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29
제228화
진천을 응시하는 검후의 양안에서 청광이 폭사되었다.
“이건 너와 나의 문제다. 월교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이들을 부른 것은 이 점을 분명히 해두기 위함이다.”
진천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검후가 뒤에 늘어선 수하들에게 지시했다.
“다들 일백 장 밖으로 물러나라. 나는 이제 이 아이를 상대로 검을 들 것이다. 설혹 내가 지더라도, 그 결과로서 다치거나 죽더라도 달려오지 마라. 그리고 이들을 보내주어라. 내 명을 어길 시 불충으로 간주하겠다.”
검후의 뒤편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허리춤에 낫을 매단 팔십대 노파였다.
“교주! 그게 무슨 말씀…….”
검후가 백발이 성성한 노파의 말을 잘랐다.
“질문은 허용하지 않겠다. 모두들 명을 따라라. 당장!”
검후의 재촉에도 금수위들은 발을 떼지 못했다. 고개를 돌린 검후가 노성을 터뜨렸다.
“너희가 이 아이 앞에서 나를 망신 줄 참이더냐?”
검후의 서슬에 십육 인의 금수위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진천은 그들이 장내를 벗어나기 전 그에게 쏘아 보낸 안광의 의미가 경고임을 알았다. 만약 검후에게 변이 생기면 그들 중 태반은 그녀가 남긴 명을 어기려 들 터였다.
진천이 고소를 짓자 그의 심사를 짐작한 검후가 마지막으로 몸을 날리는 노파를 불러 세웠다.
“잠깐, 소소(昭昭).”
진천의 짐작대로 노파는 금수위장(金袖衛長)인 일겸단수(一鎌斷首) 백리소소였다. 흉터와 주름으로 덮인 지금의 얼굴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녀는 오륙십 년 전엔 중원오미(中原五美)의 일인으로 꼽혔을 만큼 절세의 미인이었다.
하지만 백리소소의 진정한 명성은 미모가 아니라 출중한 무공과 냉혹한 성정에 있었다. 그녀는 한때 검후 송하령과 난형난제의 무위를 뽐내며 교주 위를 두고 경쟁하던 사이였다. 삼십대 이후 격차가 벌어지며 결국 송하령에게 밀렸지만 오십 년 가까이 월교의 이인자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강자였다.
백리소소는 소싯적에 강호를 주유하던 시절 그녀를 희롱하는 무림의 불한당들을 목을 베는 방식으로 응징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당시의 인상이 워낙 강렬했던 탓에 이십 대 중반에 얻은 무시무시한 별호를 여태껏 달고 있었다.
백리소소는 송하령이 교주에 등극한 이후 대대적으로 벌였던 숙청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인물들 중 하나였다. 그녀의 생존 비결을 두고 검후가 여색을 밝힌다는 등의 민망스러운 수군거림을 포함해 여러 해석이 나돌았으나 단겸일수의 강직한 성품을 송하령이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큰 지지를 받았다. 이유가 무엇이건 백리소소는 그 이후 검후 송하령의 둘도 없는 충복이 되었다.
허공에서 신형을 돌리는 놀라운 신법을 과시한 백리소소가 검후의 앞에 떨어져서는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검후가 예를 차리는 수하를 일으켰다.
“나를 욕되게 하지 마, 소소.”
말귀를 알아들은 백리소소의 노안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교주.”
검후가 백리소소의 손을 어루만졌다.
“교주가 아니라 친구로서 부탁하는 거야, 소소. 들어줄 거지?”
“…….”
묵묵부답인 백리소소의 어깨를 잡으며 검후가 처음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
“나를 욕되게 하지 마, 소소.”
똑 같은 말이었지만 무게감은 사뭇 달랐다. 백리소소는 응답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속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비장한 음성을 토해내는 백리소소를 바라보는 검후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부탁이라니까. 나를 위해, 그리고 월교를 위해 꼭 들어줘.”
“…….”
“이제 가 봐. 무림의 신황(新皇)을 상대해야 할 시간이야.”
마지못해 검후에게서 돌아선 백리소소가 진천을 일별한 후 금수위들이 날아간 방향으로 몸을 띄웠다. 기다란 호를 그리며 멀어져가는 그녀를 쫓던 검후의 시선이 진천에게로 돌아왔다.
“우리의 승부가 어떻게 끝나든 아무도 너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너 역시 월교를 적대시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들이 내게 먼저 칼을 겨누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을 거요.”
진천의 대꾸에 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권왕에게 들은 바에 따라 네가 그런 선택을 하리라 믿었다. 우리 사이의 일은 우리끼리 마무리 짓자.”
검후가 돌연 면사를 벗었다. 그러자 끔찍한 면상이 드러났다. 문드러진 코, 함몰된 광대, 망가진 턱. 그리고 썩고 곪은 피부. 진천은 검후의 추면을 보면서도 덤덤한 신색을 유지했다. 검후의 휘어진 눈에 이채가 서렸다.
“마무리를 짓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꾸나. 내가 이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달고 다니는 이유를 아느냐?”
진천은 질문의 의도를 이해했지만 시치미를 뗐다.
“모르오. 내가 그걸 어찌 알겠소?”
검후의 얽은 얼굴에 미소 비슷한 표정이 떠올랐다.
“권왕이 이르길 네가 무언가를 모른다고 부인할 때는 그저 겸양의 소치일 뿐이니 꼭 재차 물어보라고 하더구나. 그가 허언을 뱉은 게 아니라면 너는 답을 알고 있을 게야. 그렇지 않으냐?”
권왕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진천은 답변을 주어야 했다.
“다른 이들이 엄한 실수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 아니었소? 당신의 얼굴에 동요하는 것을 빌미로 사람들을 계속 처벌할 수는 없었을 테니.”
검후의 일그러진 입술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아, 과연! 맞다, 아이야. 나는 세상에서 쑥덕대는 것처럼 추악한 용모를 가리기 위해 면사를 쓰고 다닌 게 아니었다. 내 낯짝을 보고 본능적으로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 자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그랬던 게다.”
“…….”
“권왕의 권고에 따를 것을. 너와 벗이 되어……, 아니다. 이제 와서 이런 넋두리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미 상을 걷어차 버리고서. 자, 나는 준비가 되었다. 시작하자꾸나.”
갑자기 정색하더니 검후가 검을 뽑았다. 그녀가 발검하자 진천의 등 뒤에 바짝 붙어서 죽은 쥐처럼 조용히 있던 명이 덜덜 떨었다. 진천은 몸을 돌려 명을 안았다. 명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저기에 나무가 있소, 명. 거기에 가 있구려.”
진천이 검지를 뻗어 십이삼 장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를 가리켰다. 명은 눈이 보이지 않지만 기감으로써 거목의 위치와 형태를 잡아낼 터였다.
진천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명이 그에게 매달렸다. 그녀의 삐뚤어진 입술이 실룩거렸으나 검후를 의식한 듯 말을 쏟아내지는 못했다. 진천은 명을 토닥였다.
“내가 명을 믿듯이 나를 믿어주오.”
입술을 깨문 명이 진천의 오른팔을 부러뜨릴 듯 억세게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느티나무로 달려갔다. 이로써 진천과 검후의 대결을 방해할 이들이 모두 마당에서 사라졌다.
진천의 좌수에서 한 자 반 길이의 절멸도가 돋아났다.
각자의 무기를 든 진천과 검후는 오 장을 격한 채 잠시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진천이 그녀의 동공에서 읽어낸 것은 필살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결사의 각오였다. 검후의 양안은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자의 담대함과 평온함으로 빛났다.
기실 검후의 대웅은 예상했던 바였다. 진천은 월교로 향하며 최상과 최악 사이에 여섯 가지 정도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검후는 그 가운데 최상에 가까운 선택을 한 것이었다. 진천으로서는 바람직한 상황이었으나 아직 변수가 남아있었다. 명이었다. 진천은 검후가 비세에 처했을 때 명이라는 패를 어떻게 다룰지 두고 볼 참이었다.
공격적인 성향이었지만 검후는 요지부동의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선공을 양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진천은 기꺼이 그녀의 양보를 수용했다. 환위를 발한 진천의 신형이 단숨에 오 장의 거리를 지우고 검후에게 육박했다.
푸른 검기를 두른 검후의 은빛 협봉검이 진천의 절멸도를 막아갔다. 청강과 백강의 충돌은 후자의 우위로 판명되었다. 진천의 힘을 이기지 못한 검후의 야윈 몸이 칠팔 장이나 밀려나며 후방에 있던 담벼락을 무너뜨렸다. 진천은 그녀를 쫓지 않고 그녀가 몸을 추스를 여유를 허락했다.
공중으로 비상한 검후가 성명절기 중 하나인 만검폭우를 펼쳤다. 진천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강기의 빛살들을 뚫고 치솟아 올랐다. 허공에서의 재격돌에서도 진천은 이득을 취했다. 검후는 그의 절멸도에 실린 진력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진천은 사정없이 검후를 몰아붙였다. 검후는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후퇴를 거듭했다. 결전이 개시된 지 불과 십여 초 만에 궁지에 몰린 검후가 최후의 승부수를 띄웠다.
진천은 씁쓸했다.
예상대로 검후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전날 벽력도문에서 독후와 장왕의 협공을 당했을 때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었음에 분명했다. 첫 번째 격돌에서 그 사실을 알아차린 진천은 기분이 묘했다.
검후는 이미 다른 경지에 올라 선 검왕을 제외하면 상성 상 그에게 최고의 난적이었다. 파괴력만 따지면 팔대무왕들 가운데 최약체라 할 만했지만, 정치함의 측면에선 그녀가 단연 으뜸이었다. 신법을 특장기로 하는 진천에겐 까다로운 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목전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검후에겐 이십여 일 전 삼보장 지하연무장에서 현시했던 날카로움이 보이지 않았다. 큰 차이는 아니었으나 절대지경의 고수와 맞섰을 시엔 생사를 백 번은 가르고도 남을 약점이었다. 이를 검후가 몰랐을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금수위를 동원해 진천을 저지하려 들지 않고 옥쇄를 택한 것이었다.
진천은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다. 죽기를 바라고 싸우는 자의 목숨을 취하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검후의 은검에서 일곱 줄기 섬광이 폭사되었다.
원주 강가의 쌍전과 벽력도문의 십전섬뢰를 합쳐 놓은 듯한 절초 칠환채(七環彩)였다. 진천은 일곱 개의 고리 중 세 개는 쳐내고 네 개는 빗겨냈다. 비장의 한 수가 무위로 돌아가자 검후는 전의를 잃었다.
진천은 그가 쏘아 낸 절멸비에 허벅지를 맞아 땅에 추락한 검후의 목에 절멸삭을 둘렀다. 검후가 호신강기를 거두었기에 진천이 왼손을 슬쩍 당기기만 해도 그녀의 두부는 몸통에서 분리될 터였다.
땅바닥에 엎어진 검후가 목에 걸린 강기의 밧줄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진천은 절명삭을 느슨하게 풀어줌으로써 자진하려는 검후의 의도를 무마시켰다.
진천을 노려보며 검후가 결연한 음성을 뱉어냈다.
“끝을 보거라.”
진천은 검후의 목을 자르는 대신 절멸삭을 회수했다. 그를 바라보는 검후의 까만 눈동자에 혼란이 그득했다.
“무슨 뜻이냐?”
즉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인 진천이 반문했다.
“어째서 명을 이용하지 않았소?”
진천과 검후 사이에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먼저 말문을 연 이는 검후였다.
“너는, 모든 것을 알고 있구나.”
그 말로 진천은 그가 짐작했던 바가 들어맞았음을 깨달았다. 힐끗 느티나무 쪽을 쳐다본 검후가 변명하듯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술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닥치는 대로 살겁을 저지르며 미쳐 날뛰는 그 아이를 죽여야 했을 게다.”
명과 검후에 얽힌 저간의 사정이 궁금했지만 진천은 급한 불부터 끄기로 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건 지금은 그녀를 놓아주길 바라오.”
“나는 그 아이에게 미련이 없다. 세평회에 들어도 상관없으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진천이 명을 불렀다. 거목 옆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명이 쪼르르 달려왔다.
그러더니 눈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검후를 마주하기가 부담스러운지 매미처럼 진천의 등에 붙었다. 진천은 그의 뒤에 숨은 명을 앞으로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검후에게 요구했다.
“명을 놓아주시오.”
검후의 흉측한 얼굴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이미 말하지 않았더냐? 이제 그 아이가 어디를 가건, 무엇을 하건 관여치 않겠다. 그 아이는 자유다.”
엄한 스승에게 회초리를 맞을 차례를 기다리는 학동처럼 떨고 있으면서도 명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나 진천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완전한 자유요.”
“무슨 소리냐?”
“명에게 걸린 제혼술을 풀어주시오.”
진천의 요구에 검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불가하다. 그 아이의 심혼을 묶은 사슬을 끊어낼 유일한 방법은 나를 죽이는 것뿐이다. 너도 알고 있을 게 아니더냐?”
진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소. 내가 알기론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소.”
“설마…….”
말을 잇지 못하던 검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아이에게 고통만 줄 뿐 아무 실효도 없을 게다. 무리수를 둘 바엔 나를 믿어보는 게 어떠냐? 앞으로 그 아이에게 제혼주를 읊을 일은 없을 것이다.”
진천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가 강호에서 사라진 후 검후의 태도가 변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진천은 오늘 기필코 명의 족쇄를 풀어줄 참이었다.
“안 되오. 반드시 해야 하오. 지금 당장.”
검후의 휜 눈이 일그러졌다.
“일이 잘못되더라도 나를 원망하지 마라.”
진천이 명에게 마음을 다잡도록 격려할 겨를도 주지 않고 검후가 주문을 외웠다.
“귀왕신모(鬼王神母)가 명하노니 북명(北冥)의 종은 혼백을 바쳐…….”
풍을 맞은 노인처럼 떨고 있던 명이 별안간 고막을 뚫어버릴 듯 뾰족한 괴성을 내질렀다.
그 소리가 신호이기라도 한 양 멀리서 추이를 살피고 있던 십육 인의 금수위가 저마다 병기를 빼들고 쏜살같이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