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22
제221화
진천은 다연실로 돌아갔다.
해결불가한 난제로 고민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는 게 나았다. 여량은 재개된 진천의 질문공세에 성심성의껏 답해주었으나 그 자신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진천은 끈질기고도 요령 있게 여량의 설명을 유도함으로써 그가 말로 표현하기 난감해하는 것들을 끄집어냈다.
문답은 밤새 지속되었다. 이따금 세평회의 친인들이 다연실 밖을 기웃거렸으나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에 금세 발길을 돌리곤 했다. 다연실로 들어와 진천과 여량의 대화에 끼려고 하는 이는 없었다. 진천의 태도가 너무나 진지해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노미현은 그럼에도 진천과 함께 있기를 바라는 명을 구슬려 그녀를 백화옥으로 데리고 갔다. 명은 자기보다 어린 노미현을 엄마처럼 따랐다.
기실 진천은 친인들의 배려가 아니더라도 다연실 외부의 상황에 신경 쓰지 않았을 터였다. 어느 순간부터 독후와 검왕에 관련된 문제도 잊고 여량과의 대화에 오롯이 몰두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여량이 풀어내는 환법의 실타래에서 그의 무영을 새로운 길로 이끌어 줄 실마리를 찾기를 바랐다. 만약 심상에 막연하게 피어오르는 선들을 구체화할 수만 있다면 고대 환문의 전설적인 비조들이 구사했다는 과벽술(過壁術)을 체현할 수 있을 듯싶었다. 그 신기는 단순히 벽을 통과하는 사이한 재주가 아니라 어떤 공격에도 몸을 상하지 않는 무적의 방어술로 탈바꿈할 것이었다.
진천은 화들짝 놀랐다.
몰아지경에 빠져있던 그를 깨운 것은 명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본 진천은 이미 날이 환하게 밝았음을 깨닫고는 소스라쳤다. 여량과 더불어 밤을 홀딱 새운 것이었다.
여량은 하룻밤 새 십 년은 늙어 보였다. 진천은 진이 빠진 노인을 보며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그가 묵상에 잠긴 동안 여량은 숨소리도 마음대로 내지 못하고 꼼짝없이 지켜만 보고 있었을 터였다. 어쩌면 한 시진 이상 그러고 있었을 지도 몰랐다.
“죄송합니다, 여 숙수. 제가 깜빡 딴 생각을 하고 있었나 봅니다.”
진천의 사과에 여량이 쩔쩔 맸다.
“아닙니다, 공자님. 더 하셔도 괜찮습니다.”
말과는 달리 여량의 얼굴엔 진천이 그만 고문을 끝내주기를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덕분에 많은 것을 베웠습니다. 정말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여 숙수.”
진천의 감사인사에 여량은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면서도 당금 천하 최고의 명사에게 치하를 받아 뿌듯한 모양이었다.
“미천한 제가 공자님께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다면 기쁘기 한량없는 일입니다.”
진천은 씁쓸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이 넉넉했다면 보탬 정도가 아니라 횡재였다고 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그에겐 오늘 잡은 단초를 궁구하고 체득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처소를 마련해 드릴 테니 푹 쉬시지요.”
여량은 뜻밖에도 진천의 권고를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이만 정맹으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진천은 여량의 속을 헤아렸다. 그는 삼보장에 머물면 지난밤의 고역을 되풀이할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 진천은 여량을 이해했다. 병약한 노인이 부담스러운 상대의 집요한 질문들에 답하며 밤을 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량을 달래 별채에 묵게 할 수도 있었지만 진천은 그가 바라는 대로 해주었다. 마당까지 나온 진천은 극구 마다하는 여량을 마차에 태워 손수 북운상단까지 몰고 갔다. 그러고는 오재승에게 부탁해 여량이 일신까지 편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두었다.
진천의 친절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눈물까지 흘리던 늙은 환인은 오재승이 내준 특급마차에 올랐다. 그와 작별한 진천은 오재승과 반 시진가량 밀담을 나눈 후 삼보장으로 돌아왔다.
청와옥에 든 진천은 이층의 방으로 올라갔다. 권왕이 그를 보자마자 물었다.
“어떻게 됐느냐, 아우야?”
진천은 좋은 소식부터 먼저 말했다.
“잘 됐습니다, 큰 형님. 명은 기꺼이 큰 형님의 가르침을 받겠답니다.”
권왕이 반색했다.
“소 형이 선선히 양보해 주더냐?”
진천은 쓰게 웃었다. 나쁜 소식을 밝힐 차례였다.
“제가 말씀드리기도 전에 먼저 명에게 검공 전수를 중단하시겠다고 했답니다.”
권왕이 일자 눈이 커졌다.
“뭐라? 어째서?”
“연유를 여쭤보려고 어젯밤에 별채를 찾았는데 그곳에 계시지 않더군요. 지금도 돌아오시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삼보장을 아주 떠나신 듯싶습니다.”
침상에서 일어설 것처럼 권왕이 상체를 들썩였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갑자기 왜?”
“잘 모르겠습니다.”
권왕은 그런 유의 대답을 용인하는 이가 아니었다.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어서 말해 보거라. 대체 왜 소 형이 느닷없이 여기를 떠난 게야?”
갈등하던 진천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마도 독후 어르신의 방문과 관련이 있을 듯합니다.”
“진진이 왜? 설마 그녀가 사마의 무리에 가담하도록 소 형을 꼬드겼으리라고 보는 건 아닐 테지, 아우야? 진진은 이번 전쟁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거니와 설령 그녀가 소 형에게 저들의 편으로 오라고 설득했다고 해도 그는 들을 사람이 아니다. 이번엔 네 추측이 틀린 게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큰 형님.”
“그럼 무어야? 진진이 소 형더러 어느 한편의 본거지에 있지 말고 자기랑 같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경이나 하자고……,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물과 기름의 사이라 할 둘이 그런 살가운 대화를 나눈다는 건 상상이 안 간다. 대체 뭐지? 내가 주저리주저리 떠들 것 없이 네 속에 든 걸 들어보자꾸나. 어서 털어 놓으려무나, 아우야.”
권왕의 재촉에도 진천은 뜸을 들였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검왕 어르신께선 독후 어르신으로부터 누군가의 근황을 전해 듣고는 삼보장을 떠났을 거라는 게 제 짐작입니다, 큰 형님.”
권왕의 일자 눈이 딱 붙었다.
“그 누군가가 누구더냐?”
의형의 음성에 도사린 불안감을 감지하며 진천은 즉답했다.
“무황입니다.”
권왕이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바로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고는 도로 누웠다. 진천은 그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아우야?”
걸걸한 권왕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진천은 동일한 대답을 반복하는 대신 에둘러갔다.
“독후 어르신은 삼 년 간 행적이 묘연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강호에서 모습을 감춘 동안 무황과 만났으리라고 봅니다. 어느 쪽이 먼저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무황이 먼저 연락을 취했을 공산이 클 것…….”
진천의 추정을 마저 듣지 않고 권왕이 끼어들었다.
“그가 살아있을 가능성을 어느 정도로 잡고 있느냐?”
“……거의 십 할이라고 봅니다.”
권왕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무거운 음성을 토해냈다.
“그렇다면 소 형은 그와 겨루기 위해 삼보장을 나간 게로구나?”
“그럴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언젠가 있을 무황과의 대결을 준비하기 위해 조용한 장소를 찾아가시지 않으셨나합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수련에 집중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네가 아무런 근거 없이 그런 판단을 내리지는 않았을 터. 그리 보는 이유를 알려다오, 아우야.”
잠시 망설인 진천은 독후가 헤어질 때 그에게 남겼던 수수께끼 같은 충고를 들려주었다. 그러고는 추론을 이었다.
“독후 어르신은 ‘조만간’이나 ‘머지않아’가 아니라 ‘훗날’이라고 하셨습니다. 시기를 특정하기 어려운 표현이긴 하지만 어감 상 한두 달 후는 아님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무황은 근시일 내에 검왕 어르신과 싸울 수 있는 상태는 아닐 듯합니다. 그가 나오려면 일 년, 혹은 그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싶습니다.”
“혹시 그는 목숨은 붙어있으되 무력을 회복하지 못한 건 아닐까, 아우야? 아니면 회복하더라도 이전 수준이던가?”
진천은 권왕의 질문에 담긴 기대감을 배신해야 했다.
“독후 어르신은 전날 벽력도문에서 제가 드러낸 무력을 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가항력의 마력을 지닌 괴물’ 운운하신 것은 돌아올 무황의 무력이 저보다 월등하다는 뜻입니다. 과장된 언사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확인하기 전까진 사실로 간주해야 할 듯싶습니다.”
권왕은 다시 긴 침묵에 잠겼다.
한참 후에야 권왕이 오므라든 입술을 벌렸다.
“실로 큰일이구나. 그가 정말로 항거불능의 괴물이 되어서 나타난다면 누가 있어 그를 막을 수 있겠느냐? 나는 이 지경이고 너도…….”
말끝을 흐리는 권왕을 보며 진천은 일부러 밝게 웃었다.
“무왕들이 있지 않습니까? 검왕 어르신이야 일대일의 승부를 고집하시겠지만 다른 무왕들은 무황의 무력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음을 알게 되면 필히 연수할 것입니다. 무황이 천무대제나 천마 급으로 강해져서 돌아오지 않는 한 능히 그를 대적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진진이 그의 편이지 않으냐? 게다가 막가는 틀림없이 그의 밑으로 기어들어갈 게야.”
“독후 어르신은 방관의 태도를 견지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장왕에겐 그럴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권왕은 진천의 말귀를 알아들었다.
진천은 방을 나왔다.
극도로 흥분한 탓에 내상이 악화된 권왕이 안정을 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끝까지 ‘호야곡 비사’의 이면에 관한 그의 ‘상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독후가 그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정한 약속을 의식해서가 아니었다. 진천은 진상을 알게 된 의형이 받게 될 충격을 염려했다.
전날의 대화에서 본인은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지만, 진천은 권왕도 한 때 독후에게 연심을 품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의 농간에 놀아나 진심으로 존경했던 이를 제거하는 데 주도적으로 나섰음을 알게 된다면 권왕은 심마에 들지도 몰랐다. 이는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진천은 권왕이 애당초 파악했던 무황의 인물상이 그의 진면목에 가까우리라 보았다. 무황은 천하를 일통해 기득권자들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펼쳐 보일 거라는 포부를 밝힘으로써 권왕을 매료시켰다. 그 새로운 세상의 내용이 무엇이건 민초들의 몰살은 아닐 터였다.
진천은 무황의 도래와 무관하게 심중에 세워두었던 작전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만약 무황이 천무대제에 준하는 무위를 가지고 돌아온다면 모든 무왕이 합세해도 역불급이었다. 그렇지 않고 두세 명의 무왕들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사마의 수장들을 제거해도 상관없을 터였다.
세평회를 소집한 진천은 검왕의 출장(出莊)과 무황의 출현가능성에 대해 알렸다.
친인들이 일제히 술렁거렸다. 무황이라니. 이미 오십 년 전에 호야곡에서 심복들의 합공에 쓰러진 비운의 무존이 아닌가. 난데없이 그가 왜 이 시국에 튀어나온단 말인가.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졌지만 진천도 상세한 정보를 가진 게 아니었기에 답변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세평회 인사들은 당금 무림에서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공유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진천은 검왕이 삼보장을 떠난 사실을 외부에 노출하지 않도록 친인들에게 신신당부했다. 검왕의 부재를 모르는 한 적들은 삼보장을 노리기 어려울 터였다.
몇 가지 사안을 더 논의하고 회의를 끝낸 진천은 전격적으로 출정을 선언했다. 그의 복안을 들은 중인이 다시 웅성거렸다. 진천은 명과 소중걸에게 동행을 청했다. 중인의 예상과 달리 명은 신이 난 모습이 아니라 어인 일인지 비장한 태도였다. 소중걸은 기꺼이 진천의 청에 응했다.
삼인의 출정자들은 경신으로 삼보장을 빠져나가지 않고 고량이 모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네 마리 말이 이끄는 낡은 마차는 해질녘에 주안을 벗어나 연산에 이르렀다.
어제 저녁 진천이 독후를 따라잡았던 곳이었다. 연산에서 마차를 내린 진천 등은 고량과 작별을 고하고 남동 방면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들의 첫 번째 목적지는 주안에서 팔백여 리 떨어진 오발곡(烏髮谷)이었다. 짧지 않은 거리였으나 일행 중 가장 느린 소중걸의 경공으로도 서너 시진이면 당도할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