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32
제231화
장대비가 내리던 어느 날이었어.
한낮이었지만 폭우 때문에 아이들은 마당에 나와 놀지 않았어. 종일 지켜보다 날이 저물도록 아무도 보이지 않자 나는 숲으로 돌아갔어.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사실은 나 자신이 너무 처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어.
사냥을 하려는데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렸어. 나는 냉큼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달려갔어. 낯이 익은 약초꾼 하나가 무리에서 쫓겨나 홀로 떠돌아다니는 쩔뚝이 늑대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이었어.
그 늑대는 나를 알아. 예전에 멋도 모르고 나한테 덤비다 혼났거든. 늑대고기는 맛이 없어 죽이지 않고 그냥 다리만 분질러 놓고는 보내주었는데 그 다음부턴 나만 보면 도망가기 바쁜 놈이었어.
약초꾼은 길쭉한 나뭇가지를 들고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내가 보기엔 쓸데없는 짓이었어. 늑대가 여유를 부리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진즉 목덜미를 뜯겼을 거야.
나는 고민했어. 절대로 사람들 일에 끼어들지도 말라던 엄마 말이 계속 생각났어. 하지만 내버려두면 약초꾼은 늑대 밥이 될 게 뻔했어.
실은 이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어. 산속 깊숙이 들어온 사냥꾼 하나가 호랑이에게 물려죽는 걸 우연히 보았는데 그때는 지켜보고만 있었어. 엄마가 살아있던 때였던 데다 그 호랑이는 나도 버거운 상대였거든.
어쩔까 궁리하고 있는데 결정할 새도 없이 늑대 녀석이 약초꾼을 덮치는 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달려 나갔어. 나를 본 늑대가 약초꾼의 코앞에서 펄쩍 뛰더니 달아나버렸어. 약초꾼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더니 뒤늦게 뒤에 선 나를 보고는 괴성을 내질렀어. 나는 나중에야 그게 ‘귀신’이라는 말이라는 걸 알았어.
정신을 차린 약초꾼은 용기를 내서 내 팔을 만져보더니 한숨을 내쉬었어. ‘귀신’이 아닌 걸 알았나봐. 나한테 뭐라고 떠들었는데 너무 빨리 말하는 통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나는 천천히 말하라고 했지만 그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어.
약초꾼은 늑대가 돌아오기 전에 가야한다며 나를 안아들려고 했어. 나는 피하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내 몸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야. 약초꾼의 동작에서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어.
나를 양팔에 받쳐 든 약초꾼은 마을까지 뛰어갔어. 그 사람의 초가까지 가는 데 한참 걸렸어. 내가 안고 갔다면 금방 갔을 텐데.
아무튼 나는 그렇게 해서 그 약초꾼의 집에 들어가게 됐어. 약초꾼이라고 했지만 그것도 나중에야 알게 된 거야. 그때는 사냥꾼과 약초꾼을 구별하지 못했어.
약초꾼 네는 그를 포함해 여섯 식구였어. 그의 아내와 네 아이들. 아이들 중 셋은 사내고 나머지 하나는 여자였어.
나는 여자애랑 친해졌어. 나이는 몇 살인지 모르지만 나보다 체구가 약간 컸어. 하지만 그 아이는 몸이 약했어. 약초꾼이 궂은 날씨에도 산에 들어간 건 그 아이 때문이었어. 산골에서 일곱 밤을 걸어가면 큰 고을이 나온대. 그곳의 약방에 산에서 캔 삼(蔘)을 갖다주면 그 아이 병을 낫게 해 줄 약을 받을 수 있다고 했어. 하지만 산삼을 찾는 건 사냥꾼이 호피를 얻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했어.
그 집에서 나는 행복했어.
먹을 게 부족해 늘 굶주렸지만 그 가족은 서로를 아끼며 보살폈어. 나한테도 잘 해줬어.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옷이란 걸 입어봤어. 누더기로 아랫도리를 가리는 정도였지만 나는 너무 기뻤어. 나도 사람이 된 것 같았거든.
하지만 그 집은 고작 여섯 채밖에 없는 마을에서 제일 서열이 낮았어. 가장 권세가 높은 집은 내가 항상 구경했던 사냥꾼 네였어. 아이들이 열둘이나 있었다는 데 말이야.
사냥꾼이 약초꾼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 집 아이들은 이 집 아이들을 하인처럼 부려먹었어. 힘과 수에서 밀리니까 당할 수밖에 없었어. 그렇다고 마을을 떠나 따로 살 수도 없었어. 혼자서는 짐승들로부터 자기를 지킬 수 없기 때문이야.
나는 얼마간 약초꾼의 딸하고만 어울렸어. 다른 아이들하고 놀고 싶기는 했지만 하루 종일 쉴 틈도 없이 일하는 약초꾼 부부를 대신해 잘 걷지도 못하는 그 아이를 돌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어. 그 아이를 보고 있으면 엄마가 생각났거든.
나는 그 아이에게서 본격적으로 말을 배웠어. 전에는 잘 알아듣지 못하던 말들을 이해하기 시작하니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하지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어.
나는 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소리들을 알게 됐어. 사냥꾼 네 아이들은 나를 ‘못생기고 재수 없고 요상한 벙어리’라고 불렀어. 나는 곡식이나 채소를 먹으면 다 토했어. 아무리 애를 써도 뱃속에 담아 두질 못했어. 그래서 한밤중에 몰래 집을 빠져나가 들쥐를 잡아먹곤 했어. 그러다 한 번은 야밤에 사냥꾼과 마주쳤어. 내 입가에 묻은 피를 본 그 사내는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더니 그냥 갔어. 나는 나중에 그가 마을에서 기르는 닭과 염소들의 수를 확인했다는 걸 알았어.
원래 내가 관심을 두고 그들의 무리에 끼고 싶어 했던 사냥꾼 네 아이들이 수시로 몰려와 나를 조롱하곤 했지만 상관없었어. 난 그 약초꾼 가족과의 생활에 만족했어. 먹는 것만 약간 불편할 뿐 나머지는 다 괜찮았어. 엄마만큼은 아니지만 엄마처럼 다정하게 대해주는 약초꾼 부부와 아이들이 좋았어. 그래서 그 집에 오래오래 머물고 싶었어.
그 일은 내 잘못이 아니었어.
나는 그들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그들은 너무 약골이었어.
그날의 사달은 이랬어. 놀리는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사냥꾼 네 아이들 중 둘이 대뜸 나에게 ‘역적놀이’의 역적으로 삼겠다며 달려드는 거야. 약초꾼 네 아이들이 허둥지둥 막아섰어. 사냥꾼 네 아이들은 말리는 그 아이들을 마구잡이로 때렸어. 다른 집 아이들도 동조했어.
마루에서 보고 있던 내 친구가 울면서 사정을 하자 나도 소리쳤어. 그만 두라고. 그러자 그 망할 자식들이 ‘어버버’하며 내 말투를 흉내 내더니 나에게 몰려왔어.
나는 나를 잡으려는 그 아이들 손을 뿌리쳤어. 그랬는데 그만 처음에 나섰던 아이의 팔이 수숫대처럼 뚝 부러진 거야. 그 아이가 아프다며 발광을 하자 다들 나한테 떼거지로 덤벼들었어. 그러다 내 옆에 있던 내 친구가 그놈들 중 한 명한테 밟혀서 비명을 질렀어. 다분히 고의적인 짓이었어.
나는 혹시라도 사람들을 마주치게 되면 철저하게 힘을 감추라던 엄마의 당부를 어기고 내 친구를 밟은 자식을 잡아 패대기쳤어. 그놈은 그 자리에서 어깨가 으깨졌어. 그러자 그놈 형이 나에게 발길질을 했어. 나는 그놈 발목을 꺾어버린 후 지붕 위로 던져버렸어. 깜짝 놀란 다른 아이들이 주춤주춤 물러서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어.
그렇게 된 거야.
어른들이 몰려왔어. 손마다 몽둥이며 칼을 들고.
배를 밟힌 내 친구가 혼절했기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나는 그들을 봐 주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어. 그래도 그들이 말로 풀려고 했으면 힘을 쓰진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무기를 휘둘렀어.
나는 더 이상 참지 않았어. 약초꾼 네 부부가 애원하지 않았다면 모조리 목을 부러뜨렸을 거야.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자들을 살려줄 까닭이 없잖아.
내가 앞장서서 덤벼들던 사냥꾼의 칼을 빼앗아 맨손으로 두 동강 내자 다들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어. 나는 얼이 빠진 사냥꾼을 걷어찼어. 그나마 근골이 튼튼한 자였어. 살살 차긴 했지만 배가 터지진 않았어. 기절하지도 않았고.
그 자가 나를 죽이라고 악다구니를 썼지만 나에게 겁을 먹었는지 사람들은 슬금슬금 몽둥이를 내려놓더니 전의 아이들 마냥 부리나케 달아났어. 약초꾼이 혼자 남겨진 사냥꾼을 부축해서는 그 자의 집으로 데려갔어.
나는 나중에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그때 다 죽였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나에게 친절했던 약초꾼 네 가족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내 친구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나를 치러 왔던 자들을 쫓아버리긴 했지만 나는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그걸 알려준 이는 약초꾼이었어. 뭐, 정확하게는 그에게 그러도록 이른 마을사람들이지만. 사냥꾼의 집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나는 거기서 오갔던 얘기들을 다 들을 수 있었어.
약초꾼은 나한테 자기 집을 떠나달라고 했어. 내가 있으면 자기들이 거기서 살 수가 없다며.
나는 내 친구의 뜻에 따르겠다고 했어. 그녀가 가지 말라고 할 거라고 믿었거든. 하지만 그녀는 내 믿음을 저버렸어.
나에게 말을 가르쳐주던 내 친구는 나더러 가라고 했어. 눈에 두려움을 가득 담고서.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사냥꾼의 집에 모인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입에 올렸던 말이었어. 나는 훗날에야 그 단어가 ‘요괴’임을 알았어.
내 친구의 태도에 충격을 받은 나는 그 집을 나왔어. 사실 나는 그 친구랑 헤어지는 게 싫었어. 정이 든 약초꾼 네 가족과 계속 같이 살고 싶었어. 하지만 그들은 나를 원하지 않았어. 그들은 나를 짐으로 여겼어. 그들은 나를 버렸어.
내 친구와 약초꾼에게 서운한 마음에 일자 눈물이 쏟아졌어. 엄마가 나를 떠난 날처럼. 엄마가 떠오르자 나는 갑자기 막막해졌어. 다시는 혼자 살 자신이 없었어.
그래서 생각했어. 어떻게 하면 다시 약초꾼 네와 함께 지낼 수 있을까. 돌아가서 사냥꾼과 마을 사람들한테 미안하다고 해볼까. 앞으로 사슴이며 멧돼지며 산짐승들을 잡아주겠다고 해볼까. 그러면 그들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까.
아니면 약초꾼 네를 내가 살던 절벽으로 데려갈 수도 있어. 바다엔 물고기가 풍족하니 굶을 일은 없을 거야.
나는 내 말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건 생각도 못하고 무작정 발길을 되돌렸어. 어떻게든 약초꾼과 그 집 아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았어.
몸을 돌리고서야 나는 마을에서 꽤 멀리 떠나왔음을 알았어.
벌써 해가 떨어져 사방이 어둑어둑했어. 나는 산을 넘고 또 넘었어. 친구와 약초꾼 식구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떠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렸어.
마을에 가까워지자 왠지 모르게 심장이 펄떡거렸어. 흥분한 탓이 아니었어.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야. 불길한 소리를.
나는 정신없이 내달렸어. 그리고 보고 들었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는 불길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약초꾼의 초가에 이르렀을 때는 모든 게 끝나있었어. 내가 머물렀던 집은 온 데 간 데 없었어.
나를 발견한 마을 사람들은 귀신을 본 것처럼 놀라더니 횃불을 내던지고 뿔뿔이 흩어졌어. 나는 잿더미 속에 뒹구는 뼈들을 보았어. 그리고 약초꾼 네 가족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았어.
그 이후는 잘 기억이 안 나. 아마도…… 나는 그 마을에 살던 사람들을 전부 죽여 버린 것 같아. 도망치는 자들은 따라가서 죽였고, 숨어있는 자들은 찾아내서 죽였을 거야. 나는 귀가 아주 밝아. 아무리 작은 숨소리도 다 들을 수 있어.
나는 절벽으로 돌아갔어.
엄마가 죽었을 때처럼 매일 울었어. 친구가 보고 싶었어. 몸이 건강해지면 무얼 할 건지 소곤거리던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어. 나를 ‘벙어리’가 아니라 ‘벌거숭이’라고 부르던 약초꾼 네 가족들이 그리워서 미칠 것만 같았어.
해와 달이 숱하게 바뀌었어. 그래도 나는 나아지지 않았어. 그래서 다시 절벽을 내려왔어. 엄마가 머리에 나타나 그러지 말라고 말렸지만 더 이상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어.
오래도록 숲을 돌아다녔어. 하지만 좀처럼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 나는 좀 더 멀리까지 나가봤어. 그러다 어느 산에서 사냥꾼 무리를 찾아냈어. 나는 그들을 쫓아가기로 했어. 그들의 마을에 가면 약초꾼 가족처럼 나에게 잘 대해주는 이들을 접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어.
사냥꾼들을 따라가며 나는 먼젓번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어. 내 힘을 보이지만 않으면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을 거라 믿었어. 하지만 일이 내 뜻대로 풀리진 않았어. 나는 산골마을에서보다 훨씬 나쁜 일들이 내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몰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