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2
제21화
진천은 눈알을 뽑는다는 협박 때문이 아니라 흑의인이 그의 별호를 불러 놀랐다.
“초면에 말이 거칠군. 당신은 누구요?”
흑의인이 느티나무에서 바로 옆의 지붕으로 건너뛰더니 두 집을 거쳐 진천과 노덕에게로 왔다.
그가 가까이 오자 노덕은 그를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특징이 뚜렷한 외양이었다.
가장 특이한 것은 눈이었다. 흑의인은 흔히 왕방울로 비유되는 커다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살점이 거의 붙어 있지 않아 해골처럼 보이는 얼굴인지라 왕눈이 더욱 도드라졌다. 둥근 눈을 일부러 잔뜩 찌그러뜨리고 있었지만 험악하기보다는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몸도 평범하지 않았다. 마침 강풍이 불어 얇은 흑의에 가려진 몸매가 여실히 드러났는데 얼굴과 마찬가지로 살집 없이 삐쩍 마른 체형이었다. 바람에 날아가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울 만큼 빈약한 체구였음에도 흑의인은 어깨 위로 자기 몸무게의 몇 배는 나감 직한 쇠몽둥이를 메고 있었다. 허리에 차기에는 너무 큼직한 철곤(鐵棍)이었다.
진천의 지척에 이른 흑의인이 이름을 밝혔다.
“나는 대웅(大熊), 즉 큰 곰이야. 용맹함과 강인함과 잔인함의 상징이지.”
노덕은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이렇게 외관과 어울리지 않는 이름도 드물 터였다.
“너는 진천이겠지? 천한 출신으로 보이는데 오만하게 천(天)이란 이름을 쓰다니 가소롭군. 뭐, 그래도 건방지게 채찍을 휘두른다는 계집을 혼내 줬다니 한가락은 하겠지. 이따 실망시키지 마라.”
진천은 대꾸 없이 대웅이라는 사내를 지그시 바라만 보았다.
대웅이 노덕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가 그 미담의 주인공이로군. 늙었지만 마음에 들어. 모름지기 사내라면 그 정도의 박력은 있어야지. 암, 그렇고말고.”
노덕은 대웅이 그를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것이 아닌지 의아했다.
“내가 누군지 아는가?”
“어허, 어느 안전이라고 평대야, 평대가? 내 신분을 알면 당장 엎드려 이마를 박을 늙은이가.”
큼직한 눈을 부라리자 대웅은 올빼미처럼 보였다.
“당신 신분이 뭐요?”
진천이 물었다. 대웅이 뒷짐을 졌다.
“비밀이야. 알면 네가 아예 덤빌 엄두도 내지 못할 테니까. 싸우기도 전에 전의를 상실한 자를 갖고 놀 수는 없잖아.”
뛰어난 평정심의 소유자였지만 진천은 인내심이 바닥에 닿기 직전이었다. 속마음을 표정에 드러내는 진천을 힐끔거리던 대웅이 은근슬쩍 비무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단 구경부터 하자. 누가 이길 것 같나? 도토리들끼리 키를 재는 꼴이지만 그래도 코딱지만큼이라도 나은 놈이 있겠지. 어때?”
“나는 모르겠소.”
“흥, 좀 전에 번을 든 놈이 이길 거라고 지껄이는 걸 다 들었는데 어디서 발뺌이야. 내 생각은 반대야. 칼 든 놈이 이겨. 무조건.”
노덕은 비무대로 눈길을 주었다.
한창 격전 중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노덕의 시력으로는 어떤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 우세한지 판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딱 보기엔 번을 사용하는 놈이 아주 약간 강한 듯싶지만 그건 칼잡이의 음흉함에 속은 거야. 저놈은 전형적인 능구렁이야. 기운과 실력의 삼 푼이 아니라 절반을 감추는. 두고 봐. 저 삼도방의 곽찬이란 놈은 비단 이 비무에서 승리할 뿐만이 아니라 결국 우승을 차지할 거야. 만약 내 예상이 빗나가면 홀딱 벗고 저자에서 춤을 추지.”
진천도 노덕도 목전의 뼈다귀 사내가 수많은 이들 앞에서 발광하는 광경을 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 표정들은 뭐야? 감히 내 안목을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확실한 근거를 댈 테니까 귓구멍 후비고 잘 들어들. 나는 그저께 열린 삼십이강전을 두루두루 둘러봤어. 그리고 대충 훑어보고도 승패를 모조리 맞췄어. 저 칼잡이처럼 나중을 위해 진신 무력을 숨기는 얍삽한 종자들이 여섯이나 있었지만 내 심안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지. 봐, 봐. 칼잡이가 이겼잖아. 어때? 이제 믿겠어? 그런데 저 자식 생각보다 빨리 칼을 뽑았군. 왜 그런지 알겠어, 하남신룡?”
진천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머리 나쁜 족속은 질색인데. 그렇게 간단한 걸 몰라? 칼잡이는 부상을 염려한 거야. 번을 든 놈이 의외로 강적이었으니까. 시간을 끌다가 깃발을 휘두르는 놈이 이왕 패색이 짙어진 것,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나올 수도 있으니 칼잡이로서는 예방이 최선이 아니겠어? 칼만큼이나 눈치도 빠른 놈이야. 틀림없이 저놈이 우승할 거야. 아니면 나신으로 물구나무를 서서 저자를 한 바퀴 돌지.”
진천과 노덕이 동시에 실소했다. 왜 그렇게 옷을 벗는 걸 좋아하는지 모르지만 누가 그 꼴을 보고 싶어 하겠는가.
곽찬과 송구의 대결이 일찍 끝난 탓에 관중이 대거 다른 비무대 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지붕들 곳곳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도 먼 집들로 옮겨 갔다. 주변이 텅 비자 대웅이 미뤘던 용무를 다시 꺼냈다.
“이제 우리 차례야, 하남신룡. 팔정파의 계집을 꺾고 한창 기고만장해 있겠지만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가르쳐 주마.”
이상하게도 대웅의 눈빛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진천은 침착성을 잃지 않고 담담하게 응수했다.
“왜 나하고 싸우려고 하는 거요?”
대웅이 큰 눈을 찡그렸다.
“몰라서 물어? 네가 보름 전 하남편봉을 때려눕혔잖아. 원래 이번 출행의 목표가 그 계집이었는데 너 때문에 대상이 사라졌으니 봉 대신 꿩을 잡을밖에. 뭐, 네가 꿩이라는 말은 아냐. 말인즉슨 그렇다는 거지.”
진천도 눈을 찌푸렸다.
“내가 그 하남신룡인지는 어떻게 알아본 거요?”
대웅이 콧바람을 뿜었다.
“킁, 진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위인이로군. 혹을 달고 다니면서 어떻게 알아봤냐고 묻다니.”
노덕이 나섰다.
“내가 누군지 안단 말인가? 나는 자네를 본 적이…….”
“평대하지 말라니까. 사정이 있어 밝히지 않겠지만 나는 한낱 상인인 너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한 신분이다.”
진천과 노덕이 쓴웃음을 교환했다. 아무렴. 그럴 테지.
무례한 데다 종잡을 수 없는 언사로 일관하고 있음에도 대웅은 미운 인상이 아니었다. 대웅이 빠진 조각들을 꺼내는 친절을 베풀었다.
“문(門)을 나오기 전에 하남신룡과 동행했다는 주안 삼보장주의 용모파기를 보았다. 그래도 설마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혹시 이번에 하남편봉처럼 근사한 사냥감이 나타날까 봐 포성에 들렀던 건데 말이지. 기껏해야 아까 그 칼잡이 정도가 다여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차에 생각지도 않았던 월척이 바로 옆에서 파닥거리고 있으니 얼마나 가슴이 뛰었겠냐?”
진천은 그제야 의구심이 풀렸다.
“그랬군.”
반말로 내뱉은 진천의 중얼거림을 문제 삼지 않고 대웅이 등에 손을 올렸다.
“이제 내 몽둥이맛을 보러 갈 준비가 됐나?”
진천이 반문했다.
“내가 가지 않겠다면 어떻게 할 거요?”
대웅이 철곤을 빼 들었다.
“말 안 듣는 아이에겐 몽둥이가 약이란 말도 몰라? 때려서라도 데려가야지.”
대웅의 동공에 음험한 기운이 일렁거렸다. 노덕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대웅이 발산하는 안광은 투지나 살기보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담은 것 같았다. 노덕은 갈수록 괴청년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자, 선택해라, 하남신룡. 여기서 맞을래, 아니면 한적한 곳으로 가서 맞을래. 개망신이 싫다면 조용한 데서 맞는 게 나을걸. 어서 결정해. 만약 끝끝내 거부하겠다면 네 눈알에 앞서 여기 이 노인의 등골부터 뽑아 주마.”
유치한 협박이었지만 제대로 먹혔다. 노덕에게 피해가 갈까 염려한 진천은 대웅의 괴상한 비무청을 받아들였다.
* * *
골목을 돌고 돌아 인적이 끊긴 곳에 이른 대웅이 뒤를 돌아보았다. 진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싸우기엔 너무 협소한 장소였다.
“여기서부턴 경공을 펼칠 테니 놓치지 말고 따라와라.”
신법을 전개한 대웅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진천은 노덕을 안고 그를 좇았다.
비호처럼 빠르게 달린 대웅은 포성 외곽으로 나가더니 수림이 우거진 산중으로 들어갔다. 산기슭에 이른 대웅이 신형을 멈추었다. 경사가 심한 데다 바위투성이인지라 역시 비무에 적당한 곳은 아니었다.
“저 협곡 아래 약초꾼들도 내려가지 않을 자리가 있더라.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테니 죽도록 신나게 붙을 수 있을 거야.”
임전에 앞서 결사의 각오를 다지는 듯 대웅이 동공을 희번덕거렸다. 하지만 그가 멈춰선 이유는 따로 있었다.
“노인은 여기 있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요. 뭐, 구경하다가 뒈지고 싶으면 따라오든가.”
진천은 대웅의 배려가 마음에 들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대인.”
관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노덕은 고집을 부리지 않고 순순히 진천의 뜻에 응했다.
“기다림세.”
산 중턱의 깎아지른 절벽으로 간 대웅이 뛰어내렸다. 진천이 그를 따라 내려가자 노덕은 벼랑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높이가 족히 십이삼 장은 될 듯했다. 공터에 개미처럼 작은 두 개의 점이 보였다. 진천과 대웅의 머리일 터였다.
노덕은 진천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대웅도 만만치 않은 강자임을 알고 있었다. 산에 오는 동안 그가 선보인 신법은 무공에 문외한인 노덕이 보기에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더욱이 진천이 하남편봉을 물리쳤음을 알면서도 비무를 청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무력에 자신이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럼에도 노덕이 진천의 우세를 확신하는 까닭은 눈빛의 차이였다. 한쪽은 금석처럼 단단했고 다른 한쪽은 촛불처럼 흔들렸다. 전자가 진천이고 후자가 대웅임은 물론이었다. 노덕은 승부의 결과를 예견하기보다는 대웅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그의 출신 내력을 밝힐 실마리를 찾는 데 심력을 집중시켰다.
진천은 대웅과 오륙 장을 격하고 섰다.
절구통처럼 굵은 쇠몽둥이를 든 대웅의 전신에서 맹렬한 기세가 일었다. 진천의 표정이 굳었다. 실제로 붙어 보기 전에는 정확한 무위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발산하는 기운만 따지만 대웅은 고량이나 하수린을 능가했다. 그가 만난 최강의 적수였던 아타족의 청면괴인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는 압박감이었다.
우우웅.
대웅이 든 철곤이 몸서리를 치며 기음을 토해 내었다. 진천도 왼팔을 앞으로 뻗었다.
“한 수 배우겠소.”
진천이 예를 차리자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기세등등하던 대웅이 움찔거렸다.
“일단 손을 쓰면 너를 죽일지도 몰라. 무서우면 지금이라도 도망가라.”
이해하기 힘든 대웅의 말에 진천은 당황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언급한 ‘죽음’이란 단어에 자극을 받았다.
“싸웁시다.”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진천이 곧장 대웅에게 돌진하며 선공을 가했다. 진천의 주먹에 실린 권기가 대웅에게 닿을 찰나 철곤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맞는 순간 뼈도 추리지 못하고 곤죽이 될 게 뻔했기에 진천은 신속히 몸을 비틀어 쇠몽둥이를 피했다. 완벽히 빗겨 냈음에도 철곤에 담긴 외기에 그의 내기가 격탕되었다. 그 탓에 미리 염두에 두었던 후속 수단을 단념하고 황급히 거리를 벌려야 했다.
대웅의 엄청난 공력에 놀랐지만 진천은 떨어지자마자 바로 달라붙었다. 무기가 없는 그로서는 아예 멀거나 아주 가깝게 붙어야만 유리했다.
현란한 보법을 펼쳐 대웅의 삼 보 이내로 파고든 진천이 그의 명치를 겨냥해 수도를 찔러 갔다. 왼발을 축으로 측면으로 돌아 손칼을 흘린 대웅이 일백 근도 넘음 직한 쇠몽둥이를 나뭇가지인 양 가볍게 휘두르며 반격을 가했다. 철곤의 경로에 맞춰 진천의 상체가 부드럽게 휘었다. 회피와 동시에 진천이 대웅의 사타구니를 노리고 우족을 차올렸다. 대웅은 몽둥이 손잡이를 내려 막아냈다. 방어에 공격을 담은 동작이었다. 진천은 발을 보호하기 위해 미련 없이 물러섰다.
순식간에 삼 초를 교환한 두 사내는 숨도 고르지 않고 다시 충돌했다. 격렬한 공방을 거듭했지만 우열은 쉽게 가려지지 않았고 팽팽한 승부가 이어졌다. 박빙의 국면에 변화가 생긴 것은 일백 초가 흐른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