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16
제215화
마왕은 기시감이 들었다.
쥐새끼를 절명시킬 거라 확신했을 때마다 그 확신은 그를 배반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쥐새끼의 머리통을 산산조각 냈어야 할 그의 천관지는 애꿎은 바위만 꿰뚫고 말았다. 목표물이었던 쥐새끼는 밑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마왕은 넌덜머리가 났다. 이런 지독한 종자와는 다시는 조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손을 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쥐새끼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도주를 하는 건지 추락하고 있는 건지 불분명한 사냥감을 향해 마왕은 초승달처럼 휜 조강(爪剛)을 발출했다. 전자였다. 어둠에 빨려 들어가는 까만 점이 그의 팔선조강을 이리저리 피해내는 것을 본 마왕은 예상을 했으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대체 네놈은 무엇이더냐. 필경 상당한 내외상을 입었을 터인데 어찌 이리도 끈질기게 버틴단 말이냐.
마왕의 심중에 돋아나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진천은 기괴한 나선형의 궤도를 그리며 수백 장 아래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마터면 권왕을 놓칠 뻔한 진천은 그를 단단히 붙들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욱신거렸으나 전신엔 활력이 넘쳤다. 문제는 체내에 휘도는 힘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서두른 탓에 진천은 환생결을 정상적으로 운용할 수 없었고 그나마도 마왕이 나타나는 바람에 마무리 직전에 중단해야만 했다.
제멋대로 날뛰는 혈류를 다스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와중에도 진천은 위에서 쏟아지는 마왕의 공격에 대처해야 했다. 다행히도 팔영보를 부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진천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대로 지상에 닿으면 마왕의 결정타에 고스란히 노출될 터였다. 어떻게든 그 전에 반전의 계기를 마련해야 했다.
진천의 뇌리에 일곱 달 전 원주 강가를 처음 찾았을 때의 상황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날 강가의 도객들을 따돌리고 외숙과 단애에서 함께 떨어지면서 진천은 절멸삭을 이용해 선후를 바꾸는 수법으로 득을 보았었다. 그가 부운공(浮雲功)을 시전했던 외숙의 몸을 안전판으로 삼아 기사회생한 반면 외숙은 충격을 감당치 못하고 영구적인 불구가 되어버렸다.
전날의 승전보를 떠올린 진천은 빠르게 머리에서 그 수법을 지워버렸다. 마왕은 외숙이 아니었다. 절벽에 절멸삭을 꽂느라 지체한 촌각의 시간을 그가 놓칠 리가 없었다.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공중에서 승부를 보아야 했다. 절멸도법을 원활히 구사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었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마음을 굳힌 진천은 좌수를 위로 뻗었다. 그 간단한 동작에도 그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으깨졌던 어깨가 덜 아문 데다 격통이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극통을 참으며 진천은 정수리를 아래로 향한 채 무서운 속도로 하강하는 마왕에게 절멸비를 쏘았다. 여섯 자루를 날릴 생각이었으나 그의 좌수에서 빠져나온 건 세 가닥의 빛살뿐이었다. 그나마도 제대로 조종하지 못하는 바람에 하나만 마왕에게 이르렀다. 나머지 두 개의 절멸비는 속절없이 월광 속으로 사라졌다.
마왕은 몸을 비틀어 피해내지 않고 강조로 비수들을 쳐내었다. 캉! 기음과 함께 번갯불이 번쩍였다. 진천의 기습을 막아낸 마왕이 반격을 가했다. 그의 인조손톱에서 흘러나온 여덟 줄기의 강선이 진천을 옭아맸다. 진천은 아슬아슬하게 강기의 그물을 빠져나갔다.
짧은 공방전으로 이득을 본 이는 마왕이었다. 이번에도 그의 공격을 빗겨내긴 했으나 진천의 움직임이 뭔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간파한 마왕은 십이 성의 내공을 끌어올려 맹공을 퍼부었다.
마왕의 강조에서 뿜어져 나온 강기의 태풍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뱅글뱅글 떨어지고 있던 진천을 휩쌌다. 마왕은 쾌재를 불렀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은 애를 먹이던 월척을 낚았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내지르려던 마왕은 다음 순간 경악성으로 대체했다.
“헉!”
진천은 무리수가 통했음을 알았다.
지상까지는 이제 십여 장밖에 남지 않았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절멸비를 뜻대로 부리진 못했지만 위력만은 이전보다 일 푼이나마 증가했음을 깨달은 진천은 정면충돌을 결심했다.
짐짓 허점을 노출하자 마왕은 예상대로 맹폭을 가해왔다. 진천은 맞불을 놓았다. 그의 좌수에서 흘러나온 강기의 밧줄이 마왕을 휘감았다. 시퍼런 강기를 머금은 강조로 절멸삭을 잘라버리려던 마왕은 역으로 그의 조강(爪剛)이 뜯겨나가자 대경실색했다.
진천의 노림수에 걸려들었다고 여긴 마왕은 황급히 후퇴했다. 그와의 거리가 멀어지자 진천은 주의를 아래로 돌려 안전하게 땅에 내려앉는 데 성공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충격으로 인해 발목이나 무릎이 부러졌을 것이었다.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진천에게서 오륙 장 떨어진 곳에 떨어져 내린 마왕은 진퇴를 결정하지 못하고 일순 갈팡질팡했다. 마왕에게 면밀한 판단을 내릴 여유를 주지 않으려고 진천은 그에게 쇄도했다.
진천이 휘두르는 절멸삭과 강조를 섞어본 마왕은 간담이 오그라들었다. 착지 직전 주고받은 공방에서 지각했던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쥐새끼는 여전히 신출귀몰한 신법을 구사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전보다 세진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엿가락처럼 늘어나고 휘어지는 괴상한 강기는 벽력도문에서만 해도 그의 조강에 약세를 면치 못했지만 지금은 정반대였다. 진천의 ‘엿가락’에 자신의 강조가 두른 강기가 맥을 추지 못하고 끊어지자 마왕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삼사 장의 거리는 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전권이었으나 처지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렇다고 근접전을 시도할 수도 없었다. 쥐새끼에겐 엿가락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날카롭고 강력한 칼이 있기 때문이었다.
진천과 삼합을 교환한 마왕은 방향을 정했다.
목전의 쥐새끼, 아니 어린 괴물과의 격돌은 자살행위였다. 무슨 사술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중상을 입은 채 도망치는 데 급급했던 저 괴물은 절벽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동안 그보다 윗길의 강자로 거듭나있었다.
마왕은 모골이 송연했다. 불과 보름 전만 해도 십초지적에 지나지 않았던 애송이는 오늘 벽력도문에서 그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 무력을 과시하더니 지금은 그의 상수가 되어있었다.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궤를 거스르는 괴물을 막으려면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다. 남천도왕과 연수하는 것 외엔 방도가 없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이제 이쪽이 무왕들의 수에서 월등하다는 것이었다. 독후가 왔고 장왕이 돌아선 데다 검후도 어린 괴물에게 검을 겨누었으니 전력에서 밀릴 게 없었다. 밀리기는커녕 압도적이었다. 괴물이 속한 세평회와 북천도왕의 정맹은 결코 삼패(三覇) 연합군을 감당하지 못할 터였다.
한가롭게 형세판단이나 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기에 마왕은 작심한 바를 결행했다. 그냥 도주하는 것은 하책이었다. 어린 괴물로 하여금 쫓을 엄두가 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한 후 달아나야 했다.
마왕의 복안은 권왕의 공략이었다. 권왕은 어린 괴물의 조문이었다. 빨랫줄에 널린 넝마처럼 괴물의 어깨에 걸려있는 권왕을 집요하게 노린 마왕은 그의 판단을 옳았음을 확인했다. 권왕의 안위를 염려한 애송이는 전력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허겁지겁 물러났다.
마왕은 그대로 밀어붙이고 싶은 욕구를 억제했다. 그러다가 진짜로 권왕이 비명횡사하기라도 하면 뒷감당을 어려울 게 뻔해서였다.
어린 괴물의 양보를 받아낸 마왕은 신형을 그와 반대쪽으로 날렸다. 괴물이 곧바로 뒤쫓아 오자 심장이 떨렸지만 마왕은 침착하게 대처했다. 권왕에게 쏟아지는 강선들을 모조리 쳐내는 건 불가능했기에 어린 괴물은 그의 기대대로 퇴보를 밟았다. 동일한 공방이 네 차례 반복되자 어린 괴물은 추격을 포기했다.
마왕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린 괴물이 권왕을 ‘애지중지’한 덕분에 용궁을 벗어날 수 있었다. 순식간에 수십 장이나 멀어졌지만 마왕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경신의 최고 속도를 유지했다. 행여나 기식이 엄엄한 권왕이 급작스럽게 숨이 끊어진다면 어린 괴물은 즉각 분노의 추격전을 펼칠 터였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기회가 왔을 때 조금이라도 멀리 가 두어야 했다.
흑점으로 화했던 마왕의 신형이 이내 완전히 사라지자 진천은 권왕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그도 그 옆에 드러누웠다. 달빛이 공히 혈인이 된 의형제의 몸에 골고루 쏟아졌다.
권왕은 시체처럼 미동도 없었으나 진천은 끊임없이 팔다리를 움직였다. 마치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듯한 몸짓이었다. 기혈이 격탕되고 혈맥이 비틀리며 일어난 발작이었다.
진천은 폭주하는 혈류를 조절하려 들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소용이 없을 터이거니와 그럴 여력도 없었다.
수족을 흔들어가며 경련을 일으키던 진천의 동체는 한참 후에야 진정되었다. 고비를 넘겼음을 인지한 진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발작이 가라앉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심장에 남은 마지막 독정을 써야했을 터였다. 콩 알에서 좁쌀 크기로 줄어든 독정은 그가 생각하기에 최후의 보루였다. 진천은 그것마저 녹인다면 생명도 소멸될 것임을 예감했다.
손가락을 까딱거릴 기력도 없었으나 진천은 억지로 상체를 일으켰다.
피 냄새를 맡은 들짐승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리 떼였다. 어중간한 맹수 특유의 경계심으로 그와 권왕에게 바로 달려들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던 이리들은 그가 움직이자 일제히 으르렁거렸다. 진천은 땅바닥에서 돌조각 몇 개를 집었다. 그러고는 앞장서서 접근하는 이리에게 엄지와 중지를 이용해 튕겨냈다.
캥.
이마에 돌조각을 맞은 이리가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어올랐다. 우두머리에게 일어난 기변에 놀란 이리 떼가 자세를 바짝 낮췄다. 진천은 그들이 한꺼번에 달려들기 전에 남은 돌조각들을 날렸다.
캐앵.
다시 두 개의 돌조각에 적중당한 우두머리 이리가 쏜살같이 달아났다. 열대여섯 마리의 이리들이 부리나케 우두머리를 쫓았다.
이리 떼를 격퇴한 진천은 다시 누우려다 생각을 바꿔 일어섰다. 힘들더라도 움직이는 게 회복에 도움이 될 터이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몸이 제멋대로 떨렸지만 진천은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그러면서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처럼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일 각쯤 지나자 어느 정도 정상적인 보행이 가능해진 진천은 권왕을 안아들었다.
운공에 들 장소를 찾아 걸음을 옮기던 진천은 절벽의 이삼 장 높이에 난 동굴을 발견했다.
권왕을 어깨에 들춰 멘 진천은 수직으로 선 미끄러운 바위를 올라갔다. 마왕이 마음을 바꿔 되돌아올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으나 당장은 이리 같은 짐승들을 대비하는 게 우선이었다.
진천은 고소를 지었다. 추격자가 남천도왕이 아니라 마왕이라서 다행이었다. 남천도왕이었다면 일단 거리를 벌린 후 추이를 살폈을 공산이 컸다. 그랬다면 일시에 원천지기까지 쏟아내고 탈진한 그에게로 돌아와 이삭 줍듯 손쉽게 그의 목숨을 취했을 터였다.
물론 상대가 남천도왕이었다면 진천도 방식을 달리 했을 것이었다. 동사(同死)를 감수하고서라도 남천도왕과 사생결단을 내려 들었을 거다.
동굴에 들어서기 전 진천은 고개를 돌려 마왕과 짧은 격전을 치렀던 곳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그를 엄포로 쫓아냈지만 다음엔 당당한 무력으로 꺾을 것이었다. 새로운 몸에 완벽히 적응하면 그의 무위는 한 뼘쯤 상승해 있을 것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진천은 머릿속으로 향후에 전개될 전쟁의 수순을 그려보았다. 너무 거대하고 복잡한 형태였기에 수상전의 결과를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진천은 그 끝이 그와 친인들의 승리로 판명되리라 믿었다. 근거가 부족한 낙관일지라도 비관이 초래할 좌절감보다는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