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26
제225화
진천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장왕의 장공을 가르며 수직 하강했다.
십이 성의 공력을 담은 절멸도가 거꾸로 솟구치는 폭포수 마냥 쏟아지는 장공으로부터 그의 동체를 보호해주었다. 진천이 예상과 달리 장공을 빗겨내지 않고 곧장 떨어져 내리자 혼비백산한 장왕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진천은 마구잡이로 장강(掌剛)을 퍼붓는 장왕의 두부(頭部)를 절멸도로 내리찍었다. 일체의 군더더기가 배제된 일도양단의 한 수였다.
진천의 박력이 통했다. 장왕은 공격을 멈추고 모든 내력을 호신강기로 돌리며 황급히 신법을 발했다. 그는 시중잡배가 아니었기에 진천의 절멸참에 몸이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두 쪽으로 갈리는 참사는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천의 전력이 깃든 양단에 왼 어깨를 내주고 말았다.
장왕의 좌수가 떨어져나간 부위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땅바닥에 발을 딛기 직전 진천은 다시 한번 절멸도를 휘둘렀다. 사선으로 날아간 백색강기는 장왕의 허리를 자르는 대신 다리를 절단했다. 진천이 손속에 사정을 두어서가 아니라 장왕이 반사적으로 피해냈기 때문이었다.
장왕이 울부짖었다. 아직 오른팔을 쓸 수 있었으나 그는 장공을 발해 진천을 저지할 정신머리가 없었다. 진천은 육신이 아니라 정신의 문제로 전투불능에 처한 장왕에게 가차 없이 후속타를 가했다. 그의 절멸도가 장왕의 우수마저 베어버리고는 비계가 출렁이는 복부에 꽂혔다. 이로써 장왕은 사지가 떨어지고 단전마저 깨진 폐인이 되었다.
그야말로 눈 한 번 깜박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이미 경복전 내로 진입했던 사벌의 고수들은 목전의 광경에 아연실색했다. 팔대무왕의 일인이 단 몇 초 만에 처참하게 깨져 거대한 비곗덩어리로 뒹구는 모습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장왕은 저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위인이 아니었다.
기실 요 며칠 간 장왕은 사벌 최대의 화젯거리였다. 그가 마련을 떠나 전격적으로 사벌에 가담해서가 아니라 최근 권왕과의 대결에서 두 번이나 우위를 점했다고 자랑스레 떠벌렸기 때문이었다.
장왕은 반신반의하는 사벌의 강호들에게 무력으로써 증명해보였다. 그의 우장(右掌)에서 발출된 장공에 삼층 전각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자 사파 무림의 지배자들은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남을 띄우는 법이 없는 남천도왕이 장왕의 위업(!)의 목격자임을 자처함으로써 사벌 사령(邪領)들의 의구심은 완전히 풀렸다. 그 탓에 장왕은 사벌 안에서 팔대무왕의 끝자리가 아니라 선두권에 위치한 무존으로 승격되었다. 불과 이틀 전의 일이었다.
그런 장왕이 절대천룡임에 분명한 젊은 무인에 의해 한 순간에 팔다리를 잃고 몸뚱이만 남은 퇴물로 화해버렸으니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장왕을 처치한 진천은 숨 돌릴 틈도 없이 그에게 날아드는 강선들을 피해내야 했다. 남천도왕이 쏘아낸 십전섬뢰였다.
열 줄기의 빛살 중 세 개가 진천의 머리와 목, 그리고 겨드랑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신속하게 대응한 덕분에 참화를 면한 진천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촌각의 백분지일만 늦었더라도 한 군데는 뚫렸을 것이었다.
진천은 긴장했다. 장왕을 쓰러뜨리기 위해 모험을 했지만 부상은 어떻게든 피해야 했다. 심장에 남아있는 좁쌀만 한 독정은 그의 마지막 생명줄이었다. 그마저 환생결에 쓰게 된다면 회생은커녕 바로 저승으로 직행하게 될 터였다.
극상의 무영으로 남천도왕의 공세를 견뎌낸 진천은 도주하지 않고 그에게 쇄도하며 맞불을 놓았다. 진천의 좌수에서 뻗어 나온 백색의 강기가 남천도왕의 칼이 일으킨 도강(刀剛)과 충돌했다. 그 순간 남천도왕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의 대도가 진천의 절멸도에 밀린 것이었다.
작은 차이였지만 남천도왕이 받은 충격은 컸다. 직선적인 파괴력만큼은 자신의 칼이 팔대무왕 중 으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상대는 장왕이라는 강적과 격전을 치른 직후였기에 일시지간 전력을 쏟아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전진의 효를 가졌던 정면 격돌에서 약세를 보였으니 남천도왕의 입장에서는 암담한 일이었다.
남천도왕은 등골이 오싹했다. 목전의 괴물은 아흐레 전 벽력도문에 쳐들어왔을 때보다 더 강해졌음에 틀림없었다. 만약 일대일의 승부를 고집한다면 장왕의 꼴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아니, 필히 그리 될 것이었다.
체면 따위를 차리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기에 남천도왕은 진천과 일수를 주고받자마자 그의 뒤에서 날아드는 사벌의 맹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자를 죽여라!”
진천의 좌우에서 두 명의 검호가 달려들었다. 진천은 남천도왕에게 가세한 그들 남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마에서 목까지 이어진 기다란 흉터를 가진 칠십대 후반의 노인은 청해검군(靑海劍君) 장수영(張秀英)일 터였다. 그는 사파칠문의 하나인 청검문(靑劍門)의 당대문주였다. 그의 파란 검신에서 솟아난 검강은 진천으로서도 경시하기 어려운 예기가 서려있었다.
전투에 어울리지 않은 화려한 궁장을 걸친 여인은 중년으로 보였지만 실제 나이는 팔십에 육박할 터였다. 그녀가 나찰검봉(羅刹劍鳳) 진사혜(秦思慧)일 터이기 때문이었다. 나찰검봉은 역시 사파칠문에 속하는 귀검문(鬼劍門)의 일인자였다. 낫처럼 끝이 휘어진 그녀의 기형검엔 소름 끼치는 귀기가 일렁였다.
남천도왕의 도강을 절멸도로 쳐내면서 진천은 사파 최강 검호들의 합공은 무영으로 빗겨내었다. 그가 자신의 검강에 걸렸다고 확신했던 청해검군은 진천의 신형이 이 장 떨어진 곳에 나타나자 눈을 부릅떴다. 절대신룡의 신법이 하늘에 닿았다는 풍문은 과장되거나 와전된 것이 아니었다. 나찰검봉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영으로써 청해검군과 나찰검봉을 당혹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진천은 더 이상의 공방은 무리임을 깨달았다. 남천도왕만이라면 능히 상대할 수 있지만 초절정 상(上)의 무위를 지닌 강자들까지 한꺼번에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난전 중 다리에 검상이라도 입는 날에는 도주도 어려워질 터였다.
발을 뺄 결심을 했으나 진천은 후퇴하는 대신 전진했다.
후방에서 날아들 공격을 무마시킬 거리를 확보하려면 먼저 적들을 밀어내야 했다. 진천의 좌수에서 빠져나온 하얀 비수가 연달아 날아오자 청해검군과 나찰검봉이 다급히 검막을 펼쳤다. 진천은 그들을 내버려두고 남천도왕에게 돌진했다.
남천도왕은 진천의 예상대로 방어에 주력했다. 절멸도로 남천도왕에게서 십 보의 양보를 받아낸 진천은 계획했던 대로 비환을 발해 전권에서 몸을 빼려 했다. 그러나 바로 뜻을 접어야 했다.
그를 방해한 이는 청해검군이나 나찰검봉이 아니었다. 진천의 퇴로를 막은 것은 흡사 마왕의 팔선조강을 연상케 하는 여덟 줄기의 강선이었다.
진천은 보지 않고도 강선을 쏘아낸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물경 사십 년이나 쾌부문(快斧門)의 최강자로 군림해 온 팔극부(八極斧) 도관일(都冠溢)일 터였다. 아흔이 넘어 전성기가 지났음에도 일선에서 물러나지 않고 노욕을 부린다는 팔극부는 그의 도끼가 왜 강호에서 가장 위험한 무기로 정평이 났는지를 진천에게 여실히 증명했다.
하마터면 목을 뜯길 뻔했던 진천은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 만약 팔극부가 단숨에 대어를 낚을 욕심으로 강선들을 목에 집중시키지 않고 분산시켰더라면 한두 개는 진천의 몸통에 찍혔을 지도 몰랐다.
위급지경을 넘겼지만 진천은 좌측의 팔극부에게 반격할 겨를이 없었다. 남천도왕이 공격을 재개한 데다 거대한 그림자가 엄청난 위압감을 과시하며 뒤에서 그를 덮쳐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거인이었다. 팔 척에 달하는 장신에 체구도 가린만큼이나 컸다.
거인은 사벌의 이인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개산철권(開山鐵拳) 맹찬(盟燦)이었다. 개산철권은 벽력도문과 더불어 사파 무림 최강을 다투는 철권문(鐵拳門)의 주인이기도 했다.
개산철권의 등장은 가뜩이나 불리한 판세를 비세로 전환시킬 게 뻔했다. 하지만 진천에게도 비장의 패가 있었다. 명이었다.
산사태인 양 진천을 덮쳐오던 개산철권은 공중에서 방향을 바꿔 그에게 화살처럼 날아오는 자그마한 인영을 상대해야 했다. 거인의 주먹과 작은 여인의 앙증맞은 손이 맞부딪쳤다.
“커헉!”
“엇!”
두 개의 경악성이 터지며 개산철권과 명이 동시에 튕겨나갔다.
개산철권의 눈이 튀어나올 듯했다. 팔과 어깨에 전해지는 통증은 쥐방울만한 계집이 그의 하수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개산철권은 괴소녀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절대신룡과 어울려 다닌다는 검후의 제자임에 분명했다. 안구가 없다는 너무나도 뚜렷한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산철권은 물론이고 청해검군과 나찰검봉, 그리고 현장으로 몰려오다 기변을 목격한 사벌 고수들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골이 송연해졌다.
절대신룡도 상궤를 벗어난 인물이지만 검후의 후인도 그에 못지않은 괴물이었다. 겨우 열 살 어림으로 보이는 소녀가 팔대무왕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절대권사(絶對拳士)와 평수를 이루다니. 꿈이라고 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가당찮은 환상이었다.
그러나 무림을 울리는 초강자들이 뿜어내는 막대한 기운은 경복전 경내에서 벌어진 광경이 엄연한 현실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거짓말 같은 기경을 진실로 받아들여야 했다.
거인과의 격돌에서 이득을 보지 못한 명은 재차 그에게 짓쳐들었다.
충격을 추스를 새도 없이 개산철권은 맹렬하게 달려드는 어린 소녀에게 우권(右拳)을 뻗었다. 무지막지한 경력을 실은 그의 권강(拳剛)이 삐쩍 마른 소녀의 가슴팍을 강타하자 승리를 확신했던 개산철권의 입에서 비명 같은 기성이 터져 나왔다. 몸이 으깨졌어야 할 소녀가 코앞에 나타나 수도(手刀)를 그의 복부에 찔러왔기 때문이었다.
명의 손끝이 개산철권이 두른 호신강기를 깨고 그의 동체에 침범했다. 그러나 명은 단전까지 손을 쑤셔 넣지는 못했다. 수막만한 개산철권의 주먹이 그녀의 머리를 내리친 탓이었다. 두부가 박살나지는 않았으나 명은 반신이 땅에 박혔다. 그녀가 몸을 빼내려는 찰나 두 줄기의 시퍼런 강기가 그녀의 목과 왼 어깨를 갈랐다.
청해검군과 나찰검봉이 쏘아 낸 검강은 명에게 중상을 입혔으나 그녀의 목을 떨구거나 팔을 잘라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든 팔극부든, 혹은 개산철권이든 한 번만 가일수를 하면 어린 괴물을 염왕에게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진천은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지금까지의 전개는 예상했던 범주 안에 있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어떻게든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터였다.
관건은 남천도왕이었다. 그를 물릴 수만 있다면 사벌의 강호들을 일시에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개산철권이 장내에 도착한 순간, 그리고 명이 그가 사전에 주었던 지시에 따라 움직인 순간 진천은 최후의 노림수를 결행했다. 또 다른 초절정 최상의 고수들인 경천귀수(驚天鬼手) 사중득(史重得)이나 금면수라(金面修羅) 조완(趙完)이 경복전에 이르기 전에 명을 데리고 탈출해야 했다.
각각 두 자루씩의 절멸비를 날려 사파 무림을 대표하는 두 검호와 팔극부를 견제한 진천은 남천도왕에게 쇄도했다. 그의 바람대로 남천도왕이 비기를 꺼내들었다. 진천은 남천도왕이 도강의 태풍에 섞어서 보낸 격격쇄를 아슬아슬하게 흘려내고는 그에게 바짝 붙었다. 남천도왕의 이 장 이내로 파고든 진천의 절멸도가 양단을 발할 찰나 남천도왕의 대도가 산산조각 나며 파편들이 진천에게로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대웅의 것과는 비교불과의 위력을 지닌 파도천망이었다.
진천은 근거리에서 폭사된 수백 개의 도편(刀片)을 연기처럼 통과했다. 칼 조각마다 강기가 담겨 있었기에 하나만 적중당해도 치명상을 입을 터였지만 진천은 피륙의 상처만 입었을 뿐이었다. 남천도왕의 수를 읽고 미리 대비한 덕분이었다.
진천이 멀쩡히 눈앞에 나타나자 혼비백산한 남천도왕은 위신도 팽개치고 달아났다. 진천의 좌수에서 뻗어 나온 강기의 밧줄이 그의 발목을 걸었으나 호신강기만 깨뜨렸을 뿐 낚아채지는 못했다. 절멸삭을 회수한 진천은 남천도왕을 쫓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명의 모습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