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27
제226화
명에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개산철권이었다.
복부를 뚫린 고통을 참으며 다시 주먹을 든 개산철권이 허리까지 땅에 박힌 명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그러나 그는 그의 주먹보다 작은 그녀의 머리통을 박살내지 못했다. 대신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새된 비명을 토해내며 뒤로 휘청거렸다. 치켜든 명의 손날이 그의 주먹을 비수처럼 쑤시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방어와 공격을 겸한 한 수로 이득을 보았지만 명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아직 땅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탓에 상체를 최대한 비틀었음에도 팔극부가 쏘아낸 여덟 줄기의 강선 중 세 개를 허용한 명의 입술에서 뾰족한 기성이 터졌다.
명에게 치명상을 입혔지만 팔극부의 공격 역시 청해검군과 나찰검봉의 검강들처럼 그녀를 절명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명은 강선이 집중된 우견(右肩)이 너덜너덜해졌지만 잽싸게 땅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목전의 개산철권에게 달라붙었다.
귀신을 본 듯 혼비백산한 개산철권이 주먹을 휘둘러 그녀를 떨쳐냈다. 그녀와 한 덩어리가 되면 동료들이 손을 쓰기 어려워질 것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의 안위를 고려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합공을 가할 지도 몰랐다. 개산철권의 입장에서는 둘 다 바람직한 전개가 아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어린 괴물을 밀어내는 데 성공한 개산철권은 그녀의 작은 동체에 동료들의 맹공이 쏟아지기를 기대했다. 이번에야말로 괴물은 즉사를 면치 못할 터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개산철권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언가 섬뜩한 느낌이 엄습하더니 그의 양 손목에서 기이한 통증이 올라왔다. 부지불식간에 뒤로 몸을 누인 덕분에 단전에 빛살이 꽂히는 참사는 모면했으나 생명이나 다름없는 주먹들을 잃었음을 직감하고는 개산철권의 눈이 뒤집혔다.
진천이 날린 절멸비는 여섯 자루였다.
세 자루는 명을 덮치기 직전이었던 두 검호와 팔극부를 겨냥한 것이었고, 나머지 세 자루는 명의 코앞에 있는 개산철권에게 쏘아 낸 것이었다. 명을 구하기 위한 진천의 응급조치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
청해검군과 나찰검봉은 허겁지겁 빛살의 속도로 날아오는 백광을 피했다. 진천과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웠던 팔극부는 회피할 여유가 없었기에 도끼를 들어 막아냈다. 절멸비에 담긴 경력을 이기지 못한 팔극부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명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던 개산철권은 진천의 기습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두 개의 절멸비에 팔목이 적중되고 말았다. 진천은 그의 무공마저 거두고 싶었으나 명의 안전이 우선이었기에 욕심을 버렸다.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명을 안아든 진천이 허공으로 비상했다. 남천도왕이 악다구니를 썼다.
“쫓아라! 죽여라!”
그러나 그의 명을 따르는 이는 나찰검봉 밖에 없었다. 냉철하게 판단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진천을 추격했던 나찰검봉은 공중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진천의 좌수에서 발출된 여섯 자루의 절멸비를 감당치 못하고 오른팔과 왼 다리에 각각 하나씩 얻어맞았기 때문이었다. 한순간에 우수와 좌족이 절단된 나찰검봉이 끔찍한 괴성을 질러댔다.
이미 경복전에 이르렀으나 감히 싸움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사벌의 고수들은 망연자실했다. 목전의 상황은 도무지 납득불가였다.
사파 무림의 본산이 단 두 명의 침입자에 의해 유린당한 형국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사벌에는 팔대무왕 중 둘이나 들어있었거늘. 조만간 있을 정맹 침공을 앞두고 사파칠문의 우두머리들을 포함한 일흔두 명의 사령(邪領)들이 총집결한 상태였거늘.
더 이상 보탤 수 없으리만치 막강한 전력이 두 명, 아니 사실상 한 명의 적에 의해 무너진 꼴이었다. 이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기사(奇事)였다.
절대천룡은 단독으로 장왕을 사지가 잘린 거대한 살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사벌의 무인들은 이틀 전 자신이 권왕을 이겼다고 으스대며 개양각(開陽閣)을 장공으로 날려버리던 장왕의 가공할 무력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절대지경의 무존이 변변한 저항도 못해 보고 묵사발이 난 모습은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장왕만이 아니었다. 물경 사십 년 간이나 사파 무림의 지존으로 군림해 온 남천도왕 역시 필살의 수법인 파도천망까지 꺼내들고도 절대천룡을 막아내지 못했다. 만약 절대천룡이 검후의 제자를 구하기 위해 몸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남천도왕도 장왕과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었을 지도 몰랐다.
사벌 고수들의 심경이 암담함으로 물들었다. 개산철권과 나찰검봉에게 일어난 참극은 차라리 사소한 사안으로 여겨졌다. 무왕들조차 막아내지 못하는 천룡을 어찌 대적한단 말인가.
설사 남천도왕이 호언장담한 대로 마련과 연합한다고 하더라도 승산은 희박했다. 수만 많으면 뭐하는가. 적들에겐 권왕과 북천도왕이 있었다. 검왕도 한통속일지도 몰랐다.
설령 삼 년이 넘도록 행방이 묘연한 독후가 돌아와 사마 연합군에 힘을 실어준다고 해도 적진에 절대천룡이 버티고 있는 한 역불급이었다. 검후와 월교가 한 편이 되어야만 균형을 맞출 수 있을 터인데 그녀가 그럴 리 만무했다. 그럴 마음이 일 푼이라도 있었다면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제자를 절대천룡에게 붙여주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뒤늦게 달려와 참전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경천귀수와 금면수라를 포함한 사벌의 강호들은 절대천룡이 사라져 간 허공에서 시선을 내려 남천도왕을 주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들을 지배했던 절대자는 그들과 다름없이 무기력하고 암울한 낯빛을 드리우고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 사벌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으나, 모두들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히 알았다. 무림은 무황 나중강 이후 반백 년 동안 공석이었던 천하제일인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아직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천하제일인을.
일천 년 무림사 초유의 일이었다.
내기가 격탕되었으나 진천은 경신을 멈추지 않고 내쳐 달렸다.
추격해 오는 자들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했다. 청해검군, 팔극부, 경천귀수, 그리고 금면수라 중 하나만 쫓아와도 부담스러웠다. 만에 하나 남천도왕이 충격을 추스르고 몸소 나선다면 대번에 위급지경에 처할 터였다. 그는 온전한 반면 진천은 절멸도를 부릴 여력이 없었다.
진천은 오늘의 행운에 감사했다. 약간의 변수들이 발생하긴 했지만 대체로 그가 그렸던 대로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에게 위축된 장왕이 이판사판으로 나오지 않고 보신에 급급했던 것이 좋은 출발이었다. 그를 처치하는데 촌각만 지체했어도 양상은 완전히 반대로 흘러갔을 터였다.
남천도왕이 완벽한 몸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도 중요한 이점이었다. 기실 진천은 요행을 바라고 사벌에 잠입한 것은 아니었다. 진천은 장왕의 반응은 물론이고 남천도왕의 상태 또한 정확히 예측했다.
남천도왕은 전날 천지인봉에서 맞닥뜨린 외조부와의 결전에서 내상을 입었을 터였다. 그들이 충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벽력도문의 도호들이 몰려나왔을 터이기에 결판을 내지는 못했겠지만 비무가 아니라 생사투였기에 쌍방 초장부터 간보기를 생략한 채 전력을 쏟았을 게 틀림없었다. 짧은 격돌이었지만 남북의 도왕들은 서로에게 부상을 입혔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진천은 외조부가 정맹이 아니라 원주 강가로 귀환했다는 정보에 주목했다. 그것은 그가 편안하고 안전한 곳에서 회복하기를 바랐다는 뜻이었다. 즉, 내상이나 외상이 생겼다는 의미였다. 외조부와 남천도왕의 무위는 그야말로 백중이었기에 설사 벽력도문 도호들의 조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남천도왕 역시 어느 정도의 내-외상은 입었으리라고 보아야 했다. 전투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목숨을 건 치열한 승부에서는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진천은 장왕을 상대한 직후 남천도왕과 십 초 이상 어울리기는 어려우리라 보았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만약 그로 하여금 서둘러 비장의 패를 쓰도록 유도하지 않았더라면 퇴로가 없는 곤란지경에 처했을 게 뻔했다.
진천은 남천도왕에게 강력한 방수들이 있다는 점을 역이용함으로써 그의 심리적인 허점을 공략했다. 물러날 구석이 있고 기댈 언덕이 있으니 남천도왕은 사력을 다해 그를 잡으려들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 수읽기에서 명의 존재와 위험부담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지만 진천은 명의 도움 없이 사파칠문 수장들의 합공에 대처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수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명에게 계획을 솔직히 털어놓고 의견을 물었다. 명은 일고의 고민도 없이 즉석에서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진천은 그녀에게 충돌이 아니라 견제에 집중하도록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명은 결과적으로 약속을 어긴 셈이었다. 아마도 개산철권이 그녀의 승부욕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명은 그녀와 비등한 무력을 가진 거인을 쓰러뜨리고 싶었을 것이었다. 전날 진천과의 첫 만남 때 그랬던 것처럼 명은 일단 투기(鬪氣)가 오르면 앞뒤를 가리지 않는 성정이었다.
품에 안긴 명을 내려다보며 진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만 어쨌든 명은 무사했다. 초절정 고수들의 강기는 그녀의 갑피를 찢어버렸으나 명줄을 끊지는 못했다. 그리고 숨이 붙어있는 한 명은 금세 회복될 터였다.
장왕을 처치하고 개산철권과 나찰검봉을 폐인으로 만드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진천은 조금 아쉬웠다. 팔극부와 경천귀수, 그리고 금면수라까지 손 볼 수 있었다면 금상첨화였을 터였다. 사파칠문의 주인들은 청해검군 장수영을 제외하면 죄다 반드시 처단해야 할 악인들이었다.
진천은 그들을 세평회 친인들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명은 당장도 일대일로는 누구라도 꺾을 수 있고 소중걸도 오륙 년쯤 후엔 능히 사파의 거두들을 따라잡을 것이었다.
진천은 성주에서 팔십 리가량 떨어진 모악산(母嶽山)에서 은신처를 모색했다. 가급적 사벌에서 멀어지고 싶었지만 더 무리하다간 내상이 도질 수도 있었기에 욕심을 접어야 했다.
기둥처럼 우뚝 선 봉우리의 벼랑에서 적당한 동굴을 찾은 진천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바닥에 내려놓자 명의 삐뚠 입술에서 신음성이 빠져나왔다.
“괜찮소, 명?”
진천은 절로 쓴웃음이 났다. 사파 무림의 이인자라 할 개산철권의 주먹에 직격당하고도 두개골이 온전하다는 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청해검군과 나찰검봉의 검들, 그리고 팔극부의 도끼도 그녀의 갑피를 찢었을 뿐 목과 어깨를 잘라내지는 못했다. 가히 금강불괴라 불러도 과하지 않을 신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의 자가 치유력이었다. 모악산으로 오는 그새 도끼에 찍힌 장작처럼 벌어졌던 상처들이 붙고 있었다. 반시진만 지나면 언제 다쳤냐는 듯 말끔히 아물 것이었다. 실로 경이로운 회복력이 아닐 수 없었다.
고통에 끙끙대면서도 명이 물었다. 진천은 칭찬을 바라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렸다.
“아주 잘 했소, 명. 덕분에 일이 잘 풀렸소. 나를 구해줘서 고맙소.”
명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칭찬에 이어서 주의해야 할 점들을 당부하려던 진천은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해도 될 얘기를 굳이 지금 꺼내 명의 기분을 망칠 까닭이 없었다.
“나는 운공에 들어야 하오, 명. 두어 시진 정도 걸릴 거요. 어쩌면 그보다 길어질 수도 있소. 하지만 늦어도 해가 지기 전엔 끝마칠 테니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주구려.”
짤막하게 응답한 명이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진천은 명의 손을 잡았다.
“그렇소, 명.”
진천의 손에 든 명의 작은 손이 바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