해 속도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일 푼이라도 우위에 있다고 보아야 했다. 더욱이 진천은 오른손에 안고 있는 권왕으로 인해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였다.
삼 척에도 미치지 못하는 단구였으나 권왕의 몸무게는 명의 두 배에 달했다. 평소 같으면 깃털에 불과한 짐이었을 테지만, 먼지 한 톨의 차이가 생사를 가를 현재의 국면에서는 사뭇 부담스러운 무게였다.
그나마 팔영보 상의 환위(換位)를 이용해 펼치는 경신에 내공이 거의 소모되지 않는다는 점이 위안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절벽을 뛰어내리기도 전에 따라잡힐 게 불 보듯 뻔했다.
진천은 남천도왕과 마왕이 번갈아가며 날리는 강선들에 어쩔 수 없이 갈지자 행보를 해야 했다. 그 결과 갈수록 추적자들과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진천의 본능이 경보를 울렸다. 적들이 그를 중심으로 삼사 장의 범위 안에 들어오면 위험했다. 매우 위험했다. 그러나 검후의 검공에 왼 어깨가 깨지는 바람에 절멸비를 날려 무왕들의 접근을 견제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설사 좌견이 온전하다고 해도 공력이 바닥난 데다 내상으로 인해 기껏해야 두어 개의 절멸비만 쏘아낼 수 있었기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무왕들의 파상공세를 빗겨내는 와중에도 기사회생의 묘수를 고심하던 진천의 귀에 권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놓아라.”
진천은 못 들은 척했다.
권왕이 절박한 음성을 토해내었다.
“놓으라니까.”
진천은 의형을 안은 팔을 더욱 단단히 조임으로써 그의 청에 응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권왕이 몸부림쳤다. 그 탓에 진천은 하마터면 마왕의 조강에 목을 찢길 뻔했다. 머리카락 한 올의 차이로 목덜미에 닿은 강기를 흘려낸 진천은 집중했다. 추격자들에게 반격을 가할 수 없는 상태라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무영의 상승! 혹은 무영 너머의 비술의 창안!
둘 모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과제임을 알고 있었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진천은 머릿속을 비웠다. 전날 오양만답에서 마왕의 살수를 벗어나게 해 준 무영의 기억을 되살리며 무아지경에 빠진 진천의 심상에 실타래를 흩뜨려놓은 것 같은 복잡한 선이 떠올랐다. 그 순간 삼 장 뒤까지 따라붙은 남천도왕의 격격쇄가 그의 등판에 꽂혔다.
진천은 척추가 으깨지는 격통에 신음성을 흘렸다.
정신이 혼미해진 진천은 혀를 깨물었다. 입 속을 채운 피를 삼킨 진천은 비환을 펼쳤다. 마왕의 팔선조강 중 두 개가 그의 귓불과 턱을 스치고 지나갔다. 두개골이 울렸지만 진천은 다시 화연을 구사했다. 마왕이 날린 강선들은 그의 심장을 뚫는 대신 왼쪽 옆구리의 살을 한 움큼 뜯고 지나갔다.
진천을 거의 죽일 뻔했던 남천도왕은 후속 공격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왕에게 마무리를 맡기려는 심산이 아니었다. 진천의 숨통을 끊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남천도왕은 욕구를 실행할 겨를이 없었다. 절벽에서 솟구친 그림자와 맞서야했기 때문이었다.
남천도왕을 가로막은 이는 북천도왕 강운이었다. 대륙의 남북을 호령하는 두 도왕은 한 덩어리로 얽혀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로서는 세 번째 대결이었다. 앞선 두 번의 승부는 승자와 패자를 가리지 못하고 끝났었다.
오십 년 전 정사 무림 최고의 초신성으로 만나 자웅을 겨루었던 양인은 칼을 섞자마자 상대방이 필생의 호적수임을 알아차렸다. 삼백여 초의 접전은 양패구상을 우려한 원주 강가와 벽력도문 중진들의 암묵적인 합의에 따라 강제로 종결되었다.
강운과 곽경의 이차전은 그들이 각각 정맹과 사벌의 수장이 되기 직전에 벌어졌다.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었던 보원에서의 일대격전은 다시 한번 무승부로 종료되었다. 가문과 문파의 원로들이 떼어놓았던 일차전과 달리 남북도왕들이 자발적으로 한 발씩 양보한 결과였다.
사십 년 만에 재회한 칼의 제왕들이 격돌하는 동안 진천은 낭떠러지를 뛰어내렸다. 마왕이 남천도왕과 연수하면 외조부가 곤경에 처할 터이지만 그가 고원에 머무른다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로서는 불가피한 행동이었다.
기실 진천은 확신했다. 마왕이 외조부를 내버려두고 그를 쫓을 것임을.
진천의 짐작이 옳았다. 그가 절벽 끝에서 모습을 감추자 마왕은 정사 무림의 도왕들이 펼치는 혈전에는 일별도 주지 않고 곧장 추격을 개시했다.
이십여 장 아래의 땅바닥에 착지한 진천은 비틀거렸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강기의 빛줄기에 걸릴 뻔했다. 반사적으로 무영을 발해 마왕의 난섬팔기공(亂閃八氣功)을 벗어난 진천은 일백 장 전면의 삼나무 숲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았다.
손 안의 모래처럼 매번 잡힐 듯 말 듯 빠져나가는 진천에게 바짝 약이 오른 마왕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의 공력이 담긴 괴성이 심야의 천공을 뒤흔들었다. 구름이 깔린 어두운 하늘을 떼 지어 날던 야조들이 지상에서 올라온 천둥소리에 놀라 뿔뿔이 흩어졌다.
숲에 들기 전 진천은 세 번의 공격을 견뎌냈다. 전신에 크고 작은 외상을 입었지만 다리 쪽의 부상이 심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집요하게 진천의 하반신을 노리던 마왕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또 한 번 노성을 내질렀다. 인간이 발한 난데없는 굉음에 거목들이 몸살을 앓았다.
진천을 따라 숲에 들어온 마왕은 얼마간 나아가고는 위로 비상했다. 삼나무가 우거진 삼림 안에서 사냥감을 쫓는 것은 하책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마왕은 빽빽이 선 나무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지나가는 진천과 같은 재주를 부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장애물들을 일일이 쳐내가며 쫓자니 속도만 느려질 뿐이었다. 그로서는 수림 위에서 진천을 따라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잡아채는 게 최선이었다. 쥐새끼를 낚는 매처럼!
진천은 벽력도문 현천각 경내에서의 개전 이후 처음으로 숨을 골랐다.
위에서 쫓아오는 마왕이 공터만 나오면 눈앞에 떨어질 터이기에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지만 내상이 악화되기 전에 응급처치를 해두어야 했다. 그러나 마왕은 진천이 내기를 다스릴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가 공중에서 맹공을 퍼붓는 바람에 진천은 어쩔 수 없이 계속 움직여야 했다.
진천은 마왕이 그를 특정한 방향으로 몰고 있음을 간파했다. 삼나무 숲의 서쪽에 있는 평야로 끌고 가려는 속셈임에 분명했다. 진천은 적의 의도를 역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마왕의 눈에는 숲에 면한 땅이 허허벌판으로 보이겠지만 그곳엔 역사와 지리에 밝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기실 백전평(柏田平)은 호야곡, 구천칠협(九川七峽) 등과 더불어 진천이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도피처로 삼으려 했던 절지들 중 하나였다. 마왕은 만상석굴에 이어 또 한 번 미로를 경험하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