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19
제218화
진천은 청와옥을 나왔다.
뜻밖에도 후원의 별채에 거하는 검왕이 그보다 먼저 마당에 이르러있었다. 노소는 나란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보랏빛 노을을 배경 삼아 하얀 그림자가 떨어져 내렸다. 백영(白影)은 면사를 쓴 녹안의 여인이었다.
진천은 침을 삼켰다. 독후가 여긴 어쩐 일이란 말인가. 전혀 예기치 못했던 방문이었다. 시간 상 그녀는 이틀 전 천지인봉에서 벌어졌던 난전이 마무리 된 후 곧장 삼보장으로 향했을 공산이 컸다. 무엇 때문에 왔을까. 누구를 보러 왔을까.
진천은 심중에 떠오르는 의문에 대한 답을 바로 얻어냈다. 독후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녀에게서 오 장 떨어진 검왕만을 응시했다. 검왕 역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기에 두 남녀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진천은 검왕과 독후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안광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검왕의 눈동자에 드리운 빛이 호수처럼 잔잔한 반면 독후의 녹색 동공에서는 폭풍이 휘몰아쳤다.
검왕과 독후가 자아내는 묘한 분위기는 많은 것을 설명했다. 진천은 문득 그를 괴롭히던 몇 가지 수수께끼가 일시에 풀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독후의 비단면사가 나비처럼 나풀거리더니 아흔이 넘은 이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청아한 옥음이 흘러나왔다.
“오랜만이군요.”
진천은 권왕을 이름으로 부르며 평대했던 독후가 검왕에겐 말을 놓지 않은 것에 주목했다. 호칭도 없었다.
“그렇구려.”
검왕의 짤막한 대꾸에 면사 위에 뜬 독후의 봉목이 가늘어졌다.
“당신도 늙는군요.”
‘당신은 그대로구려.’라고 응수할 법도 한데 검왕은 독후의 감상을 흘려보냈다.
대화가 끊어지고 침묵이 길어지자 끼어들지를 두고 고민하던 진천은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이윽고 독후의 면사가 펄럭거렸다.
“멀리서 벗이 찾아왔는데 이렇게 세워 둘 건가요?”
먼저 입을 열어 자존심이 상한 듯 독후의 음성에 날이 서 있었다.
“갑시다.”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후원으로 걸어가는 검왕의 등을 쏘아본 독후가 비로소 진천을 일별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진천은 오른 주먹을 왼 손바닥에 갖다 댔다. 그러나 그가 인사할 겨를을 주지 않고, 독후는 검왕을 따라붙었다. 검왕과 독후가 별채 모퉁이로 사라지자 진천은 참았던 날숨을 내쉬었다.
진천은 독후에 관해 생각하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청와옥과 백와옥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친인들이 그의 묵상을 깨뜨렸다. 그들에게 독후의 도래를 알린 진천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권왕에게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제 방의 문을 열자마자 진천은 권왕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별채를 나온 독후가 미끄러지듯 그에게로 다가왔다.
“진광은 어디 있느냐?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진천은 당혹스러웠다. 독후가 의형의 생사 여부를 물어서가 아니라 검왕과의 면담이 지나치게 빨리 끝났기 때문이었다. 둘이 별채에 든 지 촌각도 지나지 않았을 터였다. 회포를 풀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기실 대화를 나눴을지도 의문이었다. 혹시 서로 노려만 보다 끝나지는 않았을까.
독후와 검왕이 독대한 내용이 몹시 궁금했지만 그녀에게 직설적으로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진천은 답답했다.
“큰 형님은 저 와옥에 계십니다. 제가 모시지요.”
독후의 봉목에서 기광이 번득였다. 진천은 그가 무심코 뱉어낸 ‘큰 형님’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음을 알았다. 그녀가 뭔가 한 소리를 할 거라 예상했던 진천은 그녀의 면사에 흔들림이 없자 괜히 실망했다.
진천과 말을 섞을 의사가 없음을 밝힌 독후가 냉랭한 눈빛으로 안내를 독촉했다. 진천은 하는 수 없이 방금 나왔던 청와옥으로 독후를 데리고 들어갔다.
이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자 독후가 성큼성큼 들어섰다. 침상의 권왕을 본 독후가 아미를 찡그렸다.
“꼴좋군, 진광.”
독후의 인사에 권왕이 툴툴거렸다.
“빌어먹을. 병문안을 왔으면 술이라도 들고 오지.”
권왕과 막역한 사이임을 과시한 독후가 마치 자기 방인 양 진천을 쫓아냈다.
“넌, 나가 봐.”
진천은 얌전히 물러났다.
다연실의 여량에게로 돌아온 진천은 하다만 얘기를 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았다. 신경이 온통 이층에 쏠려있던 탓이었다.
검왕과 촌각의 만남을 가졌던 것과는 달리 독후는 권왕과는 꽤 오랜 시간 밀담을 나눴다. 그들의 음성이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은 걸로 보아 독후가 기막을 펼쳤음에 틀림없었다.
진천은 호기심을 억눌렀다. 나중에 권왕에게 독후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세세하게 들을 수 있을 터이니 지금은 목전의 환인에게 오롯이 집중해야 했다. 여량이 현시한 한 수는 그에게 벼락과도 같았다. 충격이 가시기 전에 요체를 흡수하고 싶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라도 무영 너머에 있을 신세계를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여량과의 문답에 몰두한지 일각도 지나지 않아 진천은 황급히 다연실을 나가야 했다. 독후의 기운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진천은 이층에 올라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할 새도 없이 청와옥을 나왔다.
미약하나마 숨소리가 잡히는 것으로 보아 권왕이 변을 당했을 리는 없을 듯했다. 그렇다면 독후를 잡는 게 우선이었다.
바깥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차소영과 고량이 백와옥을 나와 여기저기 등을 걸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서 빠져나갔음에 분명한 독후의 신형은 벌써 작은 점으로 화해 있었다. 진천은 전속력으로 독후를 추격했다.
기운을 갈무리하지 않았기에 그가 따라가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터이지만 독후는 경신을 멈추지 않고 계속 날아갔다. 진천은 주안 외곽의 야산에 이르러서야 그녀를 따라잡았다.
진천과의 거리가 사오 장으로 줄어들자 독후가 지상으로 내려갔다. 진천은 그녀에게서 오륙 보 떨어진 곳에 착지했다. 너무 가깝다고 느꼈는지 독후가 미간을 모았다. 그럼에도 눈썹만 일그러졌을 뿐 이마 어디에도 주름이 잡히지 않았다.
“왜 따라왔느냐? 내 치마속이라도 보고 싶은 게냐?”
독후의 짓궂은 질문에 진천이 낯을 붉혔다. 하지만 침착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어르신께서 저를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독후의 초록빛 동공에 이채가 서렸다.
“무슨 말이냐?”
“저를 시험하신 게 아니었는지요? 그래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독후의 면사가 살짝 흔들렸다. 탄성을 토하지는 않았지만 입을 벌려 놀라움을 드러낸 모양이었다.
진천은 추측이 들어맞았음을 알고는 안도했다. 독후의 급작스러운 출발엔 그의 무력을 측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사상 최강의 독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독후에겐 독공 말고 특장기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경공이었다. 그 방면에서 독후보다 우위를 점하는 무왕은 한 명도 없었다. 단순히 경신의 속도만 따지면 독후는 팔대무왕 가운데 일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천은 그런 독후를 주안이 끝나는 지점에서 따라잡은 것이었다.
갑자기 돌풍이 일었다.
얇은 백색경장이 바람에 쓸려 늘씬함과 풍만함을 동시에 갖춘 독후의 뇌쇄적인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면사가 휘날리며 그녀의 코와 뺨과 입술과 턱 선도 노출되었다. 실로 아찔한 미모였다. 그러나 진천은 평정을 유지했다. 그의 무덤덤한 눈을 본 독후가 무형지기로 일으킨 바람을 거두었다.
“진광이 헛소리를 할 리가 없음을 알지만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웠거늘.”
그의 응답을 요하는 감상이 아니었기에 진천은 잠자코 독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날래고 똑똑하고 반듯한 아이야. 아까부터 나한테 치근덕거리고 싶은 눈치던데 어디 해 보렴.”
독후의 말투가 바뀌었음을 의식하며 진천은 단도직입했다.
“어르신께서 사벌과 마련의 편에 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글쎄, 네가 보기엔 어떨 것 같니?”
“…….”
답을 알고 있었으나 진천은 침묵했다. 독후가 직접 입장을 표명하기를 원해서였다. 그러나 독후는 그의 답변을 재촉했다.
“어서 얘기해보렴. 진광의 말로는 뭘 물어도 척척 답을 내놓을 거라던데? 지모가 하늘에 닿았다면서 한 길도 안 되는 여자의 속을 모르진 않겠지?”
진천은 할 수 없이 그가 생각한 바를 밝혔다.
“어르신께서는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방관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간단한 추론이었다. 진천은 독후가 남천도왕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벽력도문을 찾은 것은 아니리라 보았다. 그녀가 그날 거기에 있었던 것은 우연이었거나, 다른 용무가 있었거나 아니면 단지 구경을 위한 방문이었을 터였다.
이는 권왕과 장왕을 대하던 그녀의 언행에서 유추할 수 있었다. 장왕의 배신은 그녀가 종용해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 택한 결정이었다. 비록 그녀의 조롱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긴 했지만.
난장판이 벌어졌을 때 독후가 취한 태도도 그러한 판단을 뒷받침했다. 그녀는 시종여일 뒷짐을 쥔 채 관전자 역할을 즐겼었다. 검후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권왕이 삼왕에게 죽임을 당하더라도 개입하지 않았을 터였다.
“정답. 뱀과 승냥이들이 서로 물어뜯건 말 건 내 알 바 아니다. 나만 건드리지 않으면 돼.”
진천은 쓴웃음이 나왔다. 독후는 독인답게 표독한 성정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는 이유만으로 한 줌 독수로 화한 사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를 직시하거나 홀린 듯 침을 흘리는 자들에게만 살수를 펼쳤다. 세인들이 그녀의 기벽을 이해한 이후로는 그녀의 녹색 독무(毒霧)에 희생당한 이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진천이 별안간 독후에게 포권 하며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께 구명지은을 입었습니다.”
진천의 뒤늦은 감사인사에 독후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너를 구하려고 그랬던 게 아니니 마음에 담아둘 것 없다.”
일순 독후의 녹안에 얼음장 같은 냉기가 감돌았다.
“내가 왜 그년을 공격했는지 아니?”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진천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우습구나. 진광이 이르길 네게 무얼 물어보면 알면서도 일단 시치미를 떼는 나쁜 습관이 있으니 답을 듣고 싶으면 그냥 넘어가지 말고 재차 추궁하라고 하던데……. 지금이 딱 그 순간일 테지?”
진천은 절로 쓴웃음이 났다. 검후의 초록빛 눈동자에 감돌던 냉기가 장난기로 바뀌었다.
“자, 어서 진광이 말하는 재주를 부려보렴. 내가 왜 그 빼빼 마른 년에게 독장(毒掌)을 쏘았을까?”
“…….”
“당장 답하지 않으면 나는 뱀눈을 도와 뱃속엔 탐욕이 가득 찼으면서도 겉으로는 아닌 척하는 역겨운 정파 놈들을 쓸어버릴 테다. 남의 속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한다는 아이이니 농담이 아님을 알 테지?”
목전의 여인이 천하의 운명을 좌우할 결정을 즉흥적으로 내리고는 실행에 옮기고도 남을 위인임을 알기에 진천은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르신은 그녀가 싫으셨을 테지요.”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잖니. 내가 어째서 그년을 싫어했는지를 말해야지. 뭐, 누구라도 그년의 면사에 가려진 추악한 낯짝을 보면 후려갈기고 싶은 욕구가 일긴하겠지만 그걸 답이랍시고 내놓는다면 네 엉덩짝을 걷어차 버릴 테야.”
진천은 다시 싸늘해진 독후의 녹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위험신호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발을 뺄 수는 없었기에 진천은 한 발 더 나아갔다.
“검후가 ‘그분’을 가로챘다고 여기셔서 그런 게 아닙니까? 기껏 장애물을 제거했더니 엉뚱한 여자가…….”
“닥쳐라!”
노성을 터뜨린 독후가 불문곡직 독장을 쏘아낼 것을 대비하고 있던 진천은 녹무(綠霧)의 회오리 대신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날아오자 맥이 풀렸다.
광소를 멈춘 독후가 시퍼런 안광을 발하며 정색했다.
“그분은 누구며 장애물은 또 무엇이더냐?”
진천은 권왕에게서 호야곡 비사를 들었을 때부터 가졌던 의문을 풀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