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21
제220화
아스라이 쇠북소리가 들려왔다. 종성(鐘聲)은 열한 번을 울리고서야 그쳤다.
다연실의 여량에게 잠시 들른 진천은 청와옥을 나와 지하연무장으로 향했다. 술시(戌時)이니 명과 검왕이 나와 있을 터였다. 아직 수련을 개시하기 전인지 두 사람이 일으키는 파공성이 들리지 않았다. 달팽이집의 내부 같은 계단을 내려가며 진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검왕의 기운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진천은 의아했다. 검왕은 시간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넓은 연무장에 명이 홀로 서있었다. 진천이 다가가자 그녀도 진천 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검왕 어르신은 아직 나오지 않으셨소?”
명의 목소리가 들떠 있음을 감지한 진천은 무언가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오늘은 수련을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소?”
진천의 처진 눈꼬리가 올라갔다.
검왕의 급작스러운 수련 중단, 아니 종결 통보는 독후의 방문과 관련되어 있음에 분명했다. 진천은 이 사안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독후가 그에게 남긴 수수께끼 같은 말과 검왕의 돌연한 선언을 묶으면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검왕과 면담을 해야 함을 알았다.
진천이 침묵에 잠기자 그의 태도를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오해한 명이 변명하듯 말을 쏟아냈다.
진천은 쓰게 웃었다.
“알고 있소, 명. 당연히 명의 잘못이 아니오.”
반색하던 명이 웬일인지 금세 안절부절못했다. 진천은 그녀가 불안해하는 연유를 헤아렸다. 그가 안심시키기 전에 명의 삐뚠 입술에서 피리소리처럼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천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명의 앙상한 어깨를 잡았다.
“그럴 필요 없소.”
진천은 명이 했던 말을 인용해 대답했다.
“그렇소. 오늘만이 아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리가 없지만 일순 명의 텅 빈 눈이 커진 듯했다.
명은 신이 났다.
“나하고도 수련을 할 테지만 명을 가르쳐 줄 분은 따로 있소.”
명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내 큰 의형이오.”
진천은 실소했다.
“그렇소. 몸은 작지만 마음은 태산보다 크신 분이오. 그분은 명에게 최고의 스승이 되어주실 거요.”
간단하게 난제를 해결한 진천은 고심했다. 여기서 멈출 것인가 말이 나온 김에 더 나아갈 것인가. 진천의 선택은 후자였다.
“내 큰 형님과 사제지연을 맺기 전에 명이 해야 할 일이 있소. 새로운 사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이전 사부와의 관계를 정리해야 하오.”
진천의 말귀를 알아들은 명이 긴장했다. 진천은 떨기 시작한 명을 끌어안았다.
“나를 믿소, 명?”
“나를 믿어주길 바라오. 내가 명을 지켜주겠소. 검후와 이어진 연줄을 끊어주겠소. 하지만 그러려면 명이 절대적으로 나를 믿어야 하고 나를 도와줘야 하오.”
진천은 명을 떼어놓았다. 하지만 어깨는 그대로 잡고 있었다.
“두렵더라도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오. 검후가 머릿속에 나타난다고 해도 나를 생각하고 버텨내구려.”
두 주먹을 꽉 쥔 명은 대답 대신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진천은 전날 열락궁으로 향하던 중 명의 발작을 통해 알게 되고 추론했던 바를 들려주었다.
“명은 필시 어린 시절 월교의 승천팔관이란 곳에 들었을 거요. 거기서 일어난 어떤 사건으로 인해, 아마도 집단으로 명을 괴롭히던 아이들로 인해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건 같은데, 명의 특별한 능력이 드러났을 듯싶소. 명이 속했던 유룡관을 찾았을 검후는 명을 제압한 후 눈을 상하게 하고 모종의 술수를 부렸을 거요.”
명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진천의 팔뚝을 잡으려들었다. 가만있으면 팔이 두 동강날 판이기에 황급히 호신강기를 두른 진천이 소리쳤다.
“용기를 내야 하오. 내가 옆에 있소. 아무도 명을 해치지 못하게 할 거요.”
명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진천은 반말로 소리쳤다.
“전날 이곳에서 검후의 지시를 거부했을 때를 떠올려, 명. 그녀는 절대로 너를 해치지 못해. 내가 있으니까. 내가 너를 지켜주니까. 그녀를 똑바로 바라봐. 그녀의 칼을 막아. 아무리 무서워도 피하지 마. 넌 강해. 넌 그날의 어린아이가 아냐.”
공력이 실린 진천의 음성이 지하연무장을 울렸다. 진천은 끊임없이 명을 격려하며 그가 곁에 있음을 상기시켰다. 명은 경련을 일으켰으나 이지를 잃지는 않았다. 결국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명이 까무러치자 진천은 얼른 그녀를 안아들었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겠지만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
진천은 명이 혼절했으되 발작하지는 않았음을 긍정적인 징조로 보았다. 그녀로서는 유의미한 진일보였다. 그의 기대대로 아리우족의 피를 이어받은 명은 근본적으로 전사의 심장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품에 안겨 정신을 잃은 명을 내려다보는 진진의 가슴은 상처 입은 새끼짐승을 보는 듯한 안쓰러움으로 물들었다. 전날 명이 발작하기 직전 울부짖던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ㅡ내 눈을 팠어, 그 여자가. 그리고 나를 난도질했어.
검후가 명에게 몹쓸 짓을 했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진천은 검후에 대한 명의 극심한 공포가 단지 그날의 충격이 낳은 후유증만은 아니리라 확신했다. 검후는 명에게 ‘모종의 술수’, 즉 제혼술(制魂術)을 부렸음에 틀림없었다.
그 술법이 절정 이상의 무력을 지닌 무인들에게는 무용지물임이 판명된 후 한때 득세했던 술사들은 무림의 변두리로 밀려난 지 오래였지만 아직도 명맥은 유지하고 있었다. 진천은 검후가 아수라마검 장일청의 전인이 되기 전에 영환문의 절기를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상승의 검공을 전수받기 시작한 다음에는 흑도 무리나 탐낼 제혼술 따위를 익힐 까닭이 없기 때문이었다.
제혼술은 초절정의 무력을 지녔지만 내공을 가지고 있지 않은 명에게 안성맞춤의 족쇄가 되었을 터였다. 검후는 명의 혼령을 제어함으로써 그녀를 뜻대로 부릴 수 있는 노예로 만든 것이었다.
전날 정맹에 갔을 때 진천은 집보각에서 사마 무림 악인들의 명단을 추리는 것 외에도 한 가지 작업을 했었다. 바로 술법과 술사들에 대한 조사였다.
미혼술(迷魂術)이니 섭혼술(攝魂術)이니 제혼술이니 하며 다양한 사술들이 존재했지만 원리는 대동소이했다. 기본적으로 희생자의 심혼을 불안정하게 만든 뒤 사이한 수법으로 그의 이지를 통제하고 조종하는 방식이었다.
진천이 집보각의 자료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명의 경우는 매우 지독한 편에 속했다. 주문을 따로 읊지 않고서도 복종을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은 그녀의 심령이 완전히 검후에게 장악되었다는 방증이었다. 검후가 제혼주(制魂呪)를 사용한다면 명은 아예 목내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될 것이었다.
일단 제혼술에 걸리면 빠져나오기가 불가능에 가깝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진천이 그 중 명에게 통하리라 판단한 비책은 유감스럽게도 하나뿐이었다. 다름 아닌 정면격돌이었다. 피시전자가 시전자의 명을 의지로써 거역하면 그를 옭아맸던 밧줄은 일시에 풀린다고 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쉬워 보이지만 말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진천이 읽은 잡서에 따르면 눈에 송곳을 갖다 댔을 때 스스로 얼굴을 앞으로 내밀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주저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라고도 했다.
진천은 보다 확실한 내용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집보각의 자료에서 본 술사들의 소재를 알아봐달라고 북운상단의 오재승에게 부탁했다. 그날 그가 오재승에게 건네준 쪽지에 적힌 여섯 개의 이름 중 다섯 명이 영환문의 술사들이었다.
오후에 차소영이 누군가 그를 찾아왔다고 전했을 때 진천은 그들 중 하나가 왔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방문자는 술사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환인이었다.
여하간 진천은 명의 일을 더 미루지 않기로 했다. 그에겐 느긋하게 술사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 심중에 담아두고 있던 계획을 실행한 것이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정신을 차린 명의 첫마디에 진천은 빙긋 웃었다.
진천이 두 손으로 명의 볼을 감쌌다.
“명이 용감한 사람이기 때문이오. 정말 감동받았소.”
진천의 칭찬에 명이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 시무룩해졌다.
“멋지게 시작했으니 마무리도 잘합시다.”
“한 번만 더 하면 될 것 같소.”
야무지게 말하는 명을 바라보며 진천은 내키지 않은 말을 해야 했다.
“다만 다음번은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해야 하오.”
명의 좁은 이마에 그늘이 졌다. 그의 대답을 짐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명은 검후를 보러 가야 하오. 그녀 앞에서 ‘닥쳐!’라고 호통을 치구려. 그러면 깨끗이 끝날 거요.”
“물론 내가 함께 할 거요. 내가 명을 믿듯이 나를 믿어주구려. 무슨 일이 있어도 명을 지켜주겠소.”
명이 진천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진천이 명의 머리를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그와 명이 서로의 약속을 지킬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지하연무장을 나온 진천은 권왕에게 낭보를 전하러 갔다가 그가 아직 깨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후원의 별채로 갔다.
검왕이 기거하는 자원옥(紫苑屋)에 이른 진천은 인기척을 내며 면담을 청했다. 검왕은 반응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 진천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일층의 침실과 별실들을 차례로 지나갔지만 예상대로 검왕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굳이 이층으로 올라가 나머지 방들을 살펴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진천은 자원옥을 나왔다.
진천은 고개를 들어 천공을 보았다. 큼지막한 보름달이 찬연한 월광을 뿌리고 있었다. 작별을 고하지도 않고 삼보장을 떠난 검왕은 달빛을 받으며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을 터였다.
진천은 시선을 내렸다. 검왕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의 만월만큼이나 명백했다. 진천은 암울했다. 장차 닥칠 환난에 대비하기에는 그에게 남은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