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35
제234화
명을 불러낸 아이는 매당(梅唐) 출신의 고천(高天)이었다.
고천은 특정가문과 방파를 인정하지 않는 월교 내에서 몇 안 되는 명문가 태생이었다. 그의 조부와 부친은 월교의 명망 높은 고수들이었고, 위로 두 형은 모두 유룡관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해 흑룡관에 든 기재들이었다.
동목의 유룡관에서 자신이 당연히 최고가 되리라 자신만만했던 고천은 온주(溫州)나 가정(嘉廷)에서 온 무동들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촌무지렁이에게 뒤쳐지자 현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빼빼 마른 그 촌무지렁이는 전에 무공이라고는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 년에게 선두를 빼앗긴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입관 백일을 앞두고 고천은 이대로 일차 심사를 맞이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재수 없는 벙어리’에게 일등을 빼앗기면 집안 망신이었다.
최악의 경우 온주의 소태섭(蘇太燮)이나 가정의 백웅종(白雄宗)에게 밀리는 건 용인할 수 있지만 ‘흉측한 년’에게 제일유룡(第一幼龍)의 영광을 넘기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소태섭이나 백웅종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런 연유로 그들과의 작당은 물 흐르듯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너무나도 뜻이 잘 맞는 바람에 하마터면 형제결의까지 할 뻔했다.
경쟁자들과 의기투합한 고천은 최초의 제안자로서 개중 가장 영민하다고 자부하는 두뇌를 앞세워 치밀한 계획을 짰다. 일곱 명의 무공교위 중 그를 포함한 세 아이의 가문의 입김이 닿지 않는 두 명을 유룡관 밖으로 유인했다. 그들을 끌어낸 묘책은 미인계였다. 고전적인 수법이었지만 그만큼 효과가 탁월했다.
성가신 검위(劍衛)와 창위(槍衛)를 연화루(蓮華樓)로 보내 방해꾼들을 사전 제거한 고천은 과제의 성사를 낙관했다. 설사 뒷마당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지더라도 유룡관에 남아있는 다섯 교위는 모른 척할 것이었다.
은빛의 낫처럼 예리하게 휘어진 초승달이 나뭇가지에 걸린 밤이었다.
고천을 따라 뒷마당에 나온 명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열두어 명가량의 무동들이 서넛 씩 짝을 지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하지만 명이 놀란 까닭은 그들의 존재 때문이 아니었다. 나이는 열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웬만한 어른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백웅종이 솥뚜껑만한 손으로 누군가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명이 꿈에서도 잊지 못하던 ‘토끼’였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 당황하는 명의 귀에 승냥이처럼 생긴 고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허, 조심해야지. 섣불리 덤비다가 저 어여쁜 아이가 목이라도 꺾이면 어쩌려고.”
그렇지 않아도 백웅종에게 달려들려던 명은 멈칫했다.
명이 소리쳤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말을 알아듣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설령 알아들었다고 해도 그 청에 응했을 리 만무했다.
고천의 야비한 음성이 명의 고막을 때렸다.
“벙어리지만 말귀라도 알아들어서 다행이다.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라, 뼈다귀. 우리는 너를 동료로서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알고 보니 거지 두목이었더군. 그 주제에 유룡관에 들 생각을 했다니 뻔뻔하기 이를 데 없구나. 원래는 다시는 건방진 꿈을 꾸지 못하도록 따끔하게 혼내주려 했지만 그래도 지난 몇 달 간 한솥밥을 먹은 정이 있으니 가벼운 징치로 넘어가주마. 미리 경고하는데 우리의 정당한 조치에 저항하려 들면 저 어여쁜 아이의 목숨은 없다. 이 점 명심하도록. 거지아이 하나가 사라진다고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쯤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 테지?”
고천의 협박에 명의 눈앞이 하얘졌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토끼와 눈이 마주친 명은 그녀를 안심시켰다.
명의 말을 순종의 의사표시로 해석한 고천이 비수를 들고 대기 중이던 소태섭에게 눈짓을 했다. 소태섭은 벙어리의 발목 힘줄을 포함해 여섯 군데의 급소를 손 볼 참이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벙어리는 앞으로 무공수련은 고사하고 정상적인 생활에도 상당한 불편을 겪게 될 것이었다. 기실 ‘가벼운 징치’는 ‘가벼운 말장난’이었다. 손을 쓰기로 작정한 이상 확실하게 끝을 보아야 했다. 적어도 고천은 그렇게 배웠다.
고천은 혀를 내둘렀다
힘줄이 잘려 고통이 극심할 터인데도 벙어리는 비명은커녕 신음성조차 흘리지 않았다. 실로 독종이었다.
한편으로는 천만다행이었다. 기실 고천은 인질이 제 역할을 할 가능성을 절반 이하로 잡았었다. 하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정보를 제공한 거지새끼들한테서 약방에 박힌 병약한 계집아이가 벙어리에게 ‘특별한 물건’임을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벙어리가 순응을 거부하고 날뛸 사태를 대비해 삼파(三派)의 심복들을 모조리 동원했던 처사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벙어리를 피투성이로 만든 소태섭이 구경하던 무동들에게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작업이 완료되었음을 알렸다. 너무나 싱겁게 끝나 고천은 맥이 빠졌다. 그런 연유로 무동 중 하나가 쓰러진 벙어리를 툭 차는 걸 묵인했다. 고천이 방관하자 다른 무동들도 가세했다. 명의 야윈 몸뚱이에 악의로 가득 찬 발길질이 쏟아졌다.
명은 육신의 고통을 견뎌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오로지 토끼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토끼가 무사하다면 자신의 몸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었다.
그러다 명은 들었다. 토끼의 흐느낌을. 그녀의 가쁜 숨소리를.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명은 소스라쳤다.
심중에 떠오른 그림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명은 애벌레처럼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보아야 했다. 토끼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
“…….”
“…….”
“…….”
“…….”
“…….”
“……!”
진천은 가슴이 저몄다.
그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는 불문가지였다. 명에게 못된 짓을 저질렀던 무동들은 적색으로 화한 그녀의 동공을 보고는 혼비백산했을 터였다. 단지 눈동자 색깔만 빨개진 게 아니라 어떤 공격에도 꿈쩍하지 않았을 테니 전설의 반인반괴를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었다.
유룡관에 난리가 났음은 필연지사였다. 무공교위들이 있다고 하지만 각성한 명의 상대가 되었을 리 만무했다. 살기와 광기에 젖은 명은 ‘숨 쉬는 모든 것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을 것이었다.
참사는 유룡관에 한정되지 않았다. 아무 잘못도 없는 동목의 주민들이 미쳐버린 야수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자그만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운 격이었다.
평화로운 어촌을 시산혈해로 만든 명은 수천의 인명을 학살하고도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산야를 달리며 짐승들을 마구잡이로 죽였을 터였다. 그러다 그녀를 뒤쫓아 온 검후에게 걸려 광란의 질주를 멈춰야 했던 것이었다.
명의 삐뚠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진천은 말없이 명의 등을 쓰다듬었다. 명이 머뭇거렸다.
진천은 명이 잇지 못한 뒷말의 내용을 입 속에 가두었다. 알려주지 않아도 명이 알 터이기 때문이었다.
명의 음성이 조심스러워졌다.
진천은 명을 부드럽게 안아줌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이제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어야 할 때였다.
“명이 가여울 따름이오. 약초꾼 네도 토끼도. 참극에 휩쓸려 애꿎은 피해를 입은 동목 사람들의 넋도.”
명이 죄를 시인한 수인처럼 고개를 떨궜다.
진천은 착잡했다.
명은 살인마가 아니었다. 악종도 아니었다. 그녀의 모친과 약초꾼의 딸과 토끼라는 소녀는 모두 병약한 사람들이었다. 명은 그들을 성심성의껏 돌보았다. 악한 심성을 가진 이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명을 살인마로 만든 자들은 소수의 비열한 악한들이었다. 사냥꾼과 그의 아들들, 동목 유룡관의 몇몇 무동들. 그들이야말로 명에 의해 벌어진 무고한 죽음들의 진정한 원흉이었다.
“잘못은 명으로 하여금 약초꾼이나 유룡관의 아이들처럼 살수를 쓰도록 만든 이들에게 있소. 하지만 그렇다고 명의 책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오.”
명이 입술을 깨물었다.
바람직한 질문이었다.
“내 고향에 디안 할아버지라는 어른이 계시오. 내가 몹시 존경하는 분이라오. 그분 말씀이 무언가 선행을 하면 세상 어딘가에서 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나쁜 짓을 하면 또 세상 어디선가 한 방울의 독수(毒水)가 생긴다고 합디다. 그러면서 그 독수를 맑은 물로 만들려면 적어도 열 그루의 나무가 필요하다고 하셨소.”
그의 말이 지닌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명을 바라보며 진천이 말을 이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전날 명은 많은 독수를 만들었소. 무고한 이들이 흘린 피가 작은 호수를 이루었을 지도 모르오. 그 호수를 정화시키려면 크고도 넓은 숲이 있어야 할 거요. 평생에 걸친 선한 생각, 선한 말, 선한 행동만이 그런 숲을 일구어 낼 수 있소.”
진천은 일부러 추상적으로 얘기했다. 명이 두고두고 곱씹어 볼 수 있도록.
명이 물었다.
“나도 잘 모르오. 아마도 명이 산골마을의 친구나 토끼에게 가졌던 마음을 다른 이들에게도 나눠주는 게 아닐까 싶소.”
“물론 유룡관의 무동들처럼 정당한 이유 없이 남을 괴롭히는 자들은 예외요. 이전에 얘기했듯 그런 악당들은 혼을 내줘야 하오. 그렇기에 더더욱 강해져야 하오, 명. 악당들이 선을 행하고 악을 미워하는 명을 겁내 못된 마음을 품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진천이 명의 손을 잡았다.
“고맙소, 명. 다만 한 가지만 더 당부하고 싶소.”
진천이 답을 주려는 찰나 명이 별안간 경기를 일으켰다.