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28
제227화
진천은 눈을 떴다.
동굴 안은 어둑어둑했다. 설마 벌써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건가. 한나절 내내 운공에 들었던 건가.
의아했던 진천은 곧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다. 아마도 날이 흐리기 때문일 터였다. 사벌을 나올 때는 화창했으나 몇 시진이나 지났으니 천공에 먹구름이 몰려왔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진천은 대충 미시나 신시 무렵이리라 짐작했다.
진기를 일주천한 진천은 내상이 깊지 않음을 확인하고는 안도했다. 전력을 다한 강적들과의 결전에서 큰 부상 없이 몸을 보중했다는 것은 천운이었다. 내-외상을 당하지 않으려고 극도로 조심한 덕분이었지만 명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진천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명은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자세로 잠들어있었다. 진천은 그녀의 목과 어깨를 살펴보았다. 도끼에 찍힌 듯 심하게 갈라졌던 검상들이 말끔하게 붙어있었다.
진천은 가만히 명에게 손을 뻗었다. 자는 중에도 그의 동작을 인지한 명이 움찔했다. 그러더니 진천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나요, 명.”
황급히 뒤로 피하며 진천이 소리쳤다. 본능적으로 후속공격을 가하려던 명이 뚝 멈췄다.
변명을 쏟아내는 명을 보며 진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알고 있소. 든든한 명이 곁에 있으니 마음 놓고 운기조식을 취할 수 있었소.”
명이 배시시 웃었다.
진천은 명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제부터의 일정은 명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진천의 분위기가 변했음을 감지한 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천은 단도직입했다.
“우리는 이제 월교로 가야 하오. 그리고 검후를 만나야 하오.”
대번에 명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검후라는 이름이 나왔음에도 전처럼 경기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녀가 명에게 씌웠을 굴레를 벗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 하오. 아무리 무서워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야 하오.”
진천은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 명의 어깨를 잡았다. 이를 악 문 채로 명이 한 자 한 자 뱉어냈다.
강력한 결의와 숨길 수 없는 불안이 동시에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진천은 갈등했다.
혹시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명을 위한답시고 벌이는 일이 오히려 그녀를 망치지는 않을까.
과감한 시도의 근저에는 그 자신의 상태에 대한 조바심이 깔려있음을 알기에 진천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만약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자각이 없었다면 이렇게 무리한 방식을 결행하려 들었을지 의문이었다. 십중팔구 대웅에게 그랬던 것처럼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대응해나갔을 터였다.
기실 진천은 모험을 즐기는 성정이 아니었다. 그는 돌다리도 두드려본 후에야 건너는 사람이었다. 전날 벽력도문을 친 것과 오늘 아침 사벌에서 감행한 기습은 모두 만일의 사태까지 대비하는 평소의 습성과는 거리가 구만리쯤 떨어진 행동이었다.
하지만 수시로 그의 눈앞에 어른거리는 사신(死神)의 그림자는 그에게서 신중함과 여유를 앗아갔다. 진천은 숨이 붙어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과를 얻고 싶었다. 그가 떠난 후 친인들이 떠맡아야 할 짐을 가급적 많이 줄여주고 싶었다. 그것은 갈망이자 욕심이었다.
진천은 월교 행과 검후와의 담판이 정말로 명을 위한 결단인지 자문했다. 유감스럽게도 긍정적인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심란했고 그래서 명에게 미안했다.
마치 진천의 속을 읽은 듯 명이 그를 위무했다.
진천이 명을 끌어당겼다.
“물론이오, 명. 당신을 믿소. 믿고말고.”
진천은 명에 대한 걱정이 기우임을 알았다. 명은 타고난 전사였다. 사실상 최초의 실전 경험이었음에도 적진 한가운데서 개산철권과 같은 초강자들에 맞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던 강심장의 소유자였다. 선천적으로 싸움을 싫어하는 그와는 본바탕부터 다른 여인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심혼에 각인된 검후에 대한 공포를 지울 수 있을 터였다.
진천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던 명이 고개를 들었다.
진천은 가슴이 아렸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천에게서 응답이 없자 명은 부담스러운 질문을 했음을 깨달았다.
진천은 시무룩해진 명의 등을 토닥였다.
“알고 있소, 명. 당연히 나는 명과 함께 할 거요. 그리고 바로 옆에서 명을 응원할 거요. 우리는 잘해낼 거요. 사벌에서처럼.”
명이 진천의 말을 되풀이했다.
진천과 명이 동굴을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비가 쏟아졌다.
두 사람은 비를 맞으며 동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이천 리를 달려 사벌의 영토를 벗어났을 때는 줄기차게 따라오던 비가 그쳐있었다. 하지만 해도 진즉 떨어졌기에 사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진천은 폭이 일백 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중립지대에서 마지막 점검을 했다. 검후와 그녀의 검을 들먹이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쥐어짜내도록 압박을 가했음에도 명은 발작하지 않고 버텨냈다. 검후가 제혼주(制魂呪)를 외울 때도 견딜 수 있을는지 장담하기는 어려웠으나,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진천과 명은 두 달 전만 해도 중립지대에 속했으나 이제는 월교의 영토가 된 소요평(逍遙平)에 들어섰다. 멀리 희붐한 어둑새벽이 평야 끝자락에 병풍처럼 늘어선 산을 넘어오고 있었다.
진천은 속도를 조절했다. 월교가 자리한 장구까지는 이천이백 리 남짓했다. 명이 전속력을 발해 쉬지 않고 달리면 다섯 시진 이내에 주파 가능한 거리였다. 그렇다면 금일 해가 질 무렵엔 당도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진천은 월교에 드는 시간을 늦추기로 했다. 야밤에 도착해 암습을 노리려는 심산이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진천은 그와 명의 도래를 검후가 알기를 바랐다.
정상적인 조건이라면 어제 일출 경에 있었던 사벌의 일이 월교에 전해졌을 테지만 낮부터 밤까지 이어진 폭우로 인해 전서구들이 날아다니지 못했을 공산이 컸기에 그녀가 소식을 접했으리라 확신하기 어려웠다.
진천은 그의 방문을 인지한 상황에서 검후가 어떻게 나올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의 태도에 따라 그도 대응의 방향을 결정할 참이었다.
진천과 명은 천천히 나아갔다.
‘천천히’라고는 하지만 대로를 질주하는 마차들보다 빨랐다. 월교의 영토를 가로지르며 진천은 여러 시진을 지나쳤다. 각양각색의 특징을 지닌 중원의 여타 도시들과는 달리 어디나 비슷비슷한 풍경이었다. 고층 전각들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고 사람들의 의복도 획일적이었다.
일견 궁색한 풍물로 비칠 수도 있었지만 진천은 월교의 백성들이 다른 삼패(三覇)가 다스리는 지역의 민초들보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풍족하지는 않았으나 굶주리는 이들이 없었고 지배세력의 횡포와 착취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월교에도 위계질서가 엄연했지만 지체가 높은 이들이라고 해서 하층민들을 함부로 괴롭히지 못했다. 검후가 철저하게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월교에선 신과 동급으로 통하는 그녀의 명을 거역할 간덩이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전날 진천이 삼보장을 찾은 검후에게 팔대무왕 중 권왕과 그녀를 가장 존경하고 흠모했다고 밝혔던 것은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빈말이 아니었다. 검후의 통치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었지만 진천은 그녀가 중원의 동남방에서 사십 년 동안 행한 선정에 진심으로 찬탄했다. 검후의 치세를 통해 대륙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곤궁했던 땅은 어디보다도 평화롭고 넉넉한 인정이 넘치는 곳으로 바뀌었다.
늘 냉정하고 때로는 잔혹한 면모를 드러내긴 하지만 검후는 근본적으로 훌륭한 군주였다. 진천은 그와의 악연과 무관하게 그녀를 사패의 주인들 중 최고의 통치자로 인정했다. 그래서 더더욱 그녀와 얽힌 사적인 원한이 유감스러웠다.
새벽녘에 장구 인근의 야산에 이른 진천은 얼마 간 휴식을 취한 후, 동이 터오자 아래로 내려갔다.
월교의 도읍이지만 장구는 정맹이 든 일신이나 사벌을 품은 성주와는 비교하는 게 민망할 정도로 소박한 시진이었다. 소박하다 못해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삼층을 넘는 전각은 전무했고 면적은 넓었지만 인구는 일만 오천에 불과했다.
월교의 제십육대 교주로 등극하자마자 황금대궐을 해체했던 검후의 조치를 떠올리며 진천은 단층 와옥이 늘어선 마을에 들어섰다. 날이 밝았음에도 거리엔 인적이 없었다. 진천은 담장 너머의 숨죽인 기척들을 어렵지 않게 감지해냈다. 기실 장구 전체가 묵직한 김장감에 짓눌려 있었다. 모두들 그의 출현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소요평에서부터 대놓고 경공을 전개하며 공개적으로 이동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장구의 지리를 알지 못하지만 진천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평민의 와옥과 구별할 수 없다는 검후의 거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강대한 기운이 일렁이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 기운의 크기는 검후와 월교의 고수들이 한 자리에 운집해 있다는 증거였다. 그럼에도 진천은 망설임 없이 전진했다. 그의 단호한 걸음걸이에 명도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경신을 펼치지 않고 일부러 보행을 택했던 진천은 명의 호흡이 차츰 안정을 찾아가자 안도했다. 그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진인사대천명!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 검후와 결판을 내고 결과는 하늘의 손에 맡겨야 했다.
초가 같은 소담한 와옥의 마당에 총 십칠 인이 일렬횡대로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중앙에서 홀로 두 걸음 삐죽 튀어나온 면사여인은 검후 송하령이었다.
진천은 검후의 오 장 전면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결연한 빛이 감도는 검후의 눈을 외면한 진천은 그녀의 좌우에 도열한 이들을 훑어보았다. 남녀와 노장(老壯)이 섞여있었지만 하나 같이 삼엄한 무기(武氣)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 왼 소매에 금색의 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들은 월교의 중추라 할 금수위(金袖衛)였다. 전원이 초절정의 고수였고, 그 중 다섯은 사파칠문의 수장들에 뒤지지 않는 강호였다. 진천은 그들의 동공에 서린 당혹감을 읽어냈다. 열여섯 쌍의 시선은 그와 명을 어지러이 오가고 있었다. 그들은 명이 검후의 제자라는 풍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상대의 세를 가늠한 진천은 검후와 눈을 맞추었다. 면사 위에 초승달처럼 뜬 검후의 가는 눈들이 실그러졌다. 진천은 검후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그녀의 면상을 가린 면사는 펄럭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진천이 먼저 말을 건네려는 찰나 검후가 침묵의 대치를 깨뜨렸다.
“그날의 일에 대해 사과하지는 않겠다. 다만 책임을 질 뿐.”
“어떻게 말이오?”
진천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금수위들의 기세가 살벌해졌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주군이 뱉은 말을 이해하지 못한 기색을 만면에 드리웠다. 진천은 그들이 벽력도문에서의 일을 모르고 있음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