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20
제219화
진천은 상상했다.
절정기를 지난 삼사십 대의 나이에도 이견의 여지가 없는 천하제일미로 인정받았던 연진진이란 여인은 천하제일기남아로 불리던 소진이란 사내에게 반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와 연분을 맺고 싶지 않았을까.
욕망은 죄가 아니나 죄의 온상이라 할 법했다.
연진진이 소진을 가지려면 먼저 그녀를 쥐고 있던 나중강이란 사내의 손을 벗어나야 했다. 문제는 나중강이 대적불가의 절대지존(絶對至尊)이라는 것이었다. 이미 난세십군(亂世十君)을 능가하는 무위에 도달해 있던 그녀를 포함한 호련사성 전원이 달려들어도 그를 꺾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장애물’을 제거할 수 없음을 깨달은 연진진은 꾀를 내었다. 먼저 나중강을 극독으로 약화시킨 후 동료들과 합공해 처치한다는 것이 큰 줄기였다.
일차적인 관문이었던 중독은 무형지독 같은 은밀한 방식이 아닌 정공법으로 이루어졌다. 과도한 자신감으로 무장한 나중강은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독을 만독불침(萬毒不侵)인 그에게 시험해보고 싶다는 애첩의 도전을 흔쾌히 받아들였을 터였다.
연진진은 세 동료를 다른 방식으로 끌어들였다. 마중물은 태진광이었다. 삼 척의 정심(正心) 덩어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태진광은 천하일통 후 하찮은 양민들을 몰살시키겠다는 나중강의 복안을 귀띔해주자 예상대로 기겁을 했다. 무력은 고강하지만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그를 구슬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연진진의 바람대로 태진광은 스스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막우천의 포섭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연진진은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불쾌함을 감내해달라는 태진광의 간청에 못 이긴 척 막우천을 받아들였다. 그녀를 탐하는 막우천을 발가벗긴 후 양물의 실종을 두고 조롱했지만 이미 그녀에게 혼백을 빼앗긴 막우천은 모욕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태진광 못지않게 고지식한 막우천은 나중강을 해치운 후 몸을 주겠다는 그녀의 허언을 철석같이 믿었다.
소진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했다. 고독한 승부사인 그는 필생의 목표인 나중강을 비겁한 방식으로 시해하려는 작당에 동참할 리 만무했다. 연진진은 태진광을 조종해 소진으로 하여금 나중강과의 비무에 나서도록 설득했다.
일이 되려니 마침 여러 조건이 들어맞았다.
굳이 부추기지 않더라도 막 검공의 새로운 경지에 올라섰던 소진은 폐관수련을 마친 후 절대지경에 들었음을 선포한 나중강과 겨루어보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 상태였다. 전격적으로 무림정벌에 나선 나중강이 월교를 첫 번째 목표물로 삼은 것도 호재였다. 연진진은 월교로 가는 길에 있는 호야곡이 거사를 치를 최적의 장소임을 알고 있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도우니 반드시 원을 이룰 수 있으리라 확신한 연진진은 호야곡에 이르기 전날 밤 나중강에게 용독(用毒)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완전히 해독하려면 족히 여섯 시진은 필요할 터였다.
운명의 그날 체내에 독중지왕(毒中之王)을 담은 나중강에게 해가 뜨자마자 소진이 비무를 청했다. 혹시라도 나중강이 나중으로 미루자고 할까봐 간을 졸였던 연진진은 그가 그 자리에서 수용하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출 직후 나중강과 호련사성은 일통무련의 수하들을 평원에 대기시키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황량한 골짜기로 몰려갔다. 그리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호야곡 기사(奇事)’가 일어났다.
진천은 독후의 질문에 반문으로 답했다.
“그분은 검왕 어르신이고, 장애물은 무황이 아닌지요?”
독후는 정확한 감정을 헤아리기 어려운 눈빛으로 진천을 쏘아볼 뿐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손을 올려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누가 네게 알려주더냐? 설마 진광에게서 들은 건 아닐 테지?”
“아닙니다. 호야곡 비사에 대한 큰 형님의 회상을 듣고 저 혼자 상상했을 뿐입니다.”
“네 상상을 진광에게도 토설했더냐? 아니지, 그랬다면 아까 아무 말도 없었을 리가 없지. 잘 했다, 아이야. 방금 그 얘긴 우리 둘만 알고 있자꾸나.”
비밀을 지킬 자신이 없었기에 진천은 난색을 표했다.
“그러고 싶지만 약속드리긴 어렵습니다. 큰 형님께서 그 문제를 거론하시며 이것저것 물으신다면 저로서는…….”
독후가 진천의 말을 끊었다.
“내가 아니라 진광을 위해서다, 아이야. 나를 친구라고 믿고 있는 그 불쌍한 위인이 나한테 기만당했음을 알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느냐? 다른 놈들이야 그러건 말건 내 알 바 아니지만 진광은 가엽구나. 무력도 온전히 회복하기 힘든 상태인 듯싶던데 다 지난 일로 괜한 괴로움을 줄 게 무어야. 그렇지 않으냐?”
동의하기 어려웠기에 진천은 침묵했다.
독후의 초록빛 눈동자 깊숙이 청광이 일렁였다.
“너를 한줌의 독수로 만들어 입을 다물게 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날 싸우는 걸 보니 내 독장에 호락호락 당하진 않을 테고, 어떡하면 좋을까, 아이야?”
진천은 여전히 묵묵부답했다.
“이러면 어떻겠느냐, 아이야? 네 함구의 대가로 선물을 주마.”
“……?”
“내 제안을 받아들일 테냐? 네가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닐 게다.”
진천은 호기심이 생겼다.
“선물이라시면, 어떤?”
독후의 봉목이 가늘어지며 눈웃음을 그렸다.
“그 질문으로 우리의 계약이 성사된 걸로 하자꾸나. 내 선물은 조언이다. 훗날 불가항력의 마력을 지닌 괴물이 출현하면,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네가 그를 무찌르게 된다면, 그의 목을 꺾었다고 우쭐대지 말고 심장을 녹이도록 해라.”
“그게 무슨 말씀…….”
진천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독후가 허공으로 신형을 날렸다.
“여기까지다. 또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잘 살아라, 아이야.”
독후의 마지막 목소리는 일백 장 떨어진 곳에서 들려왔다. 진천은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며 점점 작아지는 하얀 점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삼보장으로 돌아간 진천은 다연실의 여량에게 청와옥에서 며칠 묵을 것을 권한 후 이층의 권왕에게로 갔다. 그가 방에 들어서자 침상에 누워있던 권왕이 눈을 돌렸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구나. 설마 진진을 놓친 건 아닐 테지?”
“연산(燕山) 초입에서 잠시 대화를 나눴습니다.”
“다 내 덕분인 줄 알아라. 진진은 다른 이에게 곁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 나한테 네 얘기를 듣고서 만나고 싶은 마음이 동했을 게다. 그래, 그녀와 무슨 얘기를 했느냐?”
“사마의 무리에 힘을 실어주지 않으실 거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여하간 잘 됐구나, 아우야.”
“그렇습니다, 큰 형님.”
진천이 뒷말을 잇기도 전에 권왕이 화제를 바꿨다. 독후와의 대화 내용을 풀지 않아도 된 진천은 부담을 덜었다.
“그런데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아우야. 검후는 왜 우리를 도와주다 말고 별안간 너를 암습했을까?”
진천은 쓰게 웃었다.
“그녀는 아마 제 무력을 보고 당황했을 겁니다, 큰 형님.”
권왕은 말귀를 알아들었다.
“전날 지하연무장에서 쓰러뜨렸던 네가 불과 며칠 만에 자기와 대등한 무위에 오른 걸 보고는 너를 남천도왕이나 마왕보다 더 큰 위험요소라고 판단했단 말이더냐? 그래서 충동적으로 너를 공격한 거고?”
“네, 큰 형님. 다만 충동적이라기보다는 진즉부터 갈등하고 있었을 공산이 큽니다. 정맹에서 제가 외조부와 대등하게 겨루었다는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었을 테지요. 그것 때문에라도 저는 그녀가 벽력도문에 나타날 확률이 높다고 보았습니다.”
“허면, 그날 숨어서 네 무력을 지켜보고는 너를 치기로 결정했단 말이지?”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그녀가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었더냐?”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긴 했습니다. 실은 명을 정맹에 데리고 가서 그녀의 신분을 노출한 것은 저로서는 일종의 안전장치였습니다. 명을 통해 관계를 공식화하면 검후도 등을 돌리기 어려울 거라는 심산이었지요. 판단 착오였습니다.”
“검후는 그 아이를 진짜 후계자로 여기지 않는 모양이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고약한 지고. 그나저나 너는 어째서 검후가 배신할 것을 알았음에도 그녀를 부른 게냐? 하마터면 반신반의하던 도끼에 발등을 찍힐 뻔했잖으냐?”
“그녀는 독후 어르신이 나타나 장왕이 돌변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전세가 우리에게 유리했더라면 우리와 한 편이 되어 싸웠을 것입니다. 검후는 마지막까지 결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했을 듯싶습니다. 그녀가 만검폭우로 큰 형님과 저를 위급지경에서 구해 준 건 그 여파지요. 하지만 제가 그녀에게 뒤를 맡긴 순간…….”
권왕이 진천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거 봐라. 내 말이 맞잖느냐? 검후는 충동적으로 네게 검을 휘두른 게야.”
꼭 그런 건 아니었지만 진천은 반박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큰 형님.”
흡족한 미소를 짓던 권왕이 고통의 신음성을 흘렸다. 이가 없이 잇몸을 꽉 문 권왕의 면상이 황소 발에 짓밟힌 진흙처럼 찌그러졌다.
권왕은 한참 후에야 호흡이 돌아왔다. 통증이 가라앉진 않았는지 얼굴은 여전히 우그러져있었다.
“진진의 말마따나 내 꼴이 말이 아니구나.”
의형을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 진천은 침울해졌다.
“인상 펴라, 아우야. 아픈 건 난데 왜 네 녀석이 울상이냐?”
“…….”
“내가 몇 살이더냐, 아우야?”
“…….”
“이젠 네 말을 대놓고 무시하는구나.”
“아닙니다, 큰 형님. 죄송합니다.”
“그럼 뜸 들이지 말고 답을 해야지, 이 녀석아. 내가 올해 몇 살이라고?”
“아흔다섯이십니다.”
“그래. 살만큼 살았다. 게다가 아직 십 년은 더 숨이 붙어 있을 게다. 이 얼마나 감지덕지한 일이더냐.”
답을 요하는 질문이 아니었고 맞장구를 칠 수도 없었기에 진천은 침묵했다.
“더욱이 단전이 완전히 깨진 건 아니니 어느 정도는 무력을 되찾을 게다. 뭐, 그래 봤자 금강권, 그 아이보다 주먹이 물러지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어쨌거나 내 사부보다는 월등히 좋은 조건이잖으냐?”
진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권왕이 사부라고 부르는 이는 삼백 년 전 초인시대에 마도의 이인자로 활약했던 권마(拳魔) 하후만이었다. 젊은 날의 천무대제 이강에게 패해 폐인이 되었지만 하후만은 낙담하지 않고 무공 창안에 여생을 바쳤다. 그 결과물이 ‘제왕십팔권’이었다. 너무나 심오하고 난해한 탓에 오랫동안 주인을 찾지 못하고 떠돌던 절학은 이백여 년이 지난 후에야 공주 옥천 태생의 천재 소년을 만나 빛을 볼 수 있었다.
“이미 사부가 남긴 심득 이상의 경지에 올랐다고 자부한다만 더 다듬어서 후인에게 전해 줄 참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우야?”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큰 형님. 그녀에겐 검공보다 큰 형님의 권공이 훨씬 잘 어울릴 것입니다. 천무대제도 권문(拳門)의 절기를 익혔다지 않습니까?”
권왕의 일자 눈이 동그래졌다.
“허어, 이 능구렁이 같은 녀석. 벌써부터 내 속을 읽고 있었구나.”
“아닙니다, 큰 형님. 방금 알았습니다.”
진천은 진심으로 권왕의 결정을 반겼다. 권왕은 명에게 권공을 전수하려는 것이었다. 권왕을 위해서도, 명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 아이가 힘이 빠진 내게 배우려 들까?”
“물론입니다, 큰 형님. 그녀는 최고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당과를 받기 직전의 어린아이처럼 들뜬 진천을 올려다보며 권왕이 애처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네겐 미안하구나, 아우야.”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수명을 안타까워하는 의형의 심정을 알고도 남기에 진천은 그로서는 드물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큰 형님. 정말 기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검왕 어르신과 검후에게는 제가 말하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이럴 게 아니라 당장 명을 불러오겠습니다. 그리고 이참에…….”
“진정해라, 이 녀석아. 너답지 않게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는 게냐? 일단 좀 쉬어야겠으니 그만 나가거라. 그 아이에겐 넌지시 의중을 물어보고. 합의가 될 때까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 마라.”
“알겠습니다, 큰 형님. 깨시면 다시 오겠습니다.”
마음의 짐을 던 진천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방을 나왔다. 목숨이나 다름없는 무공을 상실했음에도 삶의 의욕을 잃지 않은 의형의 의연함에 감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