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34
제233화
동목이 소란스러워졌다.
물론 마을 외곽의 냄새 나는 동굴에서 벌어진 소동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거지 떼의 우두머리에게 일어난 비극은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돌풍이 불어 줄에 걸린 빨래가 떨어진 것만큼이나 사소한 일이었다.
왕초는 명줄이 끊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한 중상을 입었으나 목숨은 건졌다. 그러나 사지와 척추가 부러진 바람에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기어 다녀야 했다. 아이들은 불구가 된 그를 무리에서 내쫓았다.
그런 몸으로 밖에 나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으나 그를 거두자고 나서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새롭게 두목이 된 명의 눈치를 보아서가 아니라 그가 왕초 시절 저질렀던 패악에 한이 맺힌 탓이었다.
기실 아이들이 그의 숨통을 끊어놓지 않은 것은 ‘미운 정’의 소산이 아니라 살아서 더 고생을 해보라는 심산의 발로였다. 말하자면 아이들로서는 응당한 보복이었고 왕초에겐 자업자득이었다.
명은 왕초의 운명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토끼의 얼굴에 전에 없던 웃음꽃이 피어서 행복할 따름이었다. 명은 ‘흉측한 벙어리’에서 일약 ‘대장’으로 승격되었다.
아이들은 그들로서는 대항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왕초를 단숨에 꺾어버린 명을 괴물 보듯 두려워했다. 하지만 명이 왕초처럼 폭력으로써 그들을 지배하지 않고 무심하게 대하자 차츰 긴장이 누그러졌다.
평화로운 생활이 이어졌으나 문제가 아주 없지만은 않았다.
발단은 음식배분에 얽힌 갈등이었다. 명은 기본적으로 토끼가 먹을 것만 챙길 뿐 아이들이 가져온 음식의 처분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 사이에서 다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사달을 일으킨 부류는 왕초 시절 그의 심복이었거나 총애를 받던 아이들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음식의 양질 모두에서 누리던 혜택이 박탈된 셈이었기에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명의 눈치를 보느라 불만을 표출하지 못했으나 그녀가 토끼에게만 신경 쓸 뿐 다른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하자 차츰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동굴 안은 음식이라는 전리품을 둘러싼 전쟁터가 되었다. 아이들이 싸우건 말건 명이 거들떠보지도 않자 싸움은 일상이 되었다. 매일 밤 벌어지는 아비규환 속에서 부상자가 속출했고 종내에는 무리를 떠나는 아이들도 나왔다.
상황이 이쯤 되다 보니 아이들은 뒤에서 명을 욕했다. 심지어 왕초의 후순위로 밀려 그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들마저도 그녀를 비난했다. 그들의 불만은 명에게 대장이라는 명칭에 걸맞은 지도력이 없다는 데만 국한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토끼를 구걸에 내보내지 않은 명의 처사를 원망했다.
토끼 혼자서 얻어오는 음식은 다른 아이들 전체가 가져오는 양과 맞먹었다. 예전에 왕초가 그녀에게 붙였던 아이들은 그녀가 받은 음식들을 동굴로 나르기 바빴었다. 그런 보물을 썩히고 있으니 아이들로서는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내부투쟁과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아이들은 결국 명을 제거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그들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명이 동굴 밖에서 속닥이는 소리를 잡아낸 탓이었다. 명은 잠자코 밖으로 나가 무력시위를 했다. 그녀의 앙증맞은 주먹이 수박만한 돌덩이를 일격에 부수자 아이들은 반란의 꿈을 접었다. 머리통이 바위보다 단단할 수는 없었다.
거지패의 사정과 무관하게 동굴 바깥은 시끌시끌했다.
외부에서 들이닥친 변화 때문이었다. 동목에 유룡관(幼龍關)이 들어선다는 소문이 동굴까지 날아왔다. 동목 어디를 가든 다들 그 얘기뿐이었다.
유룡관은 승천팔관(昇天八關)의 첫 번째 관문인 승천제일관의 별칭이었다. 유룡관에 드는 것만으로도 출세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설사 제이관(第二關)인 흑룡관(黑龍關)으로 올라가지 못하더라도 동목 정도의 고을은 발아래 두고도 남을 권세를 가지게 될 터이기 때문이었다.
인구가 이천도 되지 않는 동목이 유룡관을 품게 된 건 일종의 어부지리였다. 동목보다 규모가 다섯 배 이상 큰 세 시진이 유룡관 유치를 두고 경쟁하다 이런저런 잡음이 일자 월교에서 엉뚱하게 동목을 후보지로 내정해버린 것이었다.
동목의 주민들은 월교의 결정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들로서는 뜻밖의 횡재나 진배없었다. 모두들 동목에 떨어질 떡고물을 기대하며 한껏 들떴다. 하지만 그들의 마을에 넝쿨 째 굴러들어온 행운의 호박이 끔찍한 참극의 씨앗이 될 것임을 예상한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명이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진천을 보았다.
명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진천은 명이 무슨 생각을 떠올렸을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약초꾼의 딸과 관련된 것이리라.
진천은 족제비란 아이가 말한 방법이 무엇일지도 넉넉히 짐작했다. 유룡관일 터였다.
토끼를 업은 명은 족제비를 데리고 동목에 하나밖에 없는 약방으로 달려갔다.
약방의 주(朱) 약사는 족제비가 내뱉는 황당한 소리에 화가 나기보다는 기가 막혔다. 아무리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종자들이라지만 백주대낮에 저런 개소리를 지껄이다니. 추악한 면상의 벙어리 계집이 곧 유룡관에 들 터이니 병약한 소녀를 고칠 약을 달라고? 값은 나중에 톡톡히 치르겠다고?
하인을 시켜 거지아이들을 쫓아버리려던 주 약사는 다음 순간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벙어리 계집이 제 몸의 세 배는 됨직한 창이 놈을 간단히 제압하더니 절구통으로 다가간 것이었다. 그러고는 장정 둘이 매달려도 쩔쩔 맬 절구통을 한 손으로 들어올렸다.
주 약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벙어리 계집이 현시한 괴력은 동목에서 가장 힘이 세기로 정평이 난 뱃사람 두공(杜供)조차도 흉내 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두공도 어찌어찌 한 손으로 절구의 무게를 버틸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저런 자세로 들어 올리고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벙어리 계집이 정말로 유룡관에 들 수도 있을 거라 판단한 주 약사는 흥정에 응했다. 외상이지만 충분한 대가를 기대해도 좋을 거래였다. 설령 벙어리 계집이 유룡관에 들지 못할지라도 저런 장사라면 얼마든지 다른 곳에 써먹을 수 있을 터였다.
주 약사가 약을 내줄뿐더러 아예 토끼를 약방에 데리고 있으면서 치료해주겠다고 하자 명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명은 그녀가 아는 감사의 인사법대로 땅에 엎드려 이마를 바닥에 박음으로써 주 약사를 흡족하게 했다. 명의 순종적인 태도를 본 주 약사는 그녀도 약방에 머물러도 좋다고 허락했다.
모든 근심이 한 순간에 해소되자 명은 날아갈 것 같았다. 그 시점에서 세상은 온통 분홍빛이었다.
월교의 무관(武官)들과 유룡관에 들 무동(武童)들이 대거 동목에 입성했다.
각지에서 뽑힌 어린 용들은 총 마흔네 명이었다. 그 중 삼분지일 정도가 흑룡으로 승급한다고 했다. 모두의 눈빛엔 기필코 제팔관(第八關)까지 올라가 천룡이 되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욕망이 가득했다. 하지만 제사관(第四關)인 황룡관(黃龍關)까지만 가도 기적에 가까운 일임을 다들 알고 있었다.
이미 인원이 찼지만 월교는 형식적이나마 동목의 아이들에게도 기회를 주었다. 그렇지만 보잘것없는 어촌에서 평균적으로 오백 명 중에 하나 꼴로 건진다는 원석이 나올 거라 기대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진천은 씁쓸했다. 명이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쉼 없이 이어지던 명의 회상이 끊기고 침묵이 길어지자 오래도록 묵묵히 듣기만 했던 진천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이제 결정적인 대목이 나올 차례였다.
“유룡관에서의 생활은 어땠소, 명?”
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진천은 만약 그녀의 동공이 온전했다면 원독의 안광을 뿜어냈으리라 짐작했다.
“…….”
명이 유룡관에서 무동들에게 당했던 일들을 묘사하기 시작하자 진천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명에 대한 그들의 악의가 어떤 결말을 초래할지 예감해서였다.
명은 토끼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그날 저녁 그녀를 보았다. 약방이 아니라 유룡관 뒷마당에서.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