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17
제216화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날이 밝았다.
길이가 채 일 장도 되지 않았기에 동굴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공간 안으로 늦가을의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진천은 눈을 떴다. 황금빛 무대에서 먼지 알갱이들이 새로이 시작된 하루를 알리며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일어서면 천장에 머리를 부딪칠 터이기에 진천은 좌정한 상태로 엎드리듯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권왕은 여전히 혼수상태였다. 맥을 짚어본 진천의 이마에 그늘이 졌다. 양 다리의 외상도 중했지만 내상은 더 심각했다. 단전도 상했음에 틀림없었다. 심후한 내력 덕분에 목숨은 건지겠지만, 회복되더라도 원래의 무력을 되찾기는 어려울 터였다.
진천은 의식이 돌아온 권왕이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받아들일는지 걱정스러웠다. 무공은 그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천의 뇌리에 쓰린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창인의 주도권 쟁탈전이 종료된 후 목숨을 부지한 반대파들은 뇌옥에 갇혔다. 뇌옥에 집어넣기 전 단전을 폐했을 때 그들은 절망하고 발광하고 승자들을 저주했다. 그들의 팔 할은 반 년을 넘기지 못하고 뇌옥에서 사망했다. 그 중 절반은 자진으로 인한 죽음이었다.
진천은 전날 삼보장을 찾은 장초에게서 정월 초 창인에 쳐들어왔다가 잡혔던 염방의 무리 전원이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자결을 택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진천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행위였으나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진천은 권왕이 운명을 받아들이고 천수를 누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는 무력과 무관하게 더 없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였다.
진천은 바로 삼보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운공에 들었다.
절벽 위로 되돌아온 마왕의 공격에 대처하느라 그렇지 않아도 급성으로 운용하던 환생결을 급작스럽게 끝내야 했기에 후유증이 상당했다. 중요한 혈맥 몇 군데가 파열되는 바람에 진기의 수납이 불안정했다. 특히 절멸참을 꺼낼 때 통증이 극심했다. 좌견과 옆구리의 부상도 완전히 아물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마왕의 급습은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만약 환생결을 계속 운용했다면, 그래서 독정을 남김없이 용해했다면, 진천은 자신이 사신의 손아귀를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라 추측했다.
이승에서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았기에 생존은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마왕에게 감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진천은 그와의 악연을 천운으로 받아들였다.
해가 졌다.
진천은 어둠이 내려앉은 공지에서 몸을 풀어보았다. 짐작대로 절멸도법을 원활히 구사하기는 어려웠다. 위력은 확실히 증가했으나 이따금 통제를 벗어난 내공이 절멸도에 실리는 바람에 정확도가 떨어졌다. 강적과의 대전 시 생사를 가를 수도 있는 약점이었기에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몸 상태를 점검한 진천은 권왕을 안고 북으로 신형을 날렸다. 우선은 삼보장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그러고는 지하연무장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 적응 수련을 한 후 심중에 세운 작전들을 차례로 결행할 작정이었다.
진천은 허공을 날아가며 질문을 던졌다.
벽력도문에서 벌어진 난장(亂場)은 어떻게 결말이 났을까. 독후와 장왕의 합공을 받은 검후는 달아났을까. 남천도왕을 막아선 외조부는 그를 물리쳤을까. 또 한 번 목숨을 걸고 파도천망을 펼쳤던 대웅은 무사할까.
진천은 난마처럼 얽혀드는 생각들을 정리했다.
무려 일곱 명의 무왕이 등장한 대사건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독후였다. 진천은 그녀가 벽력도문에 있었던 게 단순한 불운이 아니라 재앙으로 여겨졌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장왕은 배신하지 않았을 터이고, 그랬다면 검후의 변심도 없었을 터였다. 반각을 늦은 외조부까지 가세했다면 어젯밤 진천은 원래의 구상대로 일거에 사마 무림의 수장들을 잡고 판세를 결정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허망한 가정이었다. 실제로는 독후가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래서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지 않았던가.
진천은 지나치게 성급했음을 반성했다. 그러나 그로서는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더욱이 독후라는 변수가 발생하기 전에 적들에게 결정타를 가하려던 것은 그 시점에서는 올바른 판단이었다.
진천은 독후의 출현이 남천도왕의 안배이기보다는 우연의 산물이 아닐까 의심했다. 만약 남천도왕이 그녀와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아였다면 진즉 그녀를 끌어들였을 터였다. 그녀는 그 자체로 엄청난 전력인데다 장왕을 굴리는 지렛대로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신비롭게 빛나던 독후의 녹안을 떠올렸다. 그녀는 불가사의한 인물이었다. 가능한 모든 정보를 동원해 그녀의 부재를 예측한 그의 아둔함을 비웃고 벽력도문에 도사리고 있던 것도 뜻밖이었지만 난전이 벌어진 후 보였던 행태도 이해불가였다.
방관자를 자처하던 그녀는 검후가 그를 쳤을 때 돌연 난장판에 뛰어들어서는 검후를 공격했다.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진 진천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병을 주고서 약도 준 셈이었다.
장왕에 관해서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는 애당초 그런 위인이었고 그다운 짓을 했을 뿐이었다. 진천이 침공을 서둘렀던 까닭도 독후가 잠적을 깨고 나타나 장왕에게 영향을 줄 사태를 우려해서였다. 불길한 예감은 들어맞는다던데, 딱 그 짝이었다.
검후는 심히 실망스러웠다. 진천은 그녀가 처음부터 그를 암해하기로 작심하고 왔을 거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녀는 남천도왕과 마왕과 맞서 싸우는 그의 무력을 확인하고서 갈등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고는 불과 이레 만에 그녀를 비롯한 무왕들과 동등한 무위에 오른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을 터였다. 그가 더 성장하기 전에. 그래서 팔대무왕을 발아래 두는 무림의 황제로 등극하기 전에.
진천은 검후의 심정을 이해했지만 그녀의 행동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외조부는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진천은 정맹에서 그의 전격적인 제안에 당혹스러워하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외조부가 벽력도문으로 향할 가능성을 절반 이하로 잡았다. 하지만 그는 결국 왔다. 어차피 올 거였으면 왜 제 시간에 당도하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상황은 또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었다. 적어도 일방적으로 몰리다 권왕이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는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진천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에게 짓쳐드는 마왕을 견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파도천망을 펼치고는 볏단처럼 쓰러지던 대웅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오양 천지문에 이어 다시 한 번 친우에게 구명지은을 입은 진천은 가슴이 먹먹했다. 빚을 갚고 싶지만 하늘은 그에게 그럴 시간을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
‘대웅…….’
입 속으로 벗의 이름을 읊조린 진천은 그가 무사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무리한 절공의 시도로 인해 단전에 탈이 났다면 남천도왕은 가치가 떨어진 손자를 내치고도 남을 냉혈한이었다. 대웅의 안위는 혈족관계가 주는 보장이 아니라 오롯이 그 자신의 회생과 발전 가능성에 달려있었다.
밤을 새워 사천여 리를 날아간 진천은 새벽녘에 주안에 당도했다.
죽림을 넘어 삼보장에 들어선 진천은 청와옥으로 향했다. 그의 도래를 인지한 소중걸과 여상구가 일층으로 내려왔다.
진천은 그에게 안긴 권왕을 보며 놀라는 두 사내에게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자기 방의 문을 열기도 전에 어느새 백와옥에서 달려온 명이 물었다.
진천은 대답하기 싫었으나 입을 열었다.
“다치셨소. 잠시 후에 내려갈 테니 다연실에서 기다려주구려.”
진천의 침중한 목소리에 명은 방으로 따라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머물렀다.
홀로 방에 들어선 진천은 침상에 권왕을 눕혔다. 헐벗고 가난했던 시절의 고난을 잊지 않겠다며 평생 노숙과 야숙을 고집해 온 늙은 의형의 얼굴을 내려다본 진천은 가슴이 저몄다. 계속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 진천은 감상을 누르고 방을 나갔다. 일층에 내려가지 않고 아직도 복도에 있던 명이 진천에게 붙었다.
명을 데리고 일층의 다연실에 간 진천은 하나둘 모여든 친인들을 상대로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주었다.
진천의 설명이 이어짐에 따라 중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장왕이 배신한 대목에서 소중걸의 안색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귀 밝은 이들은 그가 소리 없이 내뱉은 욕설을 들을 수 있었다. 검후의 등장과 그녀의 암습에 이르러서는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고 명의 낯빛은 새파래졌다.
진천은 마왕을 떨쳐낸 장면을 끝으로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그의 말이 끝났음에도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침묵을 깬 이는 하수린이었다.
“그럼 이제 어떡할 거죠?”
좌중을 둘러본 후 하수린에게 시선을 둔 진천이 담담히 답했다.
“그제 못다 한 일을 마무리 지을 작정이오. 이번 달 안으로.”
진천은 지하연무장으로 내려갔다. 그가 발하는 비장한 분위기가 부담스러웠는지 명만이 따라와서 그의 수련을 지켜보았다.
가상의 적들을 허공에 그려놓은 진천은 치열하게 싸웠다. 진천은 아직 남천도왕이나 마왕, 혹은 장왕과 검후를 대적하기에는 무리임을 확인했다. 공력의 유의미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 혈류가 제멋대로 날뛰었기 때문이었다. 진기의 흐름을 의지로써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한다면 무왕들을 상대로 백전백패를 면치 못할 터였다.
당장이라도 삼보장을 떠나 심중의 복안을 결행하고 싶었으나 진천은 자중했다. 조바심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대여섯 시진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수련에 전념하던 진천이 갑자기 손을 거두었다. 그가 일으킨 강기의 폭풍에 몸살을 앓던 지하연무장이 마지막 진저리를 쳤다.
진천의 눈길이 입구로 향했다.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기색을 만면에 담고 있던 차소영이 지하연무장으로 내려온 이유를 밝혔다.
“어떤 노인이 진 공자를 찾아왔어요.”
진천은 힐끗 명을 바라보았다. 방문객은 아마도 그녀와 관련이 있는 인물일 터였다.
청와옥 다연실에서 민머리의 노인을 본 진천은 자신의 예측이 틀렸음을 깨닫고는 의아했다.
노인은 그가 전날 북운상단주 오재승에게 소재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던 자들 중 한 명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구란 말인가.
칠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노인은 진천을 마주보지 못하고 허리를 반으로 접은 상태로 그를 맞이했다. 진천은 감히 절대천룡과 눈높이를 같이 할 수 없다며 착석을 극구 마다하는 노인을 억지로 앉혔다. 노인은 푹신한 의자가 가시방석이기라도 한 양 안절부절못했다.
노인이 입을 열 기미를 보이지 않자 진천이 운을 뗐다.
“저를 보러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노인은 빌린 돈의 상환 독촉을 받은 빚쟁이처럼 쩔쩔맸다. 그가 우물쭈물하자 진천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노인은 동문서답했다.
“제발 말씀을 낮추십시오, 공자님. 저는 하잘것없는 숙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늘같은 공자님을 대할 자격이 없음을 알지만 너무나 궁금하여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죽을 각오를 하고 찾아왔지만 정말로 공자님을 뵐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렇게 존안을 뵈오니 이 늙은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진천은 노인의 횡설수설에서 요지를 잡아냈다.
“무엇이 그렇게 궁금하셨는지요?”
“비록 내일이면 관에 들어갈 나이지만 지금도 안력만큼은 젊은이들 못지않다고 자부합니다. 아주 먼 거리였지만 똑똑히 보았습니다. 한 번이라면 착각이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여러 번, 아니 수십 번을 보았으니 그렇지 않을 테지요. 믿기지 않는 광경에 속으로 끙끙 앓다가 이대로 있다간 미칠 것 같아서…….”
진천은 노인의 장광설을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저를 보셨는지요?”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던 노인이 고개를 들어 진천을 마주 보았다. 어째서 그런 뻔한 질문을 하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야 정맹에서 뵈었지요. 그곳이 아니면 저 같은 늙은이가 어디에서 공자님을 뵐 수 있었겠습니까?”
노인의 말들을 곰곰이 되짚어본 진천이 일순 처진 눈을 치떴다.
“어르신은 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