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23
제222화
오발곡은 이름 그대로 까마귀 깃털처럼 새카만 흑암으로 이루어진 기다란 협곡이었다.
골짜기 입구에서 경신을 멈춘 진천은 그곳에 명과 소중걸을 대기시키고 홀로 안으로 들어갔다. 사십여 장쯤 나아가자 인기척이 기감에 잡혔다. 진천은 기운을 갈무리한 채 빠른 속도로 진입했다.
얼마 후 기이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진천은 암흑으로 물든 천공에서 뇌전처럼 내리꽂히는 물체들이 새 떼임을 알았다.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무장한 수십 마리의 맹금류가 심야의 불청객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절멸삭을 뽑아 휘두르기만 하면 매들을 전멸시킬 수 있었으나 진천은 반격을 자제하고 회피에 전념했다. 그러면서 절곡 위로 비상했다. 매 떼가 그를 쫓았다. 마치 병졸들을 거느린 장수처럼 매들을 뒤에 달고 암벽을 날아오른 진천은 단숨에 낭떠러지 상부에 이르렀다. 거기엔 동굴이 있었고 동굴 앞엔 머리카락이 사자갈기처럼 뻗친 산발괴인이 서있었다.
진천의 도래를 인지한 산발괴인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진천은 그가 돌아서서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그를 낚아챘다. 매들은 산발괴인을 붙잡은 진천을 어쩌지 못하고 기성을 뿜어내며 공중을 배회했다. 진천이 산발괴인의 귀에 속삭였다.
“당신을 해치러 온 게 아니오. 일단 새들을 진정시키구려.”
진천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에게 저항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산발괴인이 순순히 지시에 따랐다. 그의 입에서 요란한 휘파람소리가 빠져나가자 사납게 허공을 휘돌던 매들이 절벽의 튀어나온 암석에 얌전히 내려앉았다. 진천은 산발괴인을 놓아주었다.
“귀하는 뉘시오?”
“나는 진천이오.”
산발괴인이 어리둥절해 하는 기색이자 진천이 덧붙였다.
“강호에서는 나를 절대천룡이라고 부르오. 얼마 전까지는 하남신룡이라고…….”
진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악성을 내지르며 산발괴인이 넙죽 엎드렸다.
“만수문(萬獸門)의 정(丁) 모가 절대천룡을 뵙습니다요.”
진천의 처진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만수문의 괴짜가 세상에 퍼진지 채 열흘도 지나지 않은 그의 새 별호를 알고 있다니 의외였다. 인적 없는 험지에 틀어박혀 있지만 어떻게든 바깥세상 소식을 접하는 모양이었다.
진천은 산발괴인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백조원(百鳥院)의 이단아이자 만수문의 봉공인 조응괴(操鷹怪) 정충(丁沖)이었다.
정충은 맹금류에 관한 한 중원 최고의 전문가로 자타가 인정하는 괴인이었다. 정확한 나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략 사십대 중반에서 오십대 초반으로 추정되었다. 원래는 백조원 출신이었으나 그가 기르는 매들이 다른 새들을 잡아먹는 등 온갖 사고를 일으키는 바람에 이십 년 전 쫓겨나듯 문파를 떠나야 했다.
만수문은 소년시절부터 그들의 세계에서는 명성을 떨치고 있던 정충을 받아들여 봉공으로 삼았다. 파격적인 대우였으나 정충은 만수문의 기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사사건건 충돌하는 바람에 밖으로만 떠돌았다.
진천은 거처가 자주 바뀌는 정충의 소재를 북운상단의 오재승을 통해 알아냈다. 전날 그가 오재승에게 건네준 쪽지에 적힌 명단 중 다섯 사람이 영환문의 술사들이었고 나머지 하나가 정충이었다.
진천은 정충을 일으켰다. 진천의 손길을 뿌리칠 수 없었기에 일어서긴 했지만 정충은 반으로 접은 허리를 펴지 못했다. 소매에서 갓난아이 주먹만 한 금덩이를 꺼내며 진천이 용건을 밝혔다.
“부탁이 있소.”
진천의 손에 든 금덩이를 본 정충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는 금이라면 사족을 쓰지 못하는 위인이었다. 재욕(財慾) 때문이 아니었다. 매일 송아지 한 마리 분량의 고기를 먹어치우는 매들을 건사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먹잇감을 찾아 수시로 거처를 옮겨 다니지만 한계가 자명했다.
정충은 매들을 먹이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광인으로도 악명을 떨쳤다. 그의 매들이 천민들의 부락을 습격해 인육을 취했다는 흉흉한 괴담도 나돌았다. 진천이 정충에게 호감을 느끼기 어려운 이유였다.
“뭐든지 하명하십시오. 이 정 모,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요.”
진천은 단도직입했다.
“독각응(獨角鷹)을 빌리고 싶소.”
정충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진천을 직시하지 못하고 그의 눈알이 좌우로 돌아갔다.
“죄송하지만 그 아이는 빌려드릴 수 없는 놈입니다요. 제가 따라가야만 말을 들을 터이기 때문입니다요.”
“좋소. 같이 갑시다.”
정충이 머뭇거렸다.
“죄송하오나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그놈만 데리고 떠나면 다른 아이들이 다 날아가 버릴 테니 가기 전에 단속을 해 두고 싶습니다요.”
“얼마나 걸리겠소?”
“반 시진이면 충분합니다요.”
진천이 바로 응낙을 하지 않자 정충이 잽싸게 말을 바꿨다.
“이 각만 주십시오. 서두르면 그 안에 끝낼 수 있습니다요.”
“알았소. 그렇게 하오.”
정충이 바로 작업에 착수하지 않고 안절부절못했다.
“또 무슨 문제가 있소?”
우물쭈물하던 정충이 용기를 냈다.
“죄송하지만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있을까요? 열흘 이상이면…….”
말끝을 얼버무리는 정충을 보며 진천은 고소를 지었다.
“지금 시한을 정할 순 없소. 하지만 닷새 정도면 될 듯싶소.”
정충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 그렇다면 아무 문제없습니다요.”
정충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진천의 다음 말 때문이었다.
“한 가지 더 알아두어야 할 일이 있소. 짐작컨대 일이 끝나는 장소는 여기에서 족히 사천 리는 떨어져 있을 거요. 어쩌면 그보다 더 멀어질지도 모르오.”
대번에 정충의 안색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면, 그러면…….”
말을 잇지 못하는 정충을 바라보며 진천은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다. 목전의 괴인에겐 사나운 매들이 귀여운 자식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일이 잘 풀리면 열흘 안에 이리로 돌아올 수 있는 지점까지 데려다 주겠소.”
정충으로서는 진천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오십 마리 남짓한 매들을 멧돼지 사체 세 구가 든 널찍한 동혈 안에 몰아넣은 정충이 한 마리 매만 어깨에 얹고 나와서는 입구를 닫았다. 정수리에 뿔 같은 혹이 솟아올라서 독각응이라고 불리는 매였다.
독각응은 추적에 있어 흑미백서(黑尾白鼠)와 쌍벽을 이루는 영물이었다. 꼬리만 까만 흰 쥐는 목표물이 살아있는 한 지상 끝까지 쫓을 수 있지만 속도엔 아쉬움이 상당한데 반해 독각응은 천공을 나는 새답게 그 방면으로 특장점이 있었다. 초절정고수의 경신조차 굼벵이로 만드는 속력을 뽐냈기에 일단 독각응에게 걸리면 달아날 방도가 없다고 보아야 했다.
진천은 정충을 안아들고 협곡을 빠져나왔다. 정충에게서 떨어진 독각응은 허공으로 날아올라 진천을 뒤쫓았다.
오발곡 입구에서 일행과 합류한 진천은 남행을 재개했다. 다음 행선지는 벽력도문이 있는 천지인봉이었다.
소중걸의 경공에 맞춰야했기에 엿새 전 권왕, 장왕과 함께 출정했을 때보다 시간이 두 배 이상 소요되었다. 삼보장을 출발한 지 나흘 후 새벽에야 천지인봉 근처의 삼나무 숲에 이른 진천은 소중걸과 명을 그곳에 두고 정충을 안고는 천지인봉을 향해 달렸다.
거대한 삼각기둥이 가까워지자 진천은 긴장했다. 예상이 어긋나 남천도왕과 장왕이 벽력도문에 도사리고 있다면 난감해질 터였다. 헛걸음이 문제가 아니라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천지인봉 상공을 선회하던 독각응은 벽력도문을 향해 하강하지 않고 동쪽으로 날아갔다. 진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장왕은 벽력도문에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독각응을 따라 내달았다. 놀라운 안력과 경이로운 후각을 겸비한 영물은 천일취(千日醉)의 냄새를 쫓고 있었다. 천일취는 주정(酒精)이었다. 진천은 장왕이 삼보장에 든 이후 그가 즐기는 요리에 천일취를 넣도록 조치를 취해두었다. 몸에 해가 없거니와 요리의 풍미를 돋우는 향신료로도 쓰이기에 장왕은 천일취의 섭취를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진천이 장왕의 내부에 천일취를 심어놓은 것은 만일의 사태를 위한 대비였다. 통제 불능의 변수로 인해 그가 등을 돌리는 경우 진천은 최우선적으로 그를 제거하기로 작심했다. 전날 열락궁에서 장왕에게 가했던 협박이 엄포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적이 되면 장왕은 누구보다 다대한 피해를 끼칠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독각응을 쫓던 진천은 이삼백 리가량 달린 후 경신을 멈추었다. 더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장왕은 그가 예측한 장소에 가 있을 것이었다.
진천의 요구에 따라 그의 팔에 안겨있던 정충이 휘파람으로 독각응을 불러들였다. 정충에게서 쇠고기 한 점을 얻은 독각응이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천일취의 냄새를 쫓는 대신 방향을 바꿔 달리기 시작한 진천을 따라갔다.
진천은 정충을 오발곡에서 오륙백 리 떨어진 사야평까지 데려다주었다. 소싯적부터 천하를 떠돌아다녔던 정충은 지리에 밝았다. 부지런히 걸으면 사나흘이면 그의 매들이 기다리는 검은 골짜기에 당도할 수 있을 터였다.
진천이 작별을 고하자 정충은 바닥에 오체투지하고서 예를 표했다.
그는 독각응의 추적을 멈추게 하고 진천이 발을 돌리고서야 그의 진정한 능력을 알게 되었다. 천지인봉에 가기까지의 경신은 일행의 장단에 맞춰준 장난이나 마찬가지였다. 온 무림이 일 년만 지나면 하늘같은 팔대무왕을 발아래 두는 천하제일인이 될 거라고 떠들어대는 젊은 천룡은 가히 신인(神人)이었다.
진천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경외감을 드러내는 정충에게 앞으로는 매들을 부려 사람들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당부했다.
정충은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마를 땅바닥에 박은 상태로 그를 배웅하기를 고집하는 정충을 내버려두고 진천은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제야 고개를 든 정충이 부리나케 진천의 뒷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그가 인간의 형상을 한 신으로 여기게 된 천룡은 이미 까마득히 멀어진 후였다.
진천은 명과 소중걸이 기다리는 삼림으로 돌아왔다. 그가 두 사람이 은신한 수풀로 들어서자 명이 달려 나왔다.
진천이 명을 달랬다.
“말했잖소? 이번 여정은 명과 함께 시작해서 명과 함께 끝낼 거라고.”
뒤늦게 나온 소중걸이 보다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됐나?”
“장왕은 벽력도문에 없소. 예상대로 그곳에 간 듯하오.”
“남천도왕은?”
“모르오. 이제부터 확인할 참이오.”
“나도 같이 간다.”
소중걸을 물끄러미 바라본 진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하지만 벽력도문엔 나 혼자 들어가오. 소 형과 명은 내가 신호할 때까지는 모습을 드러내어서는 안 되오.”
진천의 양보를 받아낸 소중걸은 더 욕심을 부리지 않고 물러섰다.
잠시 후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오자 진천 등은 천지인봉으로 접근했다. 소리 없이 깎아지른 절벽에 이른 세 사람은 이십이삼 장 높이의 수직암벽을 타고 올랐다. 천지인봉 서쪽 끄트머리에 도달한 진천은 소중걸과 명을 수풀에 들게 한 후 벽력도문으로 나아갔다. 도처에 깔린 경비무사들을 눈뜬 장님으로 만들고 수월하게 벽력도문 내로 잠입한 진천은 외곽의 담장을 타고 돌았다.
지나는 길에 지난번에 남천도왕 등과 격전을 치렀던 현천각이 보였다. 이동을 멈추고 현천각 양편에 호위병처럼 늘어선 석탑들 뒤편에 몸을 감춘 진천은 기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거리가 멀었지만 남천도왕이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의 존재를 포착할 수 있을 터였다.
반각 정도 초집중한 진천은 남천도왕이 현천각에 들어있지 않을 거라고 결론 내렸다. 확실하게 알려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할 터이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진천은 다시 화연을 발해 신형을 지우며 현천각에서 멀어졌다. 그가 가고자 하는 곳은 현천각이 아니라 옥청각(玉淸閣)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