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33
제232화
명의 음성에 인생을 다 산 노인의 회한 같은 심정이 깃들었다.
진천은 명이 동목(東穆)을 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검후에 따르면 동목은 인구 이천가량의 소읍이라고 했지만 여섯 채의 가구에 삼사십 명의 산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에서 지낸 명에겐 엄청난 대처(大處)로 보였을 터였다.
진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창인에서도 종종 일어났던 일이었다. 술에 취한 이족의 청년들은 사소한 시비를 빌미 삼아 패싸움을 벌이곤 했다. 그들을 말려야 할 대왕객잔의 장초는 도리어 싸움을 부추겼다. 그 문제로 허 노야와 장초 사이에 여러 차례 언쟁이 오갔었다.
진천이 다른 생각에 빠진 줄도 모르고 명이 얘기를 계속했다.
진천은 명이 발견한 곳이 거지소굴이리라 짐작했다.
검후가 다스리는 땅에선 원칙적으로 빈민이나 거지가 없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아무리 성군이라 한들 햇볕이 들지 않는 음지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는 법이었다.
거지패의 일원이 된 명은 왕초에게서 바로 그 다음날부터 구걸에 나서도록 명령 받았다.
왕초는 어른만큼이나 덩치가 큰 사내아이였다. 덩치에 걸맞게 힘도 세고 성질이 포악했기에 아이들에겐 저승사자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왕초는 아이들이 구걸해 온 음식을 독점했다. 몰래 빼돌리기는 불가능했다. 아이들로 하여금 서넛씩 짝을 짓게 하고는 서로를 감시하도록 시켰기 때문이었다. 만약 왕초에게 바치기 전에 ‘별미’를 한입이라도 슬쩍하면 입이 뭉개지고 다리가 부러질 각오를 해야 했다. 심한 경우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왕초는 아이들이 모아온 음식 가운데 제일 좋은 것은 자기가 먹고 나머지는 그가 선호하는 순서대로 차별적으로 배분했다. 명처럼 순위가 끄트머리에 있는 아이들은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던져주었다. 큰 선심을 쓰듯. 은혜를 잊지 말라는 말과 함께.
명은 괄시와 푸대접을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명은 모두가 잠든 새벽에 동굴 밖에 나가 들쥐를 잡아먹음으로써 허기를 채웠다.
명을 ‘흉측한 벙어리’라고 명명한 왕초는 수시로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만 보면 낯짝을 치우라며 침을 뱉었고 이유 없이 걷어차기 일쑤였다.
왕초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명은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토끼’ 때문이었다.
명이 구걸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실 거지들은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첫날부터 ‘토끼’와 짝을 지어 그녀를 내보냈다.
동그란 눈에 살결이 희고 귀가 길어 토끼라고 불린 소녀는 곱상하면서도 가련한 용모 덕분에 많은 동정을 얻었다. 동목 사람들은 추면의 명은 눈살을 찌푸리며 외면했지만 토끼에겐 동냥을 아끼지 않았다. 토끼의 성과물이 다른 거지들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은 적도 많았다. 질적으로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토끼는 왕초에겐 보물이나 진배없었다.
명은 나중에 다른 아이들이 토끼를 둘러싼 거지패들간의 암투에서 왕초가 최종 승자였다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말하자면 토끼는 일종의 전리품이었던 셈이었다.
명은 토끼가 좋았다.
토끼는 가냘프고 허약했다. 산골마을의 친구처럼 병을 앓지는 않았지만 다리에 힘이 없어 조금만 걸어도 주저앉곤 했다. 명은 그녀의 옆에 붙어서 돌볼 수 있어 기꺼웠다. 엄마와 지내던 시절이 떠올라서였다.
명에게 업혀 동굴에서 저자를 오갈 때면 토끼는 늘 자기 때문에 고생해서 미안하다고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명은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신이 났다. 꿀처럼 달콤한 말들이었다.
명은 토끼와 친해졌다.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토끼는 명의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다. 그녀와 의사소통이 가능해지자 명은 기쁨으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마치 엄마가 살아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나날이 행복했고 매일매일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명은 꿈결 같은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리라 믿었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밤이었다. 한 가지만 빼고.
왕초는 그날 평소에 끼고 자던 계집아이들 대신 토끼를 불렀다. 명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산골에서 약초꾼 부부가 가끔 하던 짓이었다. 약초꾼의 아내가 헐떡이는 정도를 넘어 숨이 넘어갈 듯 신음성을 질러대는 통에 처음에는 신경이 곤두섰었다. 그러다 그녀의 친구가 부부에게 가려던 명의 손을 슬며시 잡고는 엄마아빠는 ‘아이’를 만드는 중이니까 방해하면 안 된다고 해서 잠자코 있었다.
명은 왕초가 토끼를 불러서 기뻤다. 토끼가 아이를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토끼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음 날 저자로 나가는 길에 명은 아이가 생기면 들이서 잘 돌보자고 떠들어댔다. 토끼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저자에 다 가서 그녀를 등에서 내리고서야 명은 그녀가 울고 있음을 알았다. 깜짝 놀란 명이 왜 우는지 물었지만 토끼는 답을 주지 않았다.
그날 토끼는 기록적인 성과를 얻었다. 하루 종일 우는 통에 오가는 사람들마다 아낌없이 온정을 베풀었다. 동전을 두 닢이나 쥐어준 이도 있었다. 저녁에 그 돈을 받아들고서 입이 찢어진 왕초는 한달음에 객잔으로 달려가 만두를 사 먹었다.
토끼는 다음 날도 울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명은 점점 불안해졌다. 이러다 토끼가 자기처럼 벙어리가 될 것 같았다. 진짜 벙어리가.
명은 토끼에게 애원했다. 왜 그러는지 알려달라고. 잘못한 게 있으면 용서해달라고.
토끼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에 명은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죽고 싶어.”
명이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었다. 명은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알고 있었다.
토끼를 부둥켜안은 명은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죽지 말라고. 자기하고 오래도록 같이 살자고.
토끼는 명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그녀들을 감시하던 두 거지아이가 떨어진 틈을 이용해 말했다. ‘그’가 살아있는 한 죽는 게 낫다고. ‘그’가 죽어야 자기가 산다고.
명은 어리둥절했다. 토끼가 말하는 ‘그’가 왕초임을 알고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왕초는 토끼를 끔찍이 아끼지 않던가. 왕초가 왕이라면 토끼는 왕비나 다름없었다.
영문을 몰랐지만 명은 왕초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토끼를 살리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토끼를 기쁘게 할 요량으로 그 얘기를 하자 그녀는 반기기는커녕 화들짝 놀라며 만류했다. 그러다 네가 죽을 거라는 토끼의 말에 명은 고개를 저었다.
토끼는 명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면서 앞으로 울지 않을 테니 ‘괜한 짓’ 하지 말라고 사정했다. 명은 그녀의 바람대로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작정한 대로 풀리지 않는 게 인생이었다.
그날 밤 왕초가 또 다시 토끼를 불렀다.
명의 옆에 누워있던 토끼는 호랑이라도 본 듯 굳은 상태로 벌벌 떨었다. 명은 그녀 대신 일어섰다.
왕초가 험상궂은 인상을 한껏 일그러뜨렸다.
“뭐라는 거야, 저 덜 떨어진 벙어리가. 당장 찌그러지지 못해?”
명은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왕초에게 다가갔다. 토끼가 그녀에게 매달렸다.
“그러지마. 약속했잖아. 나는 괜찮아. 봐! 아무렇지도 않아.”
말과는 달리 토끼의 뺨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명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토끼의 손을 떼어놓았다. 사납게 노려보는 왕초의 얼굴에 약초꾼 가족을 불에 태워 죽인 사냥꾼의 면상이 겹치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토끼를 빼앗아가기 전에 손을 써야 했다.
명이 왕초에게 다가가자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토끼는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명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왕초는 명에게 마주 걸어왔다. 굳이 몽둥이를 들 필요도 없었다. 삐쩍 마른 계집아이 따윈 한 손으로도 목을 부러뜨릴 수 있을 터였다.
명은 그녀의 목을 움켜쥐기 위해 뻗어온 왕초의 손을 잡고 비틀었다. 뚜두둑, 뼈가 부러지는 기음에 이어 왕초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예상 밖의 사태에 아이들이 혼비백산했다.
왕초를 무릎 꿇린 명은 망설였다. 마음만 먹으면 썩은 내가 나는 그의 머리통을 부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낮에 토끼에게 했던 약속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 짓’도 하지 않기로 한 약속은 어겼지만 ‘괜한 짓’을 할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찰나의 망설임이 왕초의 생사를 갈랐다. 명의 힘을 절감한 왕초는 저항을 포기하고 구명을 간청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무슨 일이든 다 할 게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폭군의 비굴한 모습에 동굴 안의 모든 아이들이 충격을 받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동굴을 가득 채운 정적을 깨뜨린 것은 누군가가 내지른 고함이었다.
“죽여! 죽여 버려, 그 새끼!”
그 말을 기화로 수십 개의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일부 아이들은 말로 그치지 않고 왕초에게 달려와 발길질을 해댔다.
명은 왕초를 놓아주었다. 굳이 그의 머리를 깨뜨릴 까닭이 없었다. 아이들에게 맡기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었다.
명은 넋이 빠진 것처럼 우두커니 선 토끼에게 갔다. 그러고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명의 어깨너머로 성난 아이들에게 몰매를 맞고 있는 왕초를 흘낏 바라본 토끼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는 명의 소원에 화답했다.
“그래. 우리, 오래오래 함께 살자.”
명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결코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운명의 신이 얼마나 고약한 성질을 가진 악당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